레이블이 The Being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The Being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0년 6월 2일 수요일

낙관주의

성선설을 믿는다는 건 본질적으로 환경결정론자라는 뜻이다. 환경결정론자들은 구조주의를 통해 세계를 해석했고, 지옥은 필연이 아니라는 희망을 생산해냈다. 이것은 하나의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어느쪽인지 대략 가늠이 잡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선의로 세계를 해석한다)-고 믿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노무현의 자결이 무위로 돌아간다면, 이 나라에서 정치운동을 통해 뭔가를 시도하기는 틀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뭐, 이미 그렇진 않은 것 같지만.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판도라의 상자

1.

'판도라의 상자'라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판도라라는 처자가 있었는데, 신이 그녀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 줬단다. 절대로, 절대로 열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상자를 주면서 열지 말라니 무슨 심보였는지 짐작은 되지 않지만, 하지 말란 짓은 원래 더 하고 싶은 법. 그녀는 결국 이 상자를 열어젖혔고, 상자 안에서는 질병과 고통, 증오, 분노와 같은 온갖 못된 것들이 잔뜩 튀어나와 인간 세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다시 닫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신의 명령을 어긴데다 대형사고까지 쳐버렸으니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에게 상자 속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단다. 기왕 배린 몸, 판도라가 상자를 다시 열어보니 그때 나온 게 바로 '희망'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악의 근원에 대한 신화로, 흔히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 저주받은 상자에 과연 좋은 게 하나라도 들어 있었을까. '희망 고문'이라는 신조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저주로써 작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2.

인간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의견이 판이한 것 만큼이나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러하다. 나는 오랜 생각 끝에 노무현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인간형에 닿아 있다고 판단했는데, 말인즉 내가 그를 '군자(君子)'의 한 전범으로 삼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끝없이 회의하던 사람으로, 회의를 통해 학습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며, 그의 두드러진 용기는 폭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인간애에서 비롯한 것이었기에 절제가 있었다.

 

운나쁜 타인을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 틀린 것에 성낼 줄 아는 수오지심, 자신의 행운에 교만해지지 않는 사양지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남을 옳게 구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옛 성현들이 군자의 조건으로 세운 네 덕(인,의,예,지)을 그는 모두 갖추었다. 군자란, 임금된 자다.

 

 

3.

공화주의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보다 유별나게 뛰어날 순 없다는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에 선악을 묻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 이익의 평균값이 떠도는 어딘가에서 최선 아닌 차선이나마 건져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나는 순혈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라기 보단, 본질적으로 왕당파에 가깝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래도 그나마 그것이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박지만이나 전재국, 전재용이 통치하는 '대한왕국'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덕분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행운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였다. 자본이 곧 권력인 이 시대를 고대 로마 시대에 비유하자면 저 자본가와 현대판 귀족들은 집정관과 원로원이며, 평민에 의해 선출되는 권력은 호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시기에 마침 좋은 호민관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흔치 않다.

언제나 그래왔듯 호민관은 집정관에 비해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떠났다. 왠일인지 어떤 평민들은 도무지, 자신이 평민임을 자각하질 못하는 까닭이다.

 

 

4.

그래서 어쩌면, 노무현의 가장 큰 죄악은 평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는 어쩌면 확률 범위 안의 작은 파동이었을 뿐인데 어떤 전조로 오독된 것이었다면.

 

하여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나는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그의 이름 아래 희망을 건다. 조선 반도에 역사란 것이 시작된 반 만년 이래 처음 스스로 곡기를 끊은 임금이 이곳을 떠난지 단 1년 만에 벌써 그날의 황망함을 다 잊었다고 한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사형제 존폐론 단상

요즘 일각에선 사실상 폐지되었던 사형제를 다시 집행하자는 얘기로 시끄러운 모양이다. '살의'를 그토록 쉽사리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의 단순함이 두렵다.

 

사형제도에 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뜻이다. 이 '어떤 경우'는 사형제나 정당방위와 같이, 법률에 의거함으로써 얼마간 공정성을 보장받긴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100%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1)

 

국가의 할 일이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잠적한 범죄자를 찾아낸다던가, 가난 구제(*2)와 같은 일들이다. 우리가 군대나 전쟁을 통해서 배운 바와 같이, 살인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국가가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꼬리가 몸통보다 기네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쪼가리뷰] 시가테라

(스포일러 있음.)

 

 

 

1. 소년 판타지

<시가테라>는 찌질이 루저가 예쁜 여자애랑 떡치는 소년 판타지물이다. 6권의 단촐한 구성으로, 3권의 첫경험 장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 순간.*1

`나구모(히로인)... 다 보여...`

`오기노(주인공)군도 다 보여...` *2

 

짜증나는 부분은 (아마도 한국어판에서만) `가장 중요한 장면`-나체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에 팬티와 브라를 그려 입힘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망쳐버렸다는 점이다. 빌어먹을 15금. 다소 외설적인 묘사라도 할라치면 블로그에라도 비닐캡을 씌울 기세. 자유 없는 곳에 창조 없다. 정부는 각성하라~

 

 

2. 후루야 미노루.

저 유명한 <이나중 탁구부>*2의 작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고 계획도 당분간 없지만, 오래전 대강 훑어본 것만으로도 작품의 위대한 `병맛*3 포쓰`를 느껴볼 수 있었다. <시가테라>는 이런 `병맛` 전문 작가 후루야의 진지한 극화라는 이유로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답게, 아마도 `만화 역사상 가장 찌질하게 진지한 주인공` 상을 받아도 적당할 캐릭터 메이킹은 여전했다. 찌질이가 줄곧 바보짓만 하는 `진지하지 않은 개그만화`와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성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만화의 장르는 `청소년 성장 드라마`로 분류할 수 있다.

<이나중 탁구부>, 이런 만화다.

