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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7일 목요일

안희정, '수도권(서울) VS 지방' 프레임 가동 확인.

안희정, '수도권(서울) vs 지방' 프레임 가동 확인.

(2010년 5월 27일. 김미화 인터뷰로부터)

 

1.

차기 대선에서 진보가 승리하는 전략의 기초가 될 것이다.

노무현이 놓아두고 간 "진보의 미래"라는 난제의 해법으로, 그의 동지들이 들고 나온 이 전략이 반갑다.

 

온 곳과 갈 곳이 다른 수많은 길들이 서로 만나 교차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완전한 원이 이데아에 불과한 것처럼, 완전한 평행선 또한 실재할 수는 없다.

이런 게 희망의 근거다.

 

 

2.

이번 선거는 "근대화-산업화 세대 vs 민주화 세대(386)"의 프레임으로 치러야 승산이 있다.

 

 

"저희는 산업화 세대, 부모님 세대가 21세기 대한민국을 향해서 준비한 세대입니다. 그 부모님 세대들이 못다 이뤘던 선진국의 꿈, 좋은 나라의 꿈을 저희 세대가 이제 이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이 미래를 향한 도전, 저 안희정의 도전입니다. 키워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적은 되도록 적게, 아군은 많게 전선을 긋는 쪽이 당연히 승산이 높다. 세대별 지지율 격차를 유심히 봐야 한다. 산업화에 뒤따른 고령화는 근대화 세대의 위기감을 낳아 그들을 결집시켰다. 따라서 그들을 다독이는 동시에, 386의 연대를 일으킬 수 있는 레토릭이 효과적인 것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좋게 말하면 좋게 생각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 까닭이다.

 

유시민의 전략인 '386의 연대' 역시 그 사이즈 만큼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야 제법 그럴듯하게 구축되었다. 김진표가 저 승산 없는 싸움에 응해준 것을 보면, 그 또한 참 대인배인 모양이다. (혹은 그냥 얼간이던지.) 경선이 흥행에 실패하면 본선은 볼 것도 없는 것이 요즘 선거다. 장기적으로 봐서, '팬'과 '안티'의 규모는 항상 정비례한다. (따라서 노빠질 또한 안티 형성을 우려해 자제할 필요가 없다.)

 

중앙에서 유시민이, 지방에서 안희정이 짜들어 가는 이 거대한 프레임을 보라. 나는 그들 사이에 모종의 결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그러나 저들 역시 최선의 전략을 갖고 이번 전쟁에 임하고 있으니 주시해야 한다. 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동해야 한다. 만약 이번 지방선거에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겨우 승리한다면, 다음 대선이 정상적으로 치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저들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존재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런 정치가 우리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6월 2일 꼭 투표하십시오.

국민참여당 당원으로서, 참여당에 찍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굳이 노빠, 유빠들이 싫으시다면, 1번 말고 아무거나 일단 찍어만 주십시오.

파란색 1번은, 지금은 곤란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2010년 5월 26일 수요일

이창동 칸 각본상 수상에 부쳐

우리에게도 '월드 클래스'의 인물이 제법 있는데, 알아보는 이는 적다.

 

세계를 걷는 이들의 보폭에 맞추긴 어려울지언정, 발목을 붙들진 말자.

 

세계와 함께 숨쉬고 세계와 함께 보는 이런 '큰사람'들을, 샘내어 따돌리고 끝내 쓰러뜨리고 마는 자들이 있다. 배금주의의 시대를 맞아 득세한 소인배들이다.

(<운명이다>가 자서전이라는 건 그저 정치적인 레토릭이다. <운명이다>는 위인전이다. 그의 마지막 선택 때문에 자서전의 형식을 빌어 입었을 뿐.)

 

사람 그릇의 크기는, 피와 아의 경계를 얼만큼한 범위에 설정하느냐로 알아볼 수 있다. 누구는 대기권을 울타리 삼아 대륙과 대륙 사이를 유유히 넘나드는데, 소인배들은 고작 손톱 만한 땅덩어리에 철조망을 치고 담벼락을 높이는 일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고 싶을까- 하긴, 그들로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의 전부니까.

 

 

2010년 5월 25일 화요일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하는 법. 안희정.

처음으로 안희정의 연설을 보았다. 그는 먼 지역 사람인데다, 감옥을 드나들고, 또 그림자 안에 있던 사람이므로, 그의 연설을 자연스레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게 당연하다.

 

그는, 그가 딴지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슬픈 이유로 2인자의 노선을 택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은 기독교에 비유하자면 '십자가의 보혈'이 된다.

작년 5월 23일 아침까지만 해도 안희정에겐 미래가 없었다. 노무현이 몸을 던진 이유 중에는, 그의 앞길을 열어주려 한 의도가 분명히 포함된다.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노무현은 안희정의 책(<담금질>)이라도 팔아주려다 한번 크게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도지사 출마 연설에서 안희정은 "내가 노무현을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이 또한 노무현이 인정한 바가 영상기록 증거로 남아 있다. 내가 참여정부의 노선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그들은 기록하고 또 공개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그래서 중요하다. 쥐가 쏠기 전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  

 

대놓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질 하는 것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건 (정치) 목숨을 건 도박과 같다. 진실로 한 점 숨겨둔 감춰진 일이 없는 사람만이 이 전략을 통해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이 한 점 부끄럽게 살기 쉬운가. 따라서 부끄러울 일 없이 살아온 삶이란, 일찍부터 삶을 형이상학적 가치에 따라 계획해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희정은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조숙한 학생이었다. 비록 그 의기는 크게 한번 좌절되기도 한 모양이지만.

 

그 좌절을 통해 그는 1인자 대신 2인자의 길을 택했다. 충청도 사람 답다. 경상도에 의리가, 전라도에 기백이 있다면, 충청도에는 끈기가 있다. (경상도에는 87년 대선까지만 해도, "이번에는 김영삼이 하고, 다음엔 김대중을 밀어주자"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리고 80년 광주 이전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전라도에서도 김대중과 박빙을 이뤘다.)

 

이에 비해 은근하고 끈질긴 충청도인의 기질은 김종필이나 이회창과 같은 '최고의 2인자'를 여럿 탄생시켰다. 최고의 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1인자의 자질을 가진 이가 2인자의 위치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1인자의 자질을 가진 이라 할지라도, 대세가 따르지 않는데 무리하게 1인자의 위치를 탐내게 되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어쨌거나 결국 1인자의 자리를 거머쥐지 못한 이들 덕분에, 충청도는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안희정은 연설을 통해 지역감정을 대놓고 도발했다. 그는 당당하다. 그는 김대중과 노무현, 즉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대표선수를 합당한 댓가를 치르고 계승했다.

그는 참여정부 5년 내내 실업자 신세였고, 노무현 사후엔 민주당 잔류를 택했다. 그에게 민주당 잔류가 위험했던 까닭은, 노무현 살해의 종범들과 동침하는 것이 되므로 '골수노빠'로 불리는 분들의 적극적 비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극성맞은 분들의 타겟이 되면, 정치인생이 피곤해진다.

그는 이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들을 끝내 견뎌냈다. 그리고 이제 '지역 감정 해소'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대중과 노무현 공동의 이상'을 계승하기로 선언함로써 그는 이 골수노빠를 납득시켰다.

 

우리나라 정치엔 2인자가 성공적으로 1인자를 계승한 전례가 없다. 언제나 그들은 1인자에 대한 부정 위에 자신의 기초를 쌓으려다 무너졌다.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가 지금까지처럼 현 정부의 폭주를 관망하며 2인자의 역할을 소홀히 하다간 다른 2인자들의 전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2012년에는 안희정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몸조심하셔야겠다. 알아볼 줄 아는 자가 저들에 있다면 지금부터 싹을 잘라버리려 할 것이다. 그를 지키려면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봐야 한다.

 

 

키워드 -

 

2인자 노선
2인자를 스스로 선택하고, 또 경험해본 사람

충청도 사람=말이 느리다.(어눌하다)
안희정, "충청도의 새 역사" 싸이즈 대박.

