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Sacred land 망상.

1.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라자]를 보면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신성불가침의 영역)'라는 마법, 혹은 유사 마법적 현상이 등장한다. [드래곤라자]의 배경이 되는 대륙에는 여러 신격(神格)들이 공존하는데, 특정 지역에 어느 한 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다른 신들의 '법칙'을 무시하고 해당 신의 법칙만이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죽음의 신'의 세이크리드 랜드에서는 이미 죽은 자가 좀비로 되살아난다던가 하는 일이 벌어진다. 동 저자의 후속작 [퓨처워커]에서는 '순결의 신'에 의한 세이크리드 랜드가 나타나 동식물의 출산이 줄어드는 상황이 묘사되기도 했다.(실제 원인은 다른 데 있었지만 어쨌거나.)

 

문득 '세이크리드 랜드'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까닭은, 진정한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하자면 종말은, 혼돈보다는 질서의 과잉으로부터 온다. 엔트로피 증가의 끝은 열평형 즉, 완벽한 질서다.

 

가변적인 것, 불확실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혼돈이라면, 질서는 불변의 것, 절대 진리, 필연의 법칙과 인과율 같은 것들일 터이다. 유사이래 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진리 체계들은 대부분 이러한 질서를 추구, 혹은 유지하는 것을 선(善)으로 정의해왔고, 나 또한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여기서 파생된 여러 규범들에 대체로 수긍하고 순종하는 편이다. 인간의 선은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는 것이라야 한다.

 

2.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 한국인은 지나친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어찌 보면 '현대'라는 시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으로, 굳이 말머리를 '한국인'으로 제한한 것은 외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탓일 뿐 대강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질서에 사로잡혀 있다.

 

혹자는  온갖 패륜적 범죄들, 묻지마 살인, 등이 횡행하는 이 혼돈의 땅, 가치 상실의 시대에 무슨 개소리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하나의 절대 가치, 즉 '돈(money)'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이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좀 고상하게는 '경제'라고도 하더라마는.

드물지 않게 헤드라인에 오르곤 하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일면식 없는 타인을 난자하는 등의 흉악 범죄들은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그동안 기록되거나 전달되지 않았을 뿐, 인류사에 늘 있어온 일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은 극히 합리적으로 계산되는 우리 '행복'의 평균과 총량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적어도 '평균 이상'의 생계를 원하는데, 그 평가의 잣대가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의 힘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고졸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일은 없다. 해가 갈수록 서울대는 강남 출신 학생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각자가 그리는 '보통의 삶'을 쟁취하려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로또라도 맞지 않는 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서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뻔한 삶 위를 걷게 된다.

 

'암흑기'라고도 불리는 유럽의 중세 외에, 그 어디 어느 때에 이토록 강력한 질서가 자리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말인즉,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또 하나의 '암흑기'로 보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내 삶이 대체로 유쾌하지 않은 것에는, 거창하게도, 대략 이런 이유가 있다.

 

 

 

댓글 4개:

  1. 힝 모두 행복하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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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키다링 - 2009/11/10 22:27
    아이 깜딱이야;;; 자주 포스팅하지도 못하는데 일찌감치 답글을 달아주셔서 제가 놀랐습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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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판타지란 장르를 뛰어넘어 많은 메세지를 전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보수적인 면은 항상 질서를 편애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현대사회의 질서와 변화의 또다른 형태인 무질서를 구분한다는 것이 도통 애매한것이 아닙니다. 어제의 뉴스가 오늘의 일상이 되는 요즘, 무엇에 놀라야 할지, 수긍해야 할지. 제가 너무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심지어 지금 제가 '질서' 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빨리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는 또다른 의미에서 현재가 '암흑기' 라는 사실에 동감할 수 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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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화애 - 2009/12/21 18:24
    제 경우엔 '변화'와 '무질서'는 전혀 별개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양상은 정연할 수도, 문란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템포가 빨라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쾅 하고 폭발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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