 

3. 사춘기

일본 만화-를 비롯한 각국의 온갖 대중 예술작품들-에는 이 시기를 다룬 작품이 많다. 이 시기를 거치는 중인 독자들이 대중문화의 주 소비계층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컨텐츠 생산자들의 연령대는 천차만별이 아닌가. 차라리 이 시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작가든 독자든 그것에 `고착`되게끔 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흔히 `질풍노도`에 비유되는 이 시기는, 21세기라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4. 청소년 지도와 관련-

불량소년 타니와키는 귀를 잘리고 돌아온 여름방학의 결과로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 과정은 극히 단촐하게 묘사될 뿐이지만, 또한 극히 현실적이다.

 

타니와키(주인공 오기노의 상상 속 이미지)

 

`참고로 타니와키는 그 사건에서 약 한 달 후, 집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오랜만에 등교한 문제아가 귀가 잘려져 있었으니, 학교 측도 큰일이다 싶어 녀석의 동네까지 가서 빨리 대책을 세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야만과 문명 사이를 거치고 있는 우리라면, 아무래도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모두 말할 때까지 너 집에 못 가.` 이게 고문이다. 예전엔(혹은 여전히) 이 과정에 흔히 `사랑의 매`가 동원되곤 했다...

아니다. 타니와키는 이런 상황이 오기도 전에 진작 퇴학을 당해 소년원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덜 독한 인간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훨씬 더 무서운 범죄를 더 가볍게 해치우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우리의 학교 역시 너무도 일찍 아이를 포기하곤 한다.

 

 

5.

똥 무더기를 뒤져 꽃씨를 찾아내는 작업은 상찬받아 마땅하다. 그 안은 불결하고 추악하기 떄문에라도 보통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것을 헤집어 보는 데는 많은 용기와, 낙관적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그 낙관에 전적으로 동의할 뿐더러, 그 용기에는 존경심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펼쳐두기..


 

2010년 3월 3일 수요일

쉼표

몰입의 달인들은 쉼표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모든 몰입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쉼표가 필요하다.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만 년짜린 없어

0.

사랑이, 대략 2년에 걸쳐 벌어지는 생리현상의 일종임은 분명하다. 이는, 어떻게 초극될 수 있을까.

 

 

1.

여체는, 극히 섬세한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나 섬세한지, 30억의 시리얼 넘버가 있다면 30억 종의 작동 방식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역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절대로 도중 '왓더헬암두잉히야?'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언제나 절대로 항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다. 때로 난폭함을 동원한 생략은 '수컷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상의 '암컷성'을 극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 법적 윤리적 책임이겠지만...) SM플레이와 같은 것들은 이러한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요소가 이상적인 무드(조명의 밝기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교환된 감정의 선율과 같은 것들까지) 아래에서 이상적으로 배열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예지란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또한 환경 역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게 보통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다. 말하자면, 이제 막 사랑에 빠져 서로를 열어보려 하는 두 사람의 욕망의 강도는, 앞으로 습득해나갈 서로에 대한 정보량과 정확히 반비례하게 된다. 누구라도, 줄줄이 암송할 수 있는 책을 다시 읽고 싶진 않은 것이다.

 

 

1.

'나'라는 존재가 나의 육체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다음에야, '나를 안다는 것'에는 일정 비율 이상, '나의 몸을 안다는 의미'가 포함되며, 마찬가지로 '나의 몸을 아는 남'은 분명히 연애 또는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적인 비밀은, 많은 연인들이 가장 흔하게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1.

물리력이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있다. 망치를 집어들어 정수리 쯤을 힘껏 내리치면 된다. 혹, 누군가의 영혼을 쓰다듬어주고 싶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영혼을 쓰다듬어주었으면 하고 느낀다면, 일단 누군가에게 머리를 내어맡길 일이다.

 

대체로 부모들이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부모를 닮은 대상'에게서 안식을 구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처럼 자기 표현에 쓸데없이 엄격한 '때곳'에서는, 대상의 부모에게서 좋은 관계란 것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서로를 더 많이 더 자주 쓰다듬어주고, 서로에 대해 더 깊이 넓게 이해할수록 사람은 더 오래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둘 중 하나가 죽어 사라질 때까지, 혹은 둘 다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이를 영원한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안고 싶고, 당신이 다른 남성에게 당신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함으로써 행복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기를 또한 바람과 동시에, 그 곁에 내가 항상 함께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당신은 내가 최근 느끼는 많은 행복감의 원인이며, 당신 역시 나로 인해 잦은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상태를 일컫는 말로 사랑 말고 다른 것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욕망? 욕망은 사랑의 상위 개념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비롯한, 때로 숭고하게 여겨지는 많은 사랑들 또한 서로 대상과 형식을 달리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집착? 사전은 집착을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으로 정의한다. 이 경우 사랑으로 추정되고 있는 나의 감정상태는 '다소 집착하는 사랑'으로 묘사될 수 있다. 즉 집착은 사랑을 수식하는 말이지, 사랑 아닌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경중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모든 사랑은 일종의 집착이다-라고도 말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고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꽤나 열렬히 욕망하며 제법 집착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이나.

 

 

허나 사랑의 약속은 물 위에 쓴다고 했다. 언제가 될까. 당신과 나의 눈앞에 드리워진 콩깍지의 커튼을 들어 내는 날은. 키스하며 입냄새를 느끼게 되고, 서로에 대한 신비감에서 비롯했던 존경심이 여지없이 벌거벗게 되는 그날. 우리는 이미 여러번 서로의 알몸을 보았고 앞으로도 수없이 보아나갈 테지만, 진정으로 발가벗은 영혼을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약속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약속을 걸고자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준 것만으로도 앞으로 당신이 보여주게 될, 당신은 스스로 추하게 여길지도 모를 당신의 모습을, 무조건적인 선의와 함께 해석해나갈 것이다. 설사 우리의 관계가 보편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닥칠지라도 이 약속은 유효할 것이며, 이는 모든 상황을 야기할 책임이 당신보다는 내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포르노 단상

 

포르노물은 그 자체로도 꽤 즐기는 편이지만, 그럴듯한 핑계도 따로 있다.