지역통합("김대중 노무현의 꿈 이어나가고 싶다는 것이 꿈")
2인자가 1인자를 승계하는 방법.
'진성노빠'들에게 민주당 잔류의 명분 명백히 설명.

자기 장점 대놓고 말하기. 당당함. 부끄러워 할 일이 없음.

"안희정이 누구야?"
정보 전파의 기회. = 컨텐츠가 있다면 입소문을 탄다.

서울 집값이 충청 발전(세종시)과 직결되는 이유 명백히 설명.
"봉급생활자의 집세(및 대출이자) 부담"
세종시는 이미 합의한 바가 있는 법안. ('절대 명분')

최초의 충청 출신 대통령 가능성
최초는 언제나 환영받는다.

말씨가 바뀌지 않은 사람. 말씨의 중요성.(무의식적인 인상비평을 좌우한다)

 

"386의 마지막 과제와 임무"
중앙권력에 대항하는 분권의 시대를 열어야


"전국 골고루 잘사는 대한민국"
골고루 잘사는=평등 강조=좌파적 시각을 자연스럽게 침투시킨다

 

세대론
근대화 세대 / 민주화 세대, 그리고 자유분방한 20대-상실의 세대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전야

1.

최초 나의 참여 목적은, 진짜를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시선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잊은 채,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정말 이기고 싶다.

 

 

2.

대중심리 조작 전문가들의 기술이 필요한 시점에 그들이 일부라도 나선 모양이다. 다행이다. 정치는 많은 좋은 상품들이 적절한 마케팅의 기회를 얻지 못해 사라지고 마는 시장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 독려한 덕분에 아마도, 전국 곳곳에서 좋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꽤나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기회라고 생각하고 덤벼든 파리떼도 제법 있을 것이다마는 어쩔 수가 없다. 옥석을 모두 가려내기엔 상황이 급박하다.

 

 

3.

한나라당의 패배 만큼이나 노무현의 승리도 필요하다. 이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르다. 한나라당은 노무현의 죽음을 주도하거나 적어도 관망했다. 일이 일이니 만큼,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그 상황을 방조하거나 관망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얼마간 애꿎은 피해자가 되더라도 불평해선 곤란하다.

 

저들은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 이 죄를 보는 관점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을 보는 중세 유럽인의 시각과 닮았다. 600만을 잡아 죽일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 죄를 지은 자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저들은 다시 나기 어려운 강한 영혼을 끝내 꺾었다. 벌을 받아야 한다. 혹시 이 징죄의 과정에 휘말려 다소간의 피해를 입는 이들도 감수해야 한다. 모두가 죄인이다.(신해철 씨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나. 당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직도 조용히 있으면 안 되지.) 우리에겐 시끄럽게 떠들 권리가 있다.

 

 

4.

노무현의 승리는, 사람에겐 언제나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파괴는 언제나 또다른 창조의 시작이지만, 그 파괴와 창조 사이의 시간차는 작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희망은 창조의 동력이 된다.

내겐 이번 선거가 그를 해친 자들을 벌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계획들을 좀더 진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다. 그는 계획을 길게 잡는 사람이었다. 많은 계획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상당 부분 복원해내고 또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내 힘은 오직 1/n 뿐이다. 이걸 잊으면 조급해지고 오만해진다. 판단을 그르친다. 판단력을 잃은 시선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가 헛죽었을 리 없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강물처럼

2009년 말 즈음, 그러니까 2009년 중순에 닥친 비극에 따른 격정이 어느정도 가신 어느 날,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이 '시민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당연하게도, 그날의 슬픔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고, 따라서 그 슬픔은, 비록 격정은 담뿍 담겼으되 때로 얼마간 조악한 형태로 배출되기도 했다. 그릴 줄 아는 자는 그리고 노래할 줄 아는 자는 노래한 것인데, 허탈함과, 때로 분노가 너무 컸던 탓으로, 가신 이에 대한 사랑은 다소 과장되기도 하고, 가끔은 나이브하게 드러나기도 한 것이다.

 

이를 못내 아쉬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강물처럼 가사

 

(후렴구를 따라 불러보려다가 당황했다. 주책맞게도 목이 메어 제대로 불러지지가 않는 것이다. 내가 미친 노빠, 노무현 광신도인 까닭일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가사를 쓸 수 있는 이가 가사를 쓰고, 노래할 수 있는 이들이 노래했다. 이를 모둠 할 줄 아는 이가 모두어, 영상을 편집할 줄 아는 이가 마침내 만들어냈다.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듣고, 퍼나를 수 있는 이들이 퍼나를 것이다.

 

가사와 멜로디를 외워둬야겠다. 오는 5월 23일에는 여럿이 함께 노래하고 싶을 일이 많을 것이다. 대신 표현해주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6월 2일 밤 그들과 함께 웃을 것이다.

 

 

사족

2010년 3월 2일 화요일

몰입!

 

숨은 잠재력을 일깨우고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지침서
이 책의 저자 황농문 교수는 30년 가까이 공학연구에 몸담아 온 공학자며 ‘하전된 나노 입자 이론’으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한 과학자다. 몰입이 잠재된 우리의 두뇌 능력을 일깨워 능력을 극대화하고 삶의 만족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왜 우리가 몰입적 사고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몰입으로 천재성을 끄집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몰입의 개념과 필요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정의하고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몰입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준다. ‘생각’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몰입은 확실히 눈에 띄는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불안과 우울을 고질병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몰입적 사고’를 가르쳐주는 충실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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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만난 행복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미치도록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SBS 스페셜 <몰입>을 준비하면서 '몰입의 고수' 황농문 교수를 만나, '몰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하고, 마침내는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사흘간의 짧은 몰입으로 스스로 뉴턴의 미분 문제를 풀어내고 활짝 웃는 중학생들의 싱그러운 얼굴도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보석 같은 삶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가 쓰레기통에 던져 놓았던 먼지 낀 시간들을 순도 100%의 황금빛 삶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 이승주(SBS스페셜 <몰입> 기획 부장)

- YES24 도서 정보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책 자체는 그렇게까지 '몰입'할 만하지 않다. 하지만 운좋게도 저자인 황농문 교수의 강연을 직접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강단에 더 익숙하신 탓인지, 책보다 강연 쪽이 열 배는 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얼핏 '광기어린-'으로 묘사하고플 만큼의 열정적인 강연은 당시 컨퍼런스에 참여한 청중 대부분을 완전히 몰입시켰다. 책은 차라리 그런 강연의 학술적 정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을 '한 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몰입은 지적 존재인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2) 몰입은 인위적으로 유도될 수 있다.

 

자, 이제 '몰입'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책을 보시라.

 

2010년 1월 1일 금요일

2010년, 새해 '勇氣' 많이 받으세요.

 

 

다음 웹툰 <세브리깡>의 작가 강도하(대표작:<위대한 캣츠비>)가 2009년 마지막 연재분 말미에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남겼다.

 

 

 

 

버둥대는 (듯한) 고양이에 억지로 입을 맞추려 한 것은

특별히 '고양이'에게 부탁해야할 무엇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로,


 

 

2010년은, 용기가 많이 필요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노무현 종교화 프로젝트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에, '교주(敎主)'라는 직업이 앞으로 전망이 있겠다 싶어 그것이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성공하는 교주의 7가지 습관>이란 게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주제를 정해놓고 꽤 진지하게 탐구했더랬다. 별 성과도 없었고 결국 7가지를 채우지도 못했지만, 과거의 몇몇 성공한 교조(敎祖)들의 사례들을 돌아보며 나는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교조는 생전에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였다. 예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붓다는 왕좌를 버리고 광야를 떠돌았다. 공자는 한 번도 뜻을 펴지 못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다. 젊어 죽건 늙어 죽건 제대로 된 교조라면 육신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차야 한다.

