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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3일 목요일

젊은 사자들

원래 숫사자들은 나와바리 안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면 잉여가 되고 만다.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이 가치 있는 수컷의 운명이라고 하겠다.

 

유시민은 젊은 숫사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것 같다. 원래 수컷들이란, 말 많고 똑똑한 동료를 증오한다. 특히 그 수컷이 그닥 대단한 희생을 치른 바 없음에도 번지르한 외모 덕에 예상 밖의 지지를 얻고 있다면.

 

수컷들이 지지할 수 있는 수컷이란 오직 두 종류 뿐이다. 나를 지배하는 권력자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동지로 납득할 수 있는 자. 유시민은 젊은 수컷들을 승복시키지도, 영도하지도 못했다. 그의 이미지는 마초보다는 페미니스트, 터프가이 보다는 인텔리다. 어느쪽이나 수컷들은 지지하기 보단 혐오하는 이미지다...

 

과연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2010년 6월 2일 수요일

낙관주의

성선설을 믿는다는 건 본질적으로 환경결정론자라는 뜻이다. 환경결정론자들은 구조주의를 통해 세계를 해석했고, 지옥은 필연이 아니라는 희망을 생산해냈다. 이것은 하나의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어느쪽인지 대략 가늠이 잡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선의로 세계를 해석한다)-고 믿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노무현의 자결이 무위로 돌아간다면, 이 나라에서 정치운동을 통해 뭔가를 시도하기는 틀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뭐, 이미 그렇진 않은 것 같지만.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전야

1.

최초 나의 참여 목적은, 진짜를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시선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잊은 채,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정말 이기고 싶다.

 

 

2.

대중심리 조작 전문가들의 기술이 필요한 시점에 그들이 일부라도 나선 모양이다. 다행이다. 정치는 많은 좋은 상품들이 적절한 마케팅의 기회를 얻지 못해 사라지고 마는 시장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 독려한 덕분에 아마도, 전국 곳곳에서 좋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꽤나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기회라고 생각하고 덤벼든 파리떼도 제법 있을 것이다마는 어쩔 수가 없다. 옥석을 모두 가려내기엔 상황이 급박하다.

 

 

3.

한나라당의 패배 만큼이나 노무현의 승리도 필요하다. 이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르다. 한나라당은 노무현의 죽음을 주도하거나 적어도 관망했다. 일이 일이니 만큼,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그 상황을 방조하거나 관망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얼마간 애꿎은 피해자가 되더라도 불평해선 곤란하다.

 

저들은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 이 죄를 보는 관점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을 보는 중세 유럽인의 시각과 닮았다. 600만을 잡아 죽일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 죄를 지은 자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저들은 다시 나기 어려운 강한 영혼을 끝내 꺾었다. 벌을 받아야 한다. 혹시 이 징죄의 과정에 휘말려 다소간의 피해를 입는 이들도 감수해야 한다. 모두가 죄인이다.(신해철 씨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나. 당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직도 조용히 있으면 안 되지.) 우리에겐 시끄럽게 떠들 권리가 있다.

 

 

4.

노무현의 승리는, 사람에겐 언제나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파괴는 언제나 또다른 창조의 시작이지만, 그 파괴와 창조 사이의 시간차는 작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희망은 창조의 동력이 된다.

내겐 이번 선거가 그를 해친 자들을 벌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계획들을 좀더 진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다. 그는 계획을 길게 잡는 사람이었다. 많은 계획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상당 부분 복원해내고 또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내 힘은 오직 1/n 뿐이다. 이걸 잊으면 조급해지고 오만해진다. 판단을 그르친다. 판단력을 잃은 시선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가 헛죽었을 리 없다.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판도라의 상자

1.

'판도라의 상자'라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판도라라는 처자가 있었는데, 신이 그녀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 줬단다. 절대로, 절대로 열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상자를 주면서 열지 말라니 무슨 심보였는지 짐작은 되지 않지만, 하지 말란 짓은 원래 더 하고 싶은 법. 그녀는 결국 이 상자를 열어젖혔고, 상자 안에서는 질병과 고통, 증오, 분노와 같은 온갖 못된 것들이 잔뜩 튀어나와 인간 세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다시 닫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신의 명령을 어긴데다 대형사고까지 쳐버렸으니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에게 상자 속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단다. 기왕 배린 몸, 판도라가 상자를 다시 열어보니 그때 나온 게 바로 '희망'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악의 근원에 대한 신화로, 흔히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 저주받은 상자에 과연 좋은 게 하나라도 들어 있었을까. '희망 고문'이라는 신조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저주로써 작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2.

인간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의견이 판이한 것 만큼이나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러하다. 나는 오랜 생각 끝에 노무현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인간형에 닿아 있다고 판단했는데, 말인즉 내가 그를 '군자(君子)'의 한 전범으로 삼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끝없이 회의하던 사람으로, 회의를 통해 학습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며, 그의 두드러진 용기는 폭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인간애에서 비롯한 것이었기에 절제가 있었다.

 

운나쁜 타인을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 틀린 것에 성낼 줄 아는 수오지심, 자신의 행운에 교만해지지 않는 사양지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남을 옳게 구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옛 성현들이 군자의 조건으로 세운 네 덕(인,의,예,지)을 그는 모두 갖추었다. 군자란, 임금된 자다.

 

 

3.

공화주의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보다 유별나게 뛰어날 순 없다는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에 선악을 묻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 이익의 평균값이 떠도는 어딘가에서 최선 아닌 차선이나마 건져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나는 순혈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라기 보단, 본질적으로 왕당파에 가깝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래도 그나마 그것이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박지만이나 전재국, 전재용이 통치하는 '대한왕국'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덕분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행운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였다. 자본이 곧 권력인 이 시대를 고대 로마 시대에 비유하자면 저 자본가와 현대판 귀족들은 집정관과 원로원이며, 평민에 의해 선출되는 권력은 호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시기에 마침 좋은 호민관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흔치 않다.

언제나 그래왔듯 호민관은 집정관에 비해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떠났다. 왠일인지 어떤 평민들은 도무지, 자신이 평민임을 자각하질 못하는 까닭이다.

 

 

4.

그래서 어쩌면, 노무현의 가장 큰 죄악은 평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는 어쩌면 확률 범위 안의 작은 파동이었을 뿐인데 어떤 전조로 오독된 것이었다면.

 

하여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나는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그의 이름 아래 희망을 건다. 조선 반도에 역사란 것이 시작된 반 만년 이래 처음 스스로 곡기를 끊은 임금이 이곳을 떠난지 단 1년 만에 벌써 그날의 황망함을 다 잊었다고 한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