 

핑계인즉슨, 어떻게 하면 변화무쌍한 인간의 성욕을, 단 하나의 이성하고만 평생토록 섹스하도록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어쩌면 포르노 제작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일본의... ... 또 어쩌면 이 질문은 주로 남성들에게 주어진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제9계명을 한 번도 어겨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여기서 제외된다.

 

욕망은 해소되어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되곤 한다. 이는 건전하지 않다.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문명은 우리의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발전해왔다. 문명은 더욱 세련되어질 수 있으며, 이는 모든 욕망의 건전한 발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 건전함에 대한 합의야말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헌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 된다. 법은 과연 "최소한의 도덕"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망할 법이 헌법을 거슬러가며 포르노를 금지하고 있으니... 이런 뭣같은 경우가 다 있나. 아동 포르노나, 미성년자 매매춘과 같은 문제는 경제정책의 과제지 윤리로 따져들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 생명이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허용된다.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후회에 대하여

왠지 근래에 알게 되는 이들은 "난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후회 같은 걸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모르겠으나, '난 절대로 후회한 적 없어'로 보이는 경우엔 좀 난감하다. 후회가 무슨 큰 죄악인양 할 때도 있고, 외려 너무 큰 후회할 거리가 있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후회는 바람직한 것이다. 후회란 장차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다짐이다. 같은 상황이란 게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라 문제지, 선택의 기회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다른 선택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같은 선택을 할 만하다면 애당초 후회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내게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는 '행복한 사람' 또는 '행복을 가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이 정도면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아?"라든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와 같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까.

 

2010년 2월 9일 화요일

결국 정치

돈이 아니라 권력이다. 메뉴판을 들고 내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권력. 사랑하지 않는 고객님에게 사랑을 고백케 하는 권력. 돈은 매우 합리적으로 고안된 권력의 계량 단위이다. 즉 돈은 권력의 교환가치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다.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게 아니라 권력에 의존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권력은 추구해볼 만한 가치이다.

마키아벨리가 선의의 권력자를 위해 대중을 조작하는 법을 고안했다면, 이제는 대중에서 시민으로 각성한 하나하나 스스로가 주변의 소수를 조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조작'은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작이 나쁜 게 아니라 오도된 선의가 나쁜 것이다. 설득할 수 없다면 조작과 선동이라도 해야 한다.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아바타 옹호하기도 지친다 정말

"내가 이르케 날아와써. 이게 너야. 내가 이르케 틀어써. 바람 느껴져써. 나 되게 세게 틀어따구."
"응응. 나도 급하게 날개를 굽혔어(bank)."
 
 
내가 만약
전략핵무기를 포함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에 명령을 내릴 어느 한 사람을 선발할 권리를 가졌음에도
가장 높은 문맹률을 자랑하는 어느 백인 집단을
문명인답게 계몽할 목적으로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티끌 만큼의 더함도 뺌도 없이 딱 아바타처럼 만들 거다.

 

그리고 또한 제임스 카메론과 똑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어

혹시라도 뭔가 인류에 기여하고 싶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별로 없을 거라고도 나는 확신한다.

 

지구라는 요람에 60억의 인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지구는 언제나 제몸에 엉겨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될만큼의 먹을 것을 내줘왔다. 잘못은 항상 나눠먹는 방식에 있었지 지구에 있지 않았다.

 

컨셉아트 중 하나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The Road>


1.
사람이란, 오래 굶다 보면 서서히 몸이 약해지고, 곧 병들어 죽는다.
만약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한 경우엔 어떨까.

 


2.
이 영화는 삭막하다. 시종일관 어둡고, 희망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다. 딱정벌레 한 마리에 걸어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 영화를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많이 아프다.

 

길 위에선, 함께 절망을 견뎌줄 수 있는 동행이 필요하다. 그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성장한 자식이나, 친구, 혹은 동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온전히 홀로 그 절망을 견뎌야 한다면. 그 절망의 끝에는 어떤 희망도 약속되어 있지 않으며, 아니, 희망이란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

 

때때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무채색의 바람이 불어대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굳이 종말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관객을 이끌고가는 힘은 오로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강렬한 부성, 아니, 그것을 넘어선 이유와 흔적에 대한 집요함이다.

 


3.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때때로, 대개 잠 못드는 밤이다.

 

여럿이 함께 이 영화를 본다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엔, 몇몇은 쫓기듯 서두르며 절망을 털어내려 할 것이다. 더러는 감독을 원망하며 눈물을 좀 떨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여 개중 나와 닮은 이들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피하며 극장을 빠져나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게 될 것 같다.

 

 

 

"If I were God, I would have made the world just so and no different."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아바타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관련글.

http://blog.naver.com/hajin817?Redirect=Log&logNo=60097100997
http://www.cyworld.com/inbj220/3456761

 

 

냉소적인 태도를 훈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사실은, 냉소의 대상이 자신보다 강자인 경우 냉소는 찌질한 투정에 불과할 것이며, 약자인 경우는 인간실격
의 한 증거가 될 수 있으리란 점이다. 따라서 적절한 냉소란 사실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대상에겐 분노를,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대상에겐 짜증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불쾌감을 드러낸다고 봤을 때, 현대인은 분노는 점점 잃어가고 짜증만 늘고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발견해버린 이 거대한 세계 앞에서 점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대략 비슷하다.

 

나는 이러한 '짜증의 과잉'이 하나의 시대적 유행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설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가장 크게 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DJ는 이를 두고 "담벼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 했다.