 

둘째는 "교조는 저작을 남기지 않는다"였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플라톤이 썼고, '복음'은 열 두 제자들이 남겼으며, '논어' 역시 안회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조는 다만 입으로 떠들 뿐, 받아 적어 후세에 남기는 일은 제자들의 몫인 것이다. 심지어 '라엘리안'들조차 끌로드 보리용이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아 적은(적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밖에 "교조에겐 말씀을 기록할 제자(들)이 있다"라든가, "제자들 중엔 꼭 말씀을 왜곡하는 얼간이가 섞여 있다"와 같은 자질구레한 공통점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점차 '갖다붙이기'란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어쩄거나 최근 내가 주목한 것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삶이 위의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을만치 드라마틱했으며, 그토록 염원했던 회고록조차 제 손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는 녹음된 목소리만으로도 눈물을 질질 짜게 된 수많은 제자들을 만들었고, 개중엔 그의 본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이들도 틀림없이 섞여 있을 것이다. 앞으로 50년쯤의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이름을 내건 사상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을 제외한 어떠한 것의 신성성(神聖性)도 부정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 위에 인간을 벗어난 초월성를 덧씌우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그 이름은 이런 하찮은 노력 없이도 역사에 길이 빛날 테지만.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댓글 읽는 대통령

노무현이 특별했던 점 또 한 가지는, 그가 인터넷 댓글을 읽는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과 글 곳곳에서 그가 상시로 인터넷 댓글을 읽고, 드물게는 쓰기도 했던 것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익명성을 보장해줘야 더 많은 '생생한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은 분명한데, "악플러" 문제나 "언플" 문제의 발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사.사.세"와 "민주주의2.0" 등을 통해 모종의 실험을 진행 중이었으나,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났다. 관찰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도 못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20초 정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온다. 아직도.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촛불집회로 시민의 의사를 알릴만큼 알렸으며, 결과는 촛불집회에 대한 면역력과 물리적인 억제능력만 키워줬다.

 

앞으로 집회와 가투에서는 대학생과 청년백수 100만이 주력이 되어야 한다. 더이상 '촛불소녀'들 등 뒤에 숨어 있을 면목도 없고, 투쟁의 세대 386은 왕년에 할 만치 했다. 더욱이 이들은 유사시 나라살림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장 서야 하고 앞장 설 수 있는 것은 아직 잃을 거라곤 '미래'밖에 없는 학생과 88만원 세대 백수들 뿐이다.

 

대학생 및 백수 제위께 고한다. 당신들 이대로 졸업하면 '88만원 세대'말곤 미래가 없다. 갓 졸업한 선배들 보면 모르는가? '지나간 좋았던 시절'에야 대학교만 들어가면 학창시절을 내내 탱자탱자 보내던 짱돌 쥐고 보내던 최소한 밥벌이는 했다. 허나 지금도 그러한가? MB 따라 운하 삽질하러 가던가 88만원짜리 비정규직 되는 길 뿐이다. 도대체 누가 나서서 나라를 바꿔주리라 기다리고 있는가?

촛불시위 귀칞다. 그냥 혁명하자.

종일 광장에 앉아 있다 추워서 그냥 들어왔다. 으슬으슬하다.

우리나라 시민 정말 문화적이다. 세계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울 만하다.

그런데 시발, 그 뿐이다.

 

나도 평화 참 좋아한다. 비폭력 운동? 내 정치성향은 간디 바로 옆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 이건 아니다.

 

먼저 집회 준비에 여러모로 수고 많으셨던 것으로 보이는 노조 여러분들. 정말 애 많이 쓰셨다.

그런데 집회의 아젠다가 너무 분산된다. 군중을 움직이려면 선언문은 세 줄이면 된다.

비극적 사례로 이것저것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대체 우리가 MB정부에게 원하는 게 뭔가?

민주주의를 살려내라고?

아, 뒈진 걸 어떻게 살려. 이미 뒈졌으면 어떻게 살리냐고.

 

지금 우리는 '살인의 현장'을 보고 있는 거다.

지금 어느 강도 새.끼가 선량한 시민을 칼로 찌르고 금품을 강탈하려고 하는데,

그 살인자에게 죽빵을 날리고 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피해자가 칼 맞아 뒈진 다음 강도가 유유히 사라지면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거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뭔가?

 

 

나는 구체적으로, "MB의 즉각적인 하야와 국회의 해산" 및 "임시국회를 대신할 가칭 '국가비상사태대책 국민회의'의 결성"을 요구한다. 여기서 사법부, 조중동, 니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일 좀 수습되고 나면 새로운 국회와 새로운 소비주권으로 박살을 내줄 테니.

비상국민회의의 주관으로 먼저 대선을 치르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 개헌을 국민투표에 붙여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 7공화국을 출범시키는 것이다.

 

그래. 바로 혁명이다.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백성에 의한 혁명. '시민 혁명'!

 

요즘 세상에 무슨 혁명질이냐고 코웃음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나라 역사든 돌이켜 보라. 혁명 없이 수립된 민주 정부가 있었는가? 요즘 세상?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경제가 불안하다고? 그럼 MB한테 3년 고대로 맡겨두면 좋아질 것 같나? 간단히 말해 가능한 한 이른 시간 내에 MB와 그의 무리들이 경제에서 손 떼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에 이로운 거다. 이거 동의 못하면 촛불이 개뻘짓이란 얘기가 옳은 거고.

 

북한 땜시 안보가 불안하다고? 미국이 어젠가 그젠가 불가침 선언에 준하는 외교 제스쳐를 북한에 날렸다. 미국이 핵문제로 북 먼저 안 때리면 북이 남 도발할 이유가 없다. 남한에 혁명이 일어나건 말건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단 소리다. 최소한의 위협은 혁명이 나거나 말거나 국방에 충실할 국군이 알아서 막아준다. 나도 그러려고 군대 다녀왔고.

 

행정 공백? 지난 노통 영결식 기간 동안 실감 못했는가? 사실상 대한민국이 그 일주일동안 올스톱! 했다. 심지어 북핵조차 쌩깠다. 그래도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갑갑하도록 둔해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관료주의란 거,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혁명쯤 일어난다고 바로 휘청대지 않는다.

타겟-MB, 이 십새!-이 명확하니 공무원은 맡은 바 일상에만 충실하면 된다. 넉넉잡아 일주일이면 끝난다.

 

지금 모든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교수들이 줄줄이 시국선언을 한다. 이 인간들 정작 필요할 땐 뭐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당장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인간들 뿐이다. 이 인간들마저 나서면 정부는 끝장난 거다. 4.19 때도 그랬고 6.10 때도 그랬다. 이들은 각 시민단체와 국회 대표단과 함께 비상대책 국민회의를 결성해 국회 권한을 대행할 능력이 있다. 이들은 정식으로 제7공화국의 국회, 즉 진정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할 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고, 제7공화국 헌법을 준비할 대통령 선거를 주관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민이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는 것 뿐이다.

구체적인 행동은 청와대에 들어가 MB를 체포해 인천공항으로 압송해 강제 출국시키는 거다.

이 가운데 어중간한 '타협'의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구글의 블로그 사업 진출과 네트워크의 힘, 그리고 노무현

구글이 textcube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 포탈계의 쌍벽-네이버와 다음은 진작부터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고, 싸이월드도 여전히 반응은 시원치 않을지언정, '싸이미니홈피'의 표현력에 한계를 느끼고 이탈하는 유저들을 붙잡기 위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지 꽤 되었다. 삼마을 주인장이 사고를 당한 이후 나는 티스토리를 대체할 파워블로그를 기다려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유튜브 실명 인증 거부 사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위한 익명성 보장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는 구글이 한국 블로그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나는 구글의 심플함을 사랑한다. 광고도 뉴스도 없는 단순한 화면. 전 세계 어느곳, 아무리 인터넷이 느린 곳, 즉 IT인프라가 열악한 곳에서도 구글의 홈페이지는 가장 빨리 로딩될 수 있을 것이다.