 

물론 이런 정말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분노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편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힘을 상상할 수 있는 이라면, 북경에서 퍼덕인 나비의 날개가 뉴욕의 증시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는 관객 모두에게 어떤 영웅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또다른 아바타 조종사 노엄처럼 군바리놈들에게 죽빵 한방 날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헬기조종사 트루디처럼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할 수도 있을 터다. 그것도 아니라면 홈트리 붕괴 때 눈물이 그렁해진 이름 없는 오퍼레이터 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이입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런 보통사람들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반쯤 돌아버린 소위 '예술영화'의 또라이들이 아니라.

 

아바타의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그래, 난 바보를 좋아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사랑할 어떤 이의 별명도 '바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바보가 어느 너절한 평론가보다 지능이 낮았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If you are one of us... Help us"

얘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단 마음이 들면 '바보'인 거야?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아바타> 극장 관람 후기

 

"I see you"

 

1.

오히려 3D는 기대만 못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했었지만, 그보단 관람 매너 따위 알 리 없는 꼬꼬마들과, 4시 방향에서 끊임없이 종이 봉지를 구겨댄 이유가 궁금한 '스크자응' 한 분, 그리고 영화는 중반까지 왔는데 "어머, 쟤가 제이크야?"라고 묻던 7시 방향 아가씨까지,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빨리 돈 벌어서 극장이나 하나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동족들에 대한 투정은 이 정도로만 하자. 적어도 덕분에 30대 독신남 홀로 극장에 앉아 질질 짤 만큼 몰입하진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런 걸 감사히 여긴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기를.

 

각기 다른 표정에 주목

 

2.

이미 천 만 가까운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한다. 두 번, 세 번 본 이도 있을 테니 실제 관객수는 조금 모자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다. '이런' 대박 블록버스터들이 흔히 그러하듯 작품의 감상과 평가도 "최고다!"에서부터 "쓰레기다"까지 양 극단을 아우르는 듯하다. 다소 감성적인 다수파와, 냉소적인 소수파.

평소 최후의 소수파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아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주저없이 다수파 곁에 서기로 했다. 그들이 옳다. 내 편이 제대로 봤다.

 

내게도 세상에 대한 냉소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건전한 재능을 쌓아올려야 할 시기에 내 정신은,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익기도 전에 병들었다." 멀리 혹은 넓게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들, 불합리들, 부도덕들을 노둣돌 삼아,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고 결론지었었다. 악화는 언제까지나 양화를 구축할 것이고,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것이다. 이런 곳에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고 별달리 용기있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오늘 또 하루 간신히 숨쉬며 휘청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2002년 겨울,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나 답게 좀 느릿한 걸음으로.

<아바타>는 이런 우리들에게 바쳐진 영화다.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가장 울컥했던 장면. 사랑해요 트루디!

 

3.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21세기에 속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권위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봉건의 잔재들도, 철모르는 아나키즘과 대책없는 낙관주의 같은 것들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 머물러 있다.

한때 나의 영웅이던 이문열 같은 이들은, 역사를 권위주의와 아나키즘의 무한루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 <칼레파타칼라>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 <호모 엑세쿠탄스> 이후의 그의 책은 하나도 읽질 않았으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없다면 여전히 희망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 <아바타>는, 가상의 별 '판도라'를 통해 20세기를 매조지하려 한다. 그 방식은 새 시대의 첫차라기 보단 구 시대의 막차다. 영화가 '피에타'서부터 <원령공주>, <공각기동대> 등 일본 애니메이션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놀랍게도, 아직도 '오마쥬'라는 말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휘라고 한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일에 표절이니 패러디니 매번 난리굿.)

마침(?) 판도라는 고통과 희망이 함께 담긴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과학기술 즉 문명이, 신성(神聖)의 영역을 침범할 때 간혹 인용되곤 한다.

 

"Network of energy"

 

4.

생떽쥐베리는 "완벽이란 무언가를 더 할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했다던데, 나는 이 어르신 말씀을 신용하는 편이다. <어린왕자> 쯤 되는 작품을 쓰고, 날아 다니다 죽었으면 그런 양반이 한 얘긴 복음처럼 들어줘야 한다.

 

<아바타>에는 단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더라. 하기는 러닝타임 162분에 제작비 3천억 원, 페르미식 막계산 때려보면 프레임 하나 당 무려 100만원꼴이다. 단돈 13000원에 이런 위대한 성취를 목격할 기회를 얻었다면, 조용히 찬가나 부르는 게 나 같은 필부의 역할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쪼가리뷰] Avatar, 어머니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Avatar, 어머니 가이아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검색해보니 CGV 홈페이지에 링크된 리뷰만 600편이 넘는다. 나올 얘긴 벌써 거진 다 나왔을 것 같다. 한 편의 리뷰로 엮을 의미는 더 이상 없을 듯해서, 늘 하던대로, 쪼가리뷰로 정리한다.

 


1. 가이아 가설


영화 <아바타>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먼저 '가이아 가설(지구유기체설)'에 대한 이해를 조금
쯤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15년 전 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이것을 접했을 때는 항상 '가설(hypothesis)'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언젠가부터인지 무려 '이론(theory)'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하기는 '이론'을 '검증된 가설'이라고 정의한다면, 이것도 이론은 이론이겠다. 반박될 수 없고 따라서 검증될 수도 없으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유신론이다.

 

판도라(열어서는 안될, 또 마지막 희망이 든 상자-라는 의미의) 행성은, 인류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 비해 고도로 진화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어머니 대지' 가이아에 비해 더 정교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신경망이 빤히 눈에 보이는 덕분에 관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판도라의 '식물'들은 지구의 식물과는 겉보기만 같지 우리로 치면 오히려 동물에 가깝다. 광합성 하는 원생생물, 클로렐라의 파이널 버젼이랄까.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건 누가봐도 '피에타'다. '성모'와 상처입은 그녀의 아들.

 

 

제임스 카메론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바타> 역시 강인한 모성을 희구한다. 네이티리는 제이크를 향해 "너(너희, 영어의 you가 단수와 복수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는 아기 같아. 소란을 피우고 해야할 바를 모르지."라면서도 결국 가르치고 보살피는 역할을 떠맡는다.

물론 "가득 찬 잔을 채우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지치지 않는 호기심이 있기도 하다. '용기'와 '호기심'은 <반지의 제왕>과 같은 환타지 세계관에서 흔히 인간종족의 미덕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2. 스머프 포르노?


어느 어줍잖은 블로거가 평하길, <아바타>는 "스머프 포르노"란다. 버섯 아래 사는 파란 녀석들의
섹스파티니까 나름 적절하긴 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포르노 작품을 보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불필요한 이유로 금지된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포르노 또한 예술의 극한영역 가운데 하나다.

 

나비족의 '사타구니'는 영화 극초반에 단 한번 노출되는데, 외성기가 없다. 팔랑거리는 천조각 하나로조차 가릴 필요는 사실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관객들은 더 큰 이질감을 느꼈을 테지만. 이질감은 곧바로 영화수익의 감소로 이어졌을 테고.

 

나비족의 외성기는 인디언식으로 땋은 머리털(사실은 음모)로 가린 채 뒤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구생물에게 익숙한 삽입식 성행위 대신, '플러그를 연결하듯이' 성합할 것이다. 바로 "샤헤일루(the bond)"다. 말과도 하고, 익룡과도 하고. 그러니 포르노가 맞긴 맞다.

 

 

 

3. <아바타>는 대마초 영화?


나비족의 외성기(?)와 대마의 암꽃

 

나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 외국 포럼을 뒤져보니, "Avatar was a pro-marihuana movie"라는 아티클도 있더라. 비약과 망상은 떨쟁이들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긴 하지만, 영화도 그걸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What the hell have you people been smoking out there?"
파커, 그레이스와 언쟁 중에.

 

해서, 제임스 카메론의 관련 발언을 조낸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가이아 가설'의 창시자 러브록도 마찬가지. 다만 관련 뉴스그룹에서 그의 이름이 엄청,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되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흥미로운 사이트 하나


 

 

4. 악역은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쿼리치 대령은, 사실 존경할 만한 불굴의 용사다. 그의 '울타리 밖의 적'이 설사
저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였다고 해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는 소통이 결여된 용기를 대표한다.

 

 

 

5. 판도라의 미래


<아바타>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 한다. 다음 편을 예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주요 테마는 틀림없이 '인간의 역습'이 될 것이다. 인류는 눈 앞의 이익을 결코 포기해본 적이 없다. 문명화(civilize)를 거부하는 나비족이 어떻게 하면 더 강력한-어쩌면 전술핵무기까지도 동원할- 우리의 역습에 맞설 수 있을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후속편이 나오면 <매트릭스> 때와 마찬가지로 전편 다시 보기가 유행할 거라는 점이다.

 

 

 

...

일단 여까지. 내일 드디어 3D 관람이다.

2010년 1월 5일 화요일

초성체가 싫다구?

1.

국문과 출신(잠시 뿐이었지만)에, 한때 문장을 문법에 맞춰 뜯어고치는 일을 업으로 삼던 전직 편집자(이 역시 잠깐...), +자칭 글쟁이로서 나는, 인터넷과 방송을 떠도는 형식 파괴의 신어(新語)들을 볼 때면, 묘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한 오만과 편견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은 편이긴 해도, 지식·정보의 보급과 전파에 있어 '표준화(standardization)'란 불가피한 일로 납득하는 쪽이다.

이를테면 '출판용 문장'과 '블로그, 다이어리용 문장'을 구분한다는 식이다. 출판의 경우 아무래도 웹에 비해 비용이 더 크므로 보다 선별된 컨텐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비용'의 문제는 언제나 중요하다) 또, 웹의 텍스트가 공시언어학의 과제라고 봤을 때, 출판은 보다 통시적이다. 후세에 남기는 현재의 유적과 같은 것이다. 비교·참조할 텍스트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 의미는 사라진다. 즉 유행을 타선 곤란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 웹툰]의 초신성 '랑또'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겼다.

 

"분명 1년만 지나도 촌스러울 거야- 흑흑. ㅠ.ㅠ" - <악당의 사연>, 후기 중에서

 

이에 비해 웹에서의 글쓰기는 한결 자유롭다. (역시 비용의 문제다.) 과연 몇 %의 독자들이 "드립"의 의미를 알고 함께 웃을 것인가. "꿀벅지"의 유행 또한, 2009년을 전후해 불어댄 '걸그룹'들의 쇠젓가락 같은 다리의 광풍이 지고 나면, 마니악한 취향의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who care?

 

 

2.

후(後)-근대는 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이 땅에 상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서는 하루키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인문학에선 푸코와 데리다가 유행했다. 정치경제에선 케인즈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 '가치의 해체, 더 많은 자유'로 요약되는 이러한 경향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세력을 확장해왔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애당초 그러한 것으로 시작되었던 웹의 경우이다. 웹은 후-근대의 신생아다. 따라서 웹에서는 오히려 후-근대적인 것이 '주류'가 되었다. 주류라 함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뜻이다. 인지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해서 '포스트모던'은 이곳에서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악플러'나 '낚시글'과 같이, 이들의 전위를 통해 두드러지는 웹의 중요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글쓰기다. 그들의 행동(action, 또는 reaction)은 원칙이나 논리보다는 충동과 감상을 동력으로 삼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엔 '목적'이 아예 없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건 과정과 그것을 즐기는 글쓴이 자신이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 따위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혹시 이 포스트를 읽고 있는 독자가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그것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으로 직접 확인해볼 수도 있다. '설명문'이랄지 '논설문' 등으로 분류할 만한 포스트, 즉 '목적이 분명한' 글타래가 과연 몇이나 될까.