광고와 뉴스가 없다는 사실은 또한 정보에 대한 선택권이 전적으로 유저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세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네트워크로 이해하려는 세력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오늘날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하다. 위대한 영도자나 위대한 수령 동지가 없어도 우리는 네트워크의 시너지 작용을 통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노무현이 말했듯 강은 굽어 흘러도 결국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더욱 가엾은 386 선배들.

세계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해가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 가정하면, 저항세력은 결코 기득권을 이겨낼 수 없으리란 사실이 자명하지 않은가... 여러 다른 정의도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특정 세력을 일컬어 '기득권'이라 칭할 때는 그들이 '강자'의 위치에 있음을 이미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강자는 항상 약자에 대해 승리한다. 이는 지구와 태양의 인력 관계에 있어 태양이 거의 일방적으로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같은 구조주의에서 파생한 사회혁명론은 약자인 프롤레타리아가 '조직화'함으로써 강자인 부르쥬아 계급을 타파할 수 있다고 묘사한다. 그래서 한국의 속칭 386들은, 똑같은 구조주의자들인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붙었고 그 결과는 산산히 깨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자라는 이해에서 비롯한 모자라는 결론이다.

 

그들은 사실상 승리했다. 기득권의 세뇌와도 같은 저주에 걸려들어 스스로도 패했다고 믿어버리게 되긴 했어도, 그들이 일으킨 '진동'은 한국 사회라는 비균질한 계에 아직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바마의 당선은 결코 우연이나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방법론의 실패들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윤리적 인간'에 대한 니즈를 증가시켰고, 그렇게 축적된 니즈가 변화(Change!)와 희망(Hope!)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오바마를 트리거 삼아 폭발한 것이다. 이 폭발에는 미국 사회의 진보한 온라인 네트워크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오바마가 지역사회운동조직가(Community Organizer) 출신이라는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다. 비교적 젊은 천출의 비주류, 비주류에서조차 비주류, 하버드와 사시패스로 공증된 능력,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진정성 등 이토록 다양한 공통점이 일반에 회자되지 않음도 역시 우연으로 볼 것인가?

 

물론 노무현의 당선은 보수의 분열이라든가 부산-경남권의 호의라든가 하는 여러 호재가 함께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개별 사건들이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킨 것은 386이 백본이 된 온라인 네트워크였다. 89년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 논쟁 이후 2002년 대선처럼 살벌했던 가족내 정치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학비를 끊고, 자식이 늙은 아비의 용돈을 끊는 혈전이었다.

 

이후 기득권은 곧바로 반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십분 활용함과 동시에, 한층 업그레이드된 집요함으로 네트워크를 장악했고, 결국 다시 시장지배적인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노무현을 당선시킨 것만으로 제 할 일 다한 것처럼 퍼져버린 386들의 책임이 작다할 수 없다. 애당초 고졸의 천출을 그들이 마음 깊이 신뢰하긴 어려웠던 듯하다.

미국 공화당 역시 싸지른 똥이 많아 한동안 숨죽이겠지만, 클린턴을 탄핵소추하고 끝내 지퍼게이트에 몰아넣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바마의 빈틈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성향은 묘하게 우리와 닮아 있다. 두 사회의 네트워크 인프라가 턱 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음에도, 해방 이후의 일방 종속적인 역사 탓인지 미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파동은 한반도의 남단에 곧바로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데 이후 양국의 네트워크 인프라 발전 속도에 차이가 나면서부터는 그 파동이 한때 역전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노무현의 당선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네트워크의 개념이 보다 단순했을 무렵, 세계는 근대의 구조주의적인 모델에 따라 꿈틀대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거대 담론들이 부딪혀 거대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잘한 담론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변수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에서 나비효과의 예와 같이 자잘한 변수라 해서 결과에 미치는 영향 또한 자잘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 체제경쟁은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노선을 걸으며 마치 자본주의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막을 내렸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비해 '네트워크의 힘'을 살릴 수 있는, 반중앙집권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체제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을 뿐이다.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은 수정-자본주의라는 형태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공산주의적 장점을 체제 내에 이식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방법론의 우월성을 도입하려는 시도, 즉 개량주의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비교된다.

이 시기가 미국 대통령으로 보면 루스벨트로부터 케네디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황금기였다.

 

 

기억하자. 현대로 불리는 시대가 시작된 이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린 한국 전쟁을 제외하면, 전쟁은 모두 미국 공화당 집권기에 일어났다. 전쟁영웅 출신의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집권하자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사임한 닉슨 시절엔 매카시 광풍이 불고 대마초가 불법화 되었다.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을 일으키고 아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서 한국전쟁의 역사적 예외성을 보충하고 싶어지는데, 당시 미국 민주당으로서는 한국 내전을 방치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 이전 히틀러와 맞서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학습한 서구인들로서는 당시 소비에트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자유보다도 더 위험해 보였을 것이기 떄문이다. 결국 이는 외교적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드러났고, 매카시 광풍으로 반복되었다. 여기에 분명 자본가들이 개입하였고 이를 조장했으리라는 점에는 이의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의 전체주의가 자본가들의 탐욕보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10여년 간, 즉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견제를 잃은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가 폭주하는 동안, 변증이라는 구조주의적 법칙, 작용-반작용의 물리법칙, 그리고 카오스라는 우주의 법칙을 따라 네트워크 또한 크게 성장했다. 말하자면 대중은 점점 더 조작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첨단의 매스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일까?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조작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메커니즘은 네트워크적인 계가 어떤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생애동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앎의 전부였던 시절로부터,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잡것'들이 사방팔방에서 끗발 날리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시절로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비용이 점점 더.

 

 

이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실체다. 일개 블로거들로부터 정치인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소통과 타협, 상식에 근거한 원칙을 신봉하는 이들이 네트워크의 사회를 앞당기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한국인이 '전 세계'를 말할 때는 주로 영어권 국가들을 뜻한다-으로는 구글의 약진, 오바마의 당선, 영국 노동당의 재집권, 유로의 탄생, 등등의 사건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과 그를 도운 386들)이 물꼬를 텄고, 노무현(과 그를 당선시킨 386들)이 대세를 굳혔으며, 386이 지레 좌절함으로써 다시 근대화론자들에게 명분을 넘겨준 상태이다.

 

여전히 '적'들은 건재하고, 더 많은 자유가 우리를 더 많은 진리와 복리에게로 인도할 것이란 믿음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조주의자가 아닌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 나는 이 전쟁의 끝이 승리일 수도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만, 예측될 수는 없다.

이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 ps. 주저리주저리 잔뜩 쓰긴 했는데 곳곳에서 귀차니즘과 부딪히고 만다.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도 좀 필요할 듯싶고, '네트워크적'이라 표현한 의미에 보다 적절한 전문용어가 있을 듯도 한데, 아아 역시 귀차니즘...

2009년 5월 19일 화요일

루저를 위한 망상


"산타클로스는 없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선 '산타클로스에 대한 환상'이 먼저 보편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산타클로스는 없어."는 아이들에게조차 '상식적'이 되었다.
그것이 이미 '지나치게 상식화'되었다면 반작용으로써 또다시 동화적 세계를 향한 지향이 힘을 얻는다.

이런 논리를 상대주의, 다원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면 결국 역사순환론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닥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세속 불교에 빠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윤회든 부활이든 조금이라도 기복(祈福)적인 종교는 죄다 나의 '앎(?)'과 상치된다.
그리고 내가 그 본질을 이해했다고 믿는 '불교'는 윤회 따위를 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윤회는 사실 힌두교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유한한 (공간적) 사물과 (시간적) 사건은
주물질차원 안에서만 다뤄질 수 있으며, 다뤄져야 하고,
이를 과학(중 특히 의학, 생물학 등)이라 한다.


* Alan's Blog(리처드 도킨스_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 (What's Wrong with Religion? Why be so Hostile?)에 대한 트랙백

 

인터넷의 바다 곳곳에서 나와 닮은(하지만 나보다 훨씬 공부 많이 한-_-;) 이들을 만난다.