 

 

3.

나는 여기서 후-근대의 이후를 본다.

 

목적이 불분명한 글쓰기란 바꿔말해, '자기목적적인 글쓰기'라 할 수도 있다. 창조자 자신만을 위한 피조물.

이를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이라 해도 상관없다. 자위 잘하는 사람이 섹스도 잘할 확률이 높다. (뭐든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편이 낫다.) 단순한 배설이나, 모욕을 목적으로 하는 악플이라도 괜찮다. 모욕은 그 내용과 대상이 합당하지 않을 경우 결국 그 칼끝을 발화자에게 겨눌 것이다. 무엇보다 욕을 들어쳐먹어야 할 것들은 욕을 좀 먹어주는 게 서로에게 이롭다. 욕도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짓인 것이다. 무플은 악플보다 외롭다.

 

마찬가지로 형식 파괴의 신조어 또한 아낌없이 남용되어야 한다. 형식이란 목적을 위해서나 필요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 혹은 자기목적적인 글이라면 형식에 얽매여야 할 이유가 더욱 없다. "ㅋㅋㅋ"도 좋고, "아 ㅅㅂ 꿈"도 좋다. 더 많은, 더 경박한 댓글을 마구 날리는 게 좋다. 중요한 건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더 많은 소통의 기회'이다.

 

인터넷 댓글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그림과 같은 광경을 한 번쯤은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다음 웹툰 <내츄럴 리로리드 : 시커먼 빛>(전상영作) 22화의 '베플'.

 

어떤 상황 아래서는 가장 조악한 표현이 가장 적확할 수 있다. 도대체 문자 텍스트로 어떻게 표현해야 "ㅋㅋㅋ"로 드러내는 정서, 즉 조금 방정맞고 꽤 실없이 웃으며 동시에 '당신이 왜그러는지 난 알지롱'하는 심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국어에 외국어를 무심코 섞어 씀으로써 국어를 오염(!)시키는 것도, 국어교육을 너무 잘 받은 한국인이 외국어엔 통 젬병이 되는 것도 모두 이와 관련된 현상들이다.

 

 

4.

이쯤에서, 어떤 초월적 선(善) 의지의 추종자들이나, 신념의 투사들은 '격조(格調)'란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형식의 파괴 속에서 번뜩이는 실마리를 제때 잡아채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낙오할 것이다. 이외수가 우연히 <하악하악>을 낸 게 아니다.

 

무엇보다 저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와의 생존게임에서 더 쉽게, 더 많이 살아남는 이유는 일단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는 똘추들은 그저 얼간이일 뿐이겠지만,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살면 결국 그 손해는 결국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인 것처럼, 발화(發話)되지 않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당신의 견해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당신의 생각보다 가치없지 않다.

 

 

 

 

 

지네 다리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Sacred land 망상.

1.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라자]를 보면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신성불가침의 영역)'라는 마법, 혹은 유사 마법적 현상이 등장한다. [드래곤라자]의 배경이 되는 대륙에는 여러 신격(神格)들이 공존하는데, 특정 지역에 어느 한 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다른 신들의 '법칙'을 무시하고 해당 신의 법칙만이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죽음의 신'의 세이크리드 랜드에서는 이미 죽은 자가 좀비로 되살아난다던가 하는 일이 벌어진다. 동 저자의 후속작 [퓨처워커]에서는 '순결의 신'에 의한 세이크리드 랜드가 나타나 동식물의 출산이 줄어드는 상황이 묘사되기도 했다.(실제 원인은 다른 데 있었지만 어쨌거나.)

 

문득 '세이크리드 랜드'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까닭은, 진정한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하자면 종말은, 혼돈보다는 질서의 과잉으로부터 온다. 엔트로피 증가의 끝은 열평형 즉, 완벽한 질서다.

 

가변적인 것, 불확실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혼돈이라면, 질서는 불변의 것, 절대 진리, 필연의 법칙과 인과율 같은 것들일 터이다. 유사이래 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진리 체계들은 대부분 이러한 질서를 추구, 혹은 유지하는 것을 선(善)으로 정의해왔고, 나 또한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여기서 파생된 여러 규범들에 대체로 수긍하고 순종하는 편이다. 인간의 선은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는 것이라야 한다.

 

2.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 한국인은 지나친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어찌 보면 '현대'라는 시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으로, 굳이 말머리를 '한국인'으로 제한한 것은 외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탓일 뿐 대강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질서에 사로잡혀 있다.

 

혹자는  온갖 패륜적 범죄들, 묻지마 살인, 등이 횡행하는 이 혼돈의 땅, 가치 상실의 시대에 무슨 개소리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하나의 절대 가치, 즉 '돈(money)'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이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좀 고상하게는 '경제'라고도 하더라마는.

드물지 않게 헤드라인에 오르곤 하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일면식 없는 타인을 난자하는 등의 흉악 범죄들은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그동안 기록되거나 전달되지 않았을 뿐, 인류사에 늘 있어온 일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은 극히 합리적으로 계산되는 우리 '행복'의 평균과 총량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적어도 '평균 이상'의 생계를 원하는데, 그 평가의 잣대가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의 힘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고졸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일은 없다. 해가 갈수록 서울대는 강남 출신 학생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각자가 그리는 '보통의 삶'을 쟁취하려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로또라도 맞지 않는 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서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뻔한 삶 위를 걷게 된다.

 

'암흑기'라고도 불리는 유럽의 중세 외에, 그 어디 어느 때에 이토록 강력한 질서가 자리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말인즉,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또 하나의 '암흑기'로 보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내 삶이 대체로 유쾌하지 않은 것에는, 거창하게도, 대략 이런 이유가 있다.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별일 없이 못 산다.

'잉여'의 삶을 산다.

 

한때 '애자' '병진' 등 어감은 기발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신조어들을 생산해내곤 했던 인터넷에서 요즘엔 '잉여'라는 표현들을 쓰는 모양이다. 초딩을 비롯한 키보드 워리어들이 사용하기엔 다소 고급 어휘라는 느낌도 있는데, 어쨌거나 고용없는 성장 시대의 핵심문제를 잘 짚은 듯하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닿고 닿지 않고를 떠나, 스스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다만 그 어떤 쓸모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커서 아직 우리 사회는 적당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

개인사적으론 처음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실감하는' 과학기술의 발명자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은 우리의 시대를, 흡사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한 시대를 우리가 '근대', 혹은 '산업혁명의 시대'라 부르듯이, 또 하나의 혁명의 시대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 현대를 일컬어 "영웅이 사라진 시대"라 했다. 허 모가 조조를 일러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했다는데, 본디 치세엔 영웅이 날 수 없는 법이다. 산업혁명이 낳은 자본주의의 구조가 얼핏 한계를 보인 지금이 바로 난세다. 난세가 영웅을 필요로 해서 나타난다기 보단, 난세는 영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작용한다. 빛과 물, 그리고 흙이 없다면 대부분의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것가 마찬가지로 영웅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영웅의 출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말인즉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것처럼, 재림한 그(the one)를 십자가에 다시 매달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우리 세계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정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

재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엔가 어디엔가 소용에 닿을 재능을 갖고 있다. 이는 공명정대한 신이 저 하늘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질량불변과 같은 자연 법칙에 의거한다.

 

(선생질로 먹고사는 한 친구가, 장래를 걱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소위 '불량학생'인 몇몇 제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장차 지구의 종말에 준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 아이들의 재능이 인류를 보전하는데 더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쓸모'란 항상 상황과 연동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 것인지에 대해선 100%의 확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0% 또한 존재할 수 없기에, 따라서 그런 아이들의 존재 가치는 유효하다. 그 개체수가 '지나치게' 증가하지만 않는다면.

물론 그 친구는 그다지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영웅의 그 대안이 궁금하다. 그는,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직 수긍하지 못한 누군가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결혼이 '지옥' 또는 '사랑의 무덤'이 되는 까닭

다음은 결혼을 둘러싼 2009년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양상에서 큰 줄기만을 추린 겁니다. 당연히 침소봉대하고 성급한 일반화도 있습니다.

 

1. 성비불균형 문제

 

현재 소위 '결혼적령기'란 건 갈수록 늦춰지는 추세로, 남성의 경우 대략 30~35세, 여성은 27~32세 정도이지요. 그런데 딱 이 세대가 대한민국에서 '성비불균형'이 극심해지기 시작한 세대란 것이 문젭니다.

 

세계적으로는 여권신장과 함께 '혼전순결'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은 덕분에 남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섹스를 만족시키기가 용이해졌습니다. 여성분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하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남성의 경우 섹스가 해결된다면 굳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널리 씨(?)를 퍼뜨리려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지요. 상대적으로 여성은 임신, 출산과 함께 경제적으로 무력해지기 쉬운 탓에 '성실한 남성'을 배우자로 두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런 괴리를 없애기 위해 여러 선진국들은 '싱글맘'을 위한 갖가지 복지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지요. 헐리웃 로맨스 영화에서([이프 온리] 정도?) 동거 또는 그에 준하는 관계를 이미 갖고 있는 여성이 남성으로부터의 '프로포즈'를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고전적인 결혼과 연애관이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에 대해 보수적인 전통적 가치관이 그 힘을 잃지 않은 까닭도 없진 않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결국 '성비불균형'입니다. (덧붙여, '혼전순결'로 상징되는 고전적 가치관 역시, 그것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으며 또 더 무너질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대의 흐름인 것입니다.)

 

자연상태에서 출산 당시 성비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아주 근소한 차이로 많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활동적인 수컷들이 영유아기에 사고로 죽어나가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것을 배려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데- 어쨌거나 결혼적령기, 즉 생식적령기 쯤이 되면 거의 정확히 1:1로 맞춰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 성비가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현재 결혼적령기 남녀의 출생 즈음입니다. 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짝궁' 없는 남학생 많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신문과 방송에 실리기 시작했지요. 심지어 학급 편성 시 아예 '남자반'을 만들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이 자라나 결혼이란 걸 해야 할 시점이 오니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비혼(非婚) 또는 동거' 추세를 역행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더러워서 결혼 못 해먹겠네. 내가 무슨 머슴노릇 하려고 결혼하는 거냐."라는 식의 자조를 늘어놓게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한국남자들 결혼하기 어렵습니다. 여성으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간택을 받아야 간신히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요즘 여성분들 좀 까다롭나요.

 

 

2. 경제위기 담론

 

그런데 여성분들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것만도 아닙니다. 이유는 경제위기 담론, 즉 높아진 눈높이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가처분 소득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높아진 것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된 탓이 크며, '경제위기'란 말에 굳이 '담론'을 덧붙인 것은 이 위기감이 어느 정도는 허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는 까닭입니다.)