아직도 2MB 따위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세상인 걸 보면
이들은(나는) 아직도 마이너리티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맑스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그것의 강력한 진통효과는 합리적 이성,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이룰 수 있는 인간 본연의 힘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 유혹은 너무나 강렬하다.
오죽하면 그 치열했던 도스토옙스키마저
"설사 진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선택하겠다."고 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심각한 도박중독자이기도 했던 것으로 전한다.)

 

'믿는 사람'(특히 기독교)은 때때로 혹은 자주, 그 믿음의 양과 정비례하여 주변인을 믿음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전도하는 친구들', 누구나 언젠가 어디선가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재밌는 건, 나와 같은 '합리주의자'(말하자면 이성숭배자) 역시 믿는 자들을 불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다. 이 역시 그 '신앙의 세기'에 따라 적극성이 결정된다. 결국은 '똑같은 놈들'이란 애기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중도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우위를 점하려는 이들은, 그저 '이 문제에 대해' 게으른 것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신 따위 알게 뭐냐."란 논리는 "경제도 어려운데 민주주의는 개뿔."이란 식으로 답습된다.

미안하지만 '진리'는 이쪽에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진리가 쉽게 가까이 갈 수 없을 뿐더러, 어지간해서는 개인이 먹고사는데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는 사실이다. 진리에의 추구는 이렇게 개인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결국 물질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초래한다. 격리는 설득력의 약화를 동반하며, 결국 사회에서 도태된다. 

아마도 이것이 신비주의에의 타협이 어떻게 수천년을 인류역사에서 우성인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메커니즘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역사는 승자가 쓴다.


낙오자(loser), 서구에선 가장 모욕적으로 사용되는 말.
한국사회도 더욱 더 많이 서구화 되면서 비슷한 세기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가치관은 "없는 자 굶어라"라는 의미와 뒤섞여 문명의 발달에 기여해왔다.

이러한 가치관은 '자의성'에 대한 해석-낙관적 혹은 비관적인-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낙오자에 대한 인간사회의 배려(혹은 배제)는 어떤식으로 진화해 왔는가?

아마도 원시-고대사회에서는 방치나 추방 정도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추방-문명(아무리 조악한 형태였다 할지라도)으로부터의 배제는 죽음과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화론적 원리(자연선택)에 따라 생산성이 높은 '근면의 가치관'(우성)은 생산성 낮은 '나태의 가치관'(열성)을
성공적으로 인간생태계로부터 배제해 왔으며,
그 결과가 자랑스런-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현대 문명'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비극도 있었으니, 우생학(優生學)이다.
2차세계대전 시기 독일의 나찌는 위와 같은 논리의 연장선 상에서 집시와 유색인종을 학살했다.
유태인 학살에 가려 별로 주목도 받지 못한 이 딱한 인종들의 생태는
6~70년대에 들어 히피들이 추구한 삶의 전범(典範)이 되었다고 한다.

방종, 나태, 쾌락의 탐닉, ... 등등이 외부에서 그들의 삶을 평가하는 표현들이다.
자유, 자연에 순응하는 삶,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 등등은 그들이 스스로를 미화하는 표현이었고.

집시에 대한 학살과 학대는 그 숫자에 있어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만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워낙 제대로 씨를 말려버렸고(미국건국史에서 원주민 학살을 문책하기 어렵게 된 것처럼)
'잡아죽인 놈'들이 '잡아죽일만한 놈'들이었다는 공감 역시 全유럽적이었던 탓에
그다지 역사적 위로를 받고 있지 못하다.

말하자면 낙오자(loser) 집단의 말로랄까,
승자의 손으로 기록되는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 그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었겠느냐는 이야기.

이런 논의의 연장에서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라는 우리의 윤리교과서적 규범이 도출되었지만,
과연 자유와 방종 사이에 납득할만한 근본적 갭이 존재하는가?

 
풀이 나를 끌고 가는 낙원은 자꾸 집시와 히피 형님들이 뛰어노는 그곳을 닮아간다.
이래서야 이 거대한 물질문명사회에서 전혀 설득력이 없다. 새로울 것도 없고...
나는 공생공존의 행복한 꿈을 꾸지만, 역사가 너무 더디 가서 아프다.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의) 양자역학적 우주와 (내가 이해한 수준에서의...이하 생략) 상대성이론의 우주는 양립할 수 없다.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물리> 양자 역학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에너지와 시간 따위와 같이 서로 관계가 있는 한 쌍의 물리량에 대하여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관측하여 정확하게 측정, 결정할 수는 없다는 설. 두 개의 측정값의 불확정성의 곱은 플랑크 상수(Planc常數)보다 작아질 수 없다는 불확정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1927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W.K.)가 세웠다. *출처:네이버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냐... 이 발견에는 아인슈타인조차 곤혹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내 식대로 말해서, 상대성이론이 거시적으로 구축하고 증명한 '필연적 우주'가 
우주의 어떤 부분은 극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일 수 있다는 미시적인 발견에 의해 박살나버린 것이다.
전설(과학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이 '두가지 우주'를 합일시킬 이론-소위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다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갔다고 한다.

이 문제를 파다보면 반드시 빛의 파동/입자설, 소립자가설, 쿼크, 초끈이론 등등등등...으로 넘어가는데,
이쯤 되면 과학(특히 이론물리학)은 이미 종교나 다름없다.

즉, 믿느냐-믿지 않느냐의 선택이란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적당한 수준의 타협-만질 수 있는 물질(돈)의 세계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과학적 증명이란 강박관념(?)을 벗어버리면(가설을 이론으로 비약, 즉 논증에서 직관으로 방법론적 전환을 해버리면) 속편한 선택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풀이 나를 불교적 세계관으로 이끄는 힘이다.
거부하고 싶지만 끌려간다.

일원론와 이원론이 결국 같은 의미라는 나의 직관적 깨달음(?)은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반야심경이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 되고,
도교식으로는 태극이 양의(음과 양)가 되고, 양의가 사상이 되며, 사상이 팔괘가 되는 원리와 같다.
또 성리학에서 이기이원론(주리론)은 서양철학의 관념론과, 이기일원론(주기론)은 유물론과 통하는 바가 있으며,
히브리철학(원시 기독교랄까)과 예수의 가르침(신약 중 예수가 직접 말한 부분만)의 대립도
어딘가 성리학의 사단칠정논쟁을 닮았다.
요약하면 나는 기계적 유물론의 길을 따라가다 덜컥 부처를 만난 셈이다.


... 출가해야하나? ㅡ,.ㅡ;
한마리 상습 파계승으로도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긴 하겠는데... (뱃속에 벌써 '사리'도 들었겠다)
그러기엔 또 세속적 욕망이 너무 크고 잦다.
육식을 금한다던가 소유욕을 포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언제나 성욕이다. -_-*
(사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사는 동안 건강하게 있고 싶으면 난 어차피 고기를 피해야 한다...)

어느 절간이 승방(僧房)을 모텔방으로 만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중놈을 받아주겠냐는 말이다.
사실 원효대사라는 자도 자식을 두었고(설총) 고기를 먹은 파계승이었으며, 모르긴 몰라도 '깨달은 이'(부처)라면
딱히 성욕을 죄악시 하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어디서 감히 부처 흉내를 내겠냐구... ㅋ


아, 오늘도 이 루저의 망상은 끝이 없다. (2008-07-30)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로하스의 시대가 온다.

로하스족(LOHAS)

 

건강, 환경, 사회정의, 자기발전과 지속가능한 삶에 가치를 두는 소비집단  

로하스(LOHAS)는? :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칭. 

특징 : 재활용품, 유기농 농산물, 환경친화적 여행상품 등을 소비하며 생활함

관련정보 : 로하스족으로 사는 10가지 방법, 웰빙족 

2000년에 미국의 ‘내츄럴 마케팅 연구소’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건강과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생활방식 또는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개인의 정신적∙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환경까지 생각하는 친환경적인 소비 형태를 보이며, 자신의 건강 외에도 후대에게 물려줄 미래의 소비기반의 지속가능성까지 고려한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장바구니 사용, 천으로 만든 기저귀나 생리대 사용,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프린터의 카트리지 재활용 등이 있다.

로하스의 개념은 환경과 미래에도 지속이 가능한 발전을 고려하는 '사회적 웰빙'이라는 점에서 개인을 중심으로 잘 먹고 잘 살기를 추구하는 웰빙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집 안의 벽지를 친환경 소재로 바꾸는 것은 웰빙이다. 

그러나 벽지의 원료가 재생이 가능한 것인지, 폐기할 때 환경 파괴 성분이 나오지 않는지 등을 따지는 것은 로하스이다.

또한 로하스는 개인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참여운동의 일환인 친환경주의와도 차이가 있다.

 



이들이 바로 차세대 마케팅 전략이 겨냥해야할 새로운 소비자 집단이다. 아니, '새롭다'는 것은 부정확하다. 이미 대세이다. 이 포스트를 읽는 당신도 내 글에 공감하거나 말거나 이미 로하스족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상업적 폭발력은 한국에선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중에는 불어닥칠 것이므로, 지금이야말로 '1년 내 시판이 가능한 로하스 관련 상품'들을 기획하기엔 가장 적기, 혹은 마지막 찬스일 것이다. 아마도 규모가 있는 기업들은 이미 개발이 진행 중일 것이라고 본다.

이제 한국에서도 점차 정착되어가는 장바구니 사용과 같은 소비 행태는 환경보호와 관련한 법률들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강요의 합리성이 대중에 설득되면서 일반 윤리로 정착하였다. 다시 말해 대중에 의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중은 젊은날의 꿈을 잃었다. 안정된 미래에 대한 낙관도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지쳐버린 것이다. '야망'이라든지, '꿈', '장래희망'을 작게(현실적으로) 설정하고, 적당한 성취를 이루면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게 어디야?'라는 심리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도덕적 열망에 의해 그들의 '적당한' 안주(安住)는 또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걸로 끝인 걸까?'라는 반성이 자기 안에서 끊임 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따라다닌 실존적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로하스'족의 개념은 대중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내가 크게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작은 노력만으로,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를 일부러 부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싶은 인간의 바람직한 본성에도 부합한다. 희생이라 하기도 거시기한 작은 노력과 실천만으로도 큰 도덕적 만족감을 주는 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이를 확대해석해보면, '로하스족' 개념의 유행은 '홍익인간'의 재림에도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386세대. 이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은 피 흘려 이 만큼의 민주화를 이뤄주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얻은 자유는 누릴 줄 몰랐던, 가엾은 세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이 세대론적으로는 현재 대중 가운데 가장 구매력, 즉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이다.

이들 정통 홍익인간의 후예들이 품었던 '왕년'의 꿈은 정말 아름다웠다. '민족 통일'이라든지 '노동자 해방'과 같은 것들이다. 어느쪽을 선행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서로 다투느라 결국 적전분열해버리고 말았지만, 어느쪽이든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는 가치라는 점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386세대는 자신들이 이뤄낸 것들의 가치를 그 윗 세대, 즉 '기성세대'에 의해 폄훼되고 부정당하다가 결국 그 부정과 폄훼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말았고, 이러한 타협에 대한 죄책감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로하스족'이 되는 것은 이런 좌절감과 죄의식을 다소나마 효과적으로 치유해줄 수 있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이 '작은 실천과 참여'라는 웹2.0적 방법론과 386세대의 도덕적 갈증이 일으킬 수 있는 폭발력은 한국의 자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소위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시장권력'이 그런 이유로 해서 '그린 뉴딜'과 '사회투자국가론'과 같은 '위험한' 개념들이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혹은 피상적으로 이해되는 데 그치도록 하는 여러 정치적 활동들을 현재 진행 중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국의 시장권력에게 있어 '그린'은 아직 충분히 독점하지 못한 시장인데 '그린 열풍'이 난데없이 그들의 준비보다 먼저 불기 시작하면, 그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결과, 즉 과거 노무현의 당선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를 부르고 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난 5년간 각고의 견제 끝에 '참여 정부'가 '국민의 정부' 수준의 개혁에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있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의 세월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그들이 요즘 그토록 노무현 죽이기에 열중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노무현'은 노무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정작 386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상관 없이 '386적인 가치'의 정치적 아이콘이다. 노무현을 죽이면, 386도 죽는다.
 

누가 뭐래든 현재 대한민국의 시장권력은 국민의 헌법적 주권 위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 방법론에 의해 소비자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적당히 분산되어 있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으나, 실은 소비자의 대의 기구를 참칭한 기업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이다. 이 빼앗긴 주권을 국민, 아니 '시민'이 되찾으려 하는 패러다임시프트의 전조(前兆) 가 바로 '로하스족' 열풍이 될 것으로 나는 예측한다. 
 

 
※ 써놓고 보니 완전히 점쟁이 같은 소리다. ㅡ,.ㅡ 1~2년 뒤 두고 보면 알겠지 뭐. 그때 가서 잘 맞췄다면 복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겠지. 젠장.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나 쵸큼 천잰듯.

어제는 <직장인 열정충천 컨퍼런스>란 것을 다녀왔다. 회사 덕에 팔자에 없는 호강이다. 강연자 중 하나가 손욱 농심 회장이었다. 그는 우리 책의 저자다. 덕분에 무려 99,000원의 수강료를 아꼈다. 강연은 꽤 유익했다.

강연자 모두가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베스트셀러 한두 권씩 쯤은 있다. 재미든 품격이든 둘 중 하나는 확실히 챙겨주더라. 그중 한 분은 나를 완전히 몰입 상태에 빠뜨렸다. <몰입-Think Hard>라는 책의 저자, 황농문 박사였다. 감격했다. 강연이 끝난 후 따라갔다. 궁금했던 걸 질문 했다. 노트에 싸인도 받았다.(-_-*) 모두 끝나고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예스24에 책을 주문했다. 몇 년만이다. 

그는 '몰입'의 방법을 통해 재료공학계의 수십 년 묵은 난제를 여러 개 풀어냈다. 알아주는 과학자인 모양이다. 과학은 발전이 빠르다. 과학의 난제란 건 무진장 많은 천재들이 무진장 많은 세월을 그 문제에 골몰했었다는 뜻이다. 현재는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라고 한다.
(나는 서울대 출신 사람들을 좀 편애하는 것 같다. 고졸 주제에 말이다. 유시민, 이문열, 최 선생님, 정 사장님... 그러고보니 내 롤모델 중에 고졸은 노무현 전 대통령뿐이네.-_-;) 

이 양반은 풀어냈다. 내가 평소 고민하고 망상했던 것들이었다. 또한 내가 '몰입' 중에 깨달은 것들과도 일치했다. 나는 매우 행복했다. 마치 내 지난 삶을 추인받은 듯했다. 

그리고 오늘은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고 있다. 유시민은 예전에 인터뷰를 했다. 그는 노무현을 '정신적 쌍둥이'라 비유했다. 나는 오늘 그의 책을 읽으며 느꼈다. 나는 글재주와 말재주가 모자라다. 아직 그이처럼 세련되게 풀어내진 못한다. 하지만 그의 밈Meme들은 내 안에서도 스스로 끓었던 것들이다. 아마 태생이 같아 그런 듯싶다.

그는 책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당위성을 논하는 데에 '과학자의 의견'을 여러 가지 인용했다. 예를 들어 도킨스에게서는 '이기적 유전자'와 '밈' 개념을, 러브록에게서는 '지구유기체' 개념을 빌려왔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과학적'임을 밝힌 것이다. 나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같은 결론을 얻었다.