 

시쳇말로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하지요. 모두 우성형질의 배우자를 바라는 암수의 본능을 반영한 것입니다. 남성이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문제-'임신과 출산' 때문에라도 여성은 상대적으로 안정지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보시면 적당하겠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능력이란 곧 경제력을 뜻하는데, 이 경제력이란 것이 쉽게 갖춰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입니다. 현대 한국 경제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남성들을 '모든 걸 다 가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열패자(?)들로 갈라놓는 구조지요. 다시 말해 여성들이 취할 만한 '쓸 만한 남성'의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여성분들의 '쓸 만한 남성'관은 대략 이렇습니다. "난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냐. 집에 재산은 없어도 좋으니, 그냥 연봉 3000 쯤 되는 '조금' 안정적인 직장에, 남 보여주기 쪽팔리지 않는 정도의 외모였으면 좋겠어." 성실하고 자상한 성격도 갖췄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 남성의 몇 %가 이 '쓸 만한 남성'의 커트라인 안에 들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 소수의 '쓸 만한 남성'을 쟁탈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살인적인 다이어트 스케쥴을 견뎌내고, 알뜰하게 모은 저축을 깨 눈과 코, 피부 등을 '살짝' 업그레이드 합니다. 또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유행에 너무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싼티 나지 않고 세련되면서도 발랄한" 패션 센스를 발휘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겠지요. 이토록 어렵게 자신의 가치를 높였는데 아무 남자한테나 자신을 내줄 수 있나요. 정신줄 놓을 만큼 열렬한 사랑이 아닐 바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조건'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연애를 한두 번 해보고 나면, 아뿔사, 어느새 '내일모레 서른'입니다.

 

 

3. 트로피 와이프

 

비극(?)은 여기서 또 다시 시작됩니다.

미국 속어 중에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란 게 있습니다. "(부자가 얻은) 젊은 미녀 아내"를 뜻하지요. 우리에겐 어쩌면 '띠동갑 마누라'의 경우가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에는 노력과 재능, 행운 등 여러가지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공한 미혼 남성'이 되기 위해선 당연히 '연애질'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까요. 연공서열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남성이 '이만하면 그럴듯한 결혼식을 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겠다' 싶을 만큼 성공하고 나면,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을 넘어서 있기 쉽습니다. 어쩌면 그 성공의 과정에는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며 떠나간 가슴 아픈 인연도 하나둘쯤 있었을 수 있겠지요. '섹스'를 만족시키는 데 특별히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는 이들이 문득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입니다. 바로 '2세'와 바로 '트로피 와이프'.

'2세'야 상식 차원에서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이므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트로피 와이프'란?

 

흔히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에 소홀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자신에 국한된 얘기라면 사실은 사실입니다만, "옆에 어떤 여자를 끼고 다니느냐?"의 문제라면 얘기가 좀 다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했지요? 예, 아름다운 여친, 애인, 와이프는 성공한 남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즉 '트로피(trophy)'지요. 이들에게 성공이란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한 증거물로써 아름다운 배우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례로 '띠동갑 마누라'에 대한 남성 친구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런 도둑놈!" 그리고 바로 다음에 바로 따라 나오는 말은, "오~ 자식, '능력' 있네."

 

 

4. 결혼이 피곤해지는 이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요는 결혼에 임하는 남녀의 서로 다른 생각이 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상황과 맞물려 '행복하지 않은 결혼'의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a. 성공한 소수 남성

- 선택의 폭은 과거에 비해 더 넓어졌습니다. 온 세상 여성이 그들을 원합니다. 고르고 골라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합니다. '도둑놈'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까지만 해도 '하자'가 없었던 이들의 부인은 결혼 후 '얼떨결에 잃어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남편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남성 또한 어려웠던 날들을 함께하지 않은-즉 조강지처가 아닌- 부인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남성의 성공에 위기라도 닥치는 날이면, 곧바로 지옥문이 열립니다.

 

b. 평범한 다수 남성

- 결혼 자체가 어렵습니다. 야동 따위에 탐닉하다 어느날 애인이라도 생기면 처음엔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하지만 곧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항상 봉사와 희생을 요구받는다는 피해망상과, 어떻게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다 결혼 후 덜컥 형편이라도 나아지면 성공한 친구들의 트로피와이프가 부러워집니다. "애들 때문에"라도 마누랄 버릴 순 없으니 탱글탱글한 애인이나 하나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c. 어린 미모의 여성

- 세상은 이들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운이 좋다면(?)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결혼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박제가 된 자신의 신세를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친구들이 어느덧 하나둘 열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랑에 빠져듭니다. 덜컥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채 늙어가는 건 아닌가 싶어집니다. '더 젊고 예쁜' 여자들에 남편이 혹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세월을 이겨보려 안간힘을 써봅니다만 언젠간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충분히 좋지(?) 않다면 고르고 고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d 항목의 여성들과 동지가 됩니다.

 

d. 적령기(라고 쓰고 '고령'이라 읽는다)의 평범한 여성

- 주말에 할 일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죄다 애엄마. 서른두엇 전까지만 해도 "결혼 언제 할 거니?" 묻던 가족, 친지들이 이젠 슬슬 눈치만 봅니다. 찝적대는 놈들은 더러 있었지만 하나 같이 영 밍숭맹숭 합니다. 스스로를 '속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건을 따지고 싶진 않지만 가슴 속에 '불'이 통 붙질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적당한' 남자와 '적당히' 사귀다 '적당히' 결혼합니다. 결혼-임신-출산까지 순식간에 세월이 지나갑니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낳은 자식은 하난데 기르는 건 둘입니다. 한때 '남편'으로 불렸던 '큰놈'은 단념하고 '작은녀석' 기르는 재미에 삽니다. 다행히 녀석은 아직 자신에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

 

연상의 남성과 연하의 여성 커플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전통적 가치관에 의한 고정'관념' 탓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어떤 커플의 결혼 성사 가능성이 남성의 경제적 자립도에 의존하는 구조가 반영된 것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곧 계급, 서열의 '정당한' 지표가 되며, 이는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 원칙(?)에 따라 결혼한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에게 구박 받는 경제력 잃은 남편은 이러한 관계의 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결혼은 여성의 성과 남성의 능력을 교환하는 거래였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흡족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각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지 잘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