당위는 현실(혹은 현실로 인정되는 것들)에 근거해야 한다. 현실을 인간의 언어로 정리한 것이 과학이다. 언어는 인간이 사용 가능한 소통 방식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당위는 과학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부연해둬야겠다. 혹자는 오해한다. 과학 역시 또 하나의 (잘못된) 의견, 신앙일 뿐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태양이 지구를 돌던 시절에는 그것이 '과학적' 진리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마침 현대라고 불린다. 그런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인간 동지 대부분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원운동을 상상하는 것 같다. 
근데 '정말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다. 태양은 우리 은하계의 인력에 끌려간다. 은하계 또한 은하끼리의 인력에 끌려다닌다. 이 거대한 우주적 소용돌이의 날갯죽지 어딘가 깃털 하나에 올라 앉은 먼지 같은 게 우리 지구다.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다. 그 먼지 위에 묻은 원자 알갱이들 중에서 골라낸 일부분을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다행히 우리는 지구별 위에 찰싹 달라붙어서 같은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으므로, 안전하다. 이 다행스러운 일이 God's bless가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데에 굳이 상대성 이론까지 마스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우리끼리도 뭔가 좀 소통하려면 항상 뭔가 적당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때는 지구가, 현재는 태양이 그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엔 물物과 기氣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에겐 육체와 정신이 따로 있단다. 심지어 정신과 기가 육체와 물에 우선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물질적이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경박한 유물론자들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세상에는 이들이 다수고 내 편이 소수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세상꼴이 영 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언젠가 사적 유물론과 기계적 유물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유물론 운운하다가 쪽을 좀 판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모든 진리는, 만약 그것이 진짜 진리라면, 단 하나의 옳은 명제로부터도 다른 모든 것이 도출될 수 있어야 한다... 아무튼,)

기, 정신, 영혼, 신, 따위에 어떤 인간적인 기대를 거는 것은, 단언컨대 '물건(object)'과 '사건(event, happening)'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혹은 구분하지 않는 오해의 소산이다. '불'을 예로 들어보자. 불은 흔히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그것을 '존재'라 부를 수 있는지는 애매하다. 불은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방식'이 다른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인민들은 기나 정신 따위가 물건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여, 나아가 물건에 대해 비합리적인 물리력을 가할 수도 있다고 믿는데, 이는 불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논증을 생략하고 내 방식대로 말해보자면, 모든 물건은 사건이고, 모든 사건은 물건과 물건이 관계맺는 방식이다. 나의 '정신, 의식, 영혼, (whatever you call),은 나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중 특히 뇌세포)를 구성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건(물질)들 사이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필연적인 우연의 총합인 것이다. 이것이 물건과 사건을 올바르게 구분한, 내 모든 가치관의 근거이다.  따라서 나의 '정신, 의식, 영혼, whatever,은 내 육체의 소멸과 함께 완전한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 쓰다 하루치 체력이 고갈돼서 여기서 쫑. high하지 않으니 체력이 후달리네. 소설은 엉덩이로 쓴다-라고 말했던 게 하루키였던가... -_-;

덧붙여 이는 나의 생활을 위해서도 유감스러운 일인데다가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는 건데, 내가 옳은 것 같다.

2008년 9월 1일 월요일

루저를 위한 변명 - 나에게 삼 비범의 의미

나에게 삼 비범은 어떤 의미인가

삼은,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내게 특별히 절실한 이유는 당장이라도 비범죄화 된다면 나와 내 벗의 자살을 편하게 저지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또 어딘가 있을 누군가를 살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가서 죽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만히, 그이가 왜 죽고 싶은지 이유를 묻는다. 굳이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유는 대개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어요." 가서 돈 벌어라. 돈 벌어서 남들이 말하는 성공하면 세상 여자가 다 네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가서 돈 벌어라. 당신이 돈을 벌어 성공하면 누구나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들이 당신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논외로 하자.

"부모님은 늙어가는데 애인도 없고 아프고 힘들어서 죽고싶어요."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든, 가서 돈벌어라. 못 벌겠거든 로또라도 사놓고 당첨되길 빌어라. 99.999...% 확률로 꽝이겠지만, 별 수 없잖나. 그게 당신 팔자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면, "가서 돈 벌어라"는 할 말을 잊는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데요?"라고 물어올 테니까.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날 텐데 굳이 그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삼이 개입할 수 있다면면 얘기는 달라진다.

"죽고 싶어." "삼을 해봐라. 살고 싶어진다."

너무나 당연히, 삼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잠시 위로해줄 뿐이다. 삼은 단지 어떤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재미를 잠시 일깨워줄 뿐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진 않지만, 세상엔 그렇게 절망 속을 뒹구는 가엾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상처받기 쉬운 여린 영혼을 가졌다는 것 뿐, 이들은 약한 탓에 악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악하다면 그들이 수시로 처하는 곤경에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에 그토록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약한 동시에 악한 이들의 수가 많았다면 서울의 밤거리는 이렇게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하지만 악하지 않은, 이들은 죄를 범하느니 자신을 파괴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들에게 흔히 던져지는 "강해져라."라든가, "맘먹기에 달렸다."라는 식의 충고는 비록 그것이 선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더라도, 그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언어 폭력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팔다리 없이 태어난 모든 이가 오토다케 히로타다(<오체불만족> 저자)처럼 노력하며 살아가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강해졌다. 이들도 언제나의 누구나처럼 현대문명사회의 주문에 따라 더 강해지려고 노력해왔다. 강해지면서 악해지지 않으려니 삶이 더 고단할 뿐이다. 때로는 선천적, 때론 후천적인 이유로 이들은 영혼의 불구자가 되었다. 사회는 이렇게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 혹은 더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 적은 이들을 아울러 '루저(loser, 낙오자)'라고 칭한다.


그러니 이 루저들에게 삼을 허하라. 삼은 천사와 악마를 모두 게으르게 한다. 선(善)은 비록 좋은 것이지만 강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게으른 악은 위험하지 않다. 선한 게으름과 악한 게으름 사이에서라면 누구라도 선한 게으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삼에게 죄가 있다면 값이 너무 싸다는 것, 문명사 밖으로 꺼져줘야 할 퍽킹 루저들이 조금만 노력하고도 충분히 행복해져 버릴 수 있다는 것 뿐이다.


좋은 부모 되기

만약에 나중에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다면, 이런 이벤트 어떨까...

매년 아이의 생일마다 10분정도의 영상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가 말을 좀 할 줄 알게 되면, 매년 아이의 생일마다 1년 전 자신을 보여주고 1년 후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10분간 녹화하는 거다. 연습을 해도 좋고 뭘 어찌해도 좋지만 찍는 시간은 단 10분으로 정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의 생일이면 이 행사를 잊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를 진정 사랑한다면 아이의 생일마다 단 30여분의 시간을 투자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보는데 10분, 찍는데 10분, 짧게 하면 30분이면 끝난다. 아무리 바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놓치면 안된다.

혹시라도 비행기 사고라던가 달나라 여행 쯤의 이유가 있어 놓치게 되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찍어주어야 한다. 가능하면 그런 이유도 만들지 말고 30분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다.


아이의 독립심이 강해지는 사춘기 쯤까지만 꾸준히 찍어주면 이후론 무슨 일이 있어도 깰 수 없는 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생일마다 어린 자신으로부터 편지를 받는 아이라면 생각이 자라남에 있어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난 이 '다름'이 장차 아이에게 무척 좋은 어떤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2008년 8월 29일 금요일

내가 삼비범에 나선 이유

인터넷을 통한 소호(SOHO)창업과 마찬가지로 블로거는 지식/정보/공감의 소매상이다. 텍스트를 상품으로 하고 공감을 가치로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블로거 겸 삼비범죄화운동가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마케팅 방법을 적용해보았다.

 

고객의 필요(needs)에 맞는 적절한 가치(value)를 적당한 가격(price)에 제공할 수 있다면 사업은 성공한다. 그럼 먼저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와, 잠재고객의 니즈와, 적당한 가격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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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이 지천에 널렸는데, 시발 라이터가 없다!"

 

내가 제공하려는 가치는 일단은 '삼 비범죄화의 모의를 꾸미는 공간'이다. 고객의 니즈는 ‘삼에 대한 양질의 정보’와 ‘더 많은 공감’이 될 것이며, 가격은 나 개인의 노동가치와 기회비용이다.

 

 

이를 고려하여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고객-독자 프로파일링을 해보면,

 

1. 삼을 아는 사람(유쾌한 경험자)

2. 자유와 공생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

3. 문장이해력이 좋아 나의 부족한 글도 잘 읽어내는 사람

4. 삼 비범죄화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용의가 있는 사람

5. 기타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

 

중 어딘가에 해당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인간들이 얼마나 되겠냐 싶겠지만 이토록 철저하게 탄압받는 한국에서도 삼 사용자가 100만 명이다. 모든 일이 잘만 풀려준다면, 어림잡아 비범죄화 직전까지 최대 10만 정도의 고객-독자는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잠재수요를 두고 다른 사례(경쟁업체)를 꼼꼼이 살펴 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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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한국의 삼 사용자는 2005년 김부선씨의 위헌소송 시기에 잠깐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 또 다시 깊은 잠수를 타고 있다. 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와 공감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파편화되어 다른 '오타쿠'들, 예를 들면 '얼리어댑터'들이 '지름신'이라는 단어를 사회 일반에게까지 퍼뜨리는 동안에도, 그저 바위(stone) 뒤에 숨어 있었을 뿐이다.

디지털카메라 마니아들이 디시인사이드라는 대박을 터뜨리는 동안 삼마니아는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 만의 잠재 수요를 가진 '삼 산업'이 왜 아직까지도 제대로 확산될 수 없었을까. 가장 큰 이유인 '위법성'을 논외로 하자. sex산업도 위법하지만 최소한의 밥그릇은 챙기고 있다.

 

다른 이유는 역시 ‘합법적인 오타쿠’들이 소비지향적-자본친화적인데 반해 삼 마니아들은 내면지향적-반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을 꼽을 수밖에 없다. '안전이 확보된' 삼 사용자는 굳이 '동호회'를 만들 이유가 없다. 아니, 아예 이유가 없다기보단 삼 사용자가 '위험'을 감수하며서까지 굳이 '삼에 대한 어떤 공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설사 이러한 공감을 나누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통계적으로) 그들은 외국어에 더 익숙하다. 공감을 하려면 일단 경험이 있어야 하고, 경험은 대개 외국에서 이뤄지며, 외국물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외국어는 할 줄 안다는 것.

이것이 한국의 삼 역사에 끼친 영향은 국내에 서버를 둔 포르노 사이트가 사실상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한국어 버젼을 제공하는 외국 포르노 사이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으로부터 유입되는 수익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삼에 대한 어떤 수요도 일부는 외국의 인터넷 서비스 또는 해외여행 경험을 통해 해소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요를 한국 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로 돌리면서 더욱 확대하려는 것이 나의 ‘사업 아이템’이다. 이미 또다른 그러한 '공간'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그냥 참여하면 되겠지만 그런 곳이 아직 없다면 나라도 앞장서려 한다. 그곳은 나의 '블루오션(blue ocean, 미개척시장)'이다. 현대사회는 내겐 레드오션(red ocean), 그러니까 금전만능주의, 성공지상주의, 신차(new car)와 명품(名品)이 지배하는 세상은 내게 불리한 시장이다. 그 시장에서 탐닉과 나태는 죄악이고, 가난은 그 형벌이다. 나는 거부한다.

따라서 나는 제일 먼저 내 사업이 '포르노'와 달리 금지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최소한 과반수의 국민에게 납득시켜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로, 누군가 해야할 필요가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삼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내 삶이 내 삶의 진실성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까닭에 나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유전에 착유기를 꽂는 것과 같다. 좋은 포인트를 찾아 꽂기만 하면 공감은 석유처럼 솟아나올 것이다.

이러한 잠재수요를 나의 ‘매장(每場)’으로 효과적으로 집결시키기 위해선,

 

1. 내가 직접 쌈뽕나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삼의 즐거움을 알리는 것은 물론,

2. 누군가 존내 쌈뽕난 글(을 비롯한 어떤 창작이라도)을 쓸 수 있는 사람을 꼬드겨 이 '공간'에 서식하게 해야 하며.

3. 당분간 모든 참여자에게 완벽한 안전을 보장해줘야 한다.

 

이쯤 쓰고나서 보니, 내 모든 계획이 법리적으로는 ‘범죄조직의 결성’에 해당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가 어쨌든 간에 현행법의 위반을 추구하니까.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꼴통들이라면 틀림없이 반사회적 조직이라는 둥 해서 탄압할 명분을 찾으려 할 만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것이 현행법에 어긋나느냐가 아니라, 그 법이 사리에 맞느냐이다. 악법도 법이므로 무조건 지켜야 한다면, 혁명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주의, 입헌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으므로, 법은 민의에서 나와야 한다.

 

어떻게든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공감대를 키워내 조직화 하면, 정치적인 힘이 생긴다. 이 힘으로 삼을 이슈화할 더 힘 있는 아젠다 메이커를 키워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삼에 우호적인 국회/지방의회 의원, 자치단체장 등을 지원해 당선시키거나, 기존 정치인에게 관련 법률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한다던가 하는 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합법적인 정치행위로 민주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물론 그 길엔 넘어야 할 산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당장 법을 회피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내는 것도, 그리고 가장 어려운, ‘삼의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쉬울 일이 없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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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삼 비범죄화 시위(오렌지색 자켓 등짝의 삼이파리를 보라)

 

일단 일반인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삼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 많은 이들에게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누구라도 적절하게 즐긴다면 그들의 삶이 크게 풍요로워지리라는 사실 등을 인식시키는 것은 선교(宣敎)에 비견할 어려운 작업이 되겠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줘야 한다. 가능하면 그 과정의 대승적 희생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또한 어떤 조직이든 덩치가 커지면 힘과 함께 관리의 필요성도 생기는 법이다. 조직이 커지면, 시간이 없어서라든가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든 삼 비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비롯한 전업운동가들을 도울 수 있다. 많은 합법적 민간단체나 NGO들이 이렇게 운영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 위주로 진행될 이 사업의 초기에 도움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의미는 무진장 크다. 누구라도 조금씩만 더 ‘진실’에 관심을 보이고, 비범운동글에 댓글을 달아주는 것 정도라면 당장은 충분한 것이다. 어떤 위대한 것도 시작은 미약하였다. 그리고 작은 관심이 모여 큰 힘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은 굳이 촛불집회의 예를 들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인터넷이든 오프라인 어디서든 더 적극적인 관심은 항상 더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무엇보다 귀한 자원인 ‘돈’이 흘러들 가능성이 생긴다. 사람만 많이 모아내면, 어떻게든 조직의 활동자금은 마련된다는 얘기다. 그렇게 모인 자금 중 일부가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길 나는 기대한다. 이 점에서 나는 좀 가격 경쟁력이 있다. 내 삶을 삼 비범죄화운동에 바치기로 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내가 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보장과 더 많은 자유 뿐이므로.

 

사실은 이렇게 비루먹은 나 말고, 일정한 성취를 이룬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이런 일들을 해줬으면 좋겠다. 성공한 개인은 그러지 못한 개인보다 설득력이 강하므로. 누군가 나서주기만 한다면 전력을 다해 도울텐데. 그런데 아무도 나서주질 않으므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하므로, 나는 내게 필요한 일을 스스로 하기로 했다. 누군가는 조금씩이나마 도와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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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피우는 히피스머프... ㅋㅋ

 

기존의 사회는 계속 견디며 살아가야할 충분한 즐거움을 내게 주지 않는다. 내가 즐겁지 않은 직장을 견뎌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돈 때문이다. 더 많은 돈은 내게 더 많은 걸 가져다 줄 수 있겠지만 그중에 정작 내가 진정 원하는 평화는 없다. 또 더 많이 갖기 위해선 그만큼 더 많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나는 한 번 뿐인 내 인생에서 내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때려넣고 싶진 않다.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게 즐거운 일을 할 뿐이며, 삼이 그 길 위에서 미소 짓고 있다.

 

 

(이 글에 부족함이 있다면 내 글재주가 부족한 탓이니 삼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