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6일 목요일

차일피일

금연

 

- 자나깨나 당신 생각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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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30일 수요일

길냥이 먹이 주기

사진출처

 

길에서 사는 고양이의 애칭을 '길냥이'라 하는 모양이다. 이는 전래의 이름 '도둑 고양이'를 대체해나가고 있다. 음식을 밖에 내놓는 일이 줄어든 요즘에 그들을 도둑이라 부르긴 억울한 면이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이 세운 도시 곳곳에 그들의 생태계가 열렸다. 특히 서울이란 도시엔 어지간해선 풀 한 포기까지 사람의 손에 비롯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들 또한 오늘에 와서는 사람에 비롯했다고 봐야 한다.

이 땅에서 동물 애완의 전통은 꽤 오랜 편이지만, 이 또한 '서구화' 되기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독신남, 독신녀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독신이란 식구 없이 혼자 사는 남녀를 뜻한다. 때로 잔존한 대가족 관계에서는 출가하지 않은 성년의 자녀들이 포함될 수 있다. 이는 '성년이 되면 독립한다'는 서구의 룰이 '혈연은 특별하다'는 우리의 룰과 아직 상생하는 까닭이다.

 

소위 '결혼적령기'가 최근 십수년 사이에 20대 중반에서 30대초까지 상승한 것은 다시 말해, 평균적인 독신의 기간이 연장되었음을 뜻하고, 이는 그만큼 그 사회를 흐르는 외로움의 양이 증가했음을 나타낸다. 수요의 증가는 반드시 공급을 초래하므로, 외로움을 해소할 방법으로써 동물애완이 도입된다. 그리고 그만큼 버려지는 동물도 늘어난다.

 

개의 경우, 아직 식육의 전통이 남아 있고 집단 사냥을 하는 개의 습성상 도시에서의 먹이활동이 어렵다. 따라서 살아남기도 어렵다. 그러나 고양이는 알려진 바와 같이 잘 길들여지지 않는, 스스로 사냥하는 짐승이다. 그러고보면 서울의 밤거리에서 쥐를 본 지 꽤 오랜 듯하다.

 

쥐는 전염병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인간의 도시에 극히 잘 적응한다. 그런데 어느새 음식물 쓰레기는 분리수거 시스템이 구축되었고(먹이 감소), 거리 곳곳엔 굶주린 고양이들이 풀려났다.(포식자 증가) 쥐들도 살아남기 참 팍팍해졌다. 길냥이들의 공이 크다고 본다.

 

도시가 길냥이에게 친절해질수록 사람에게도 이롭다.

 

 

 

 

2010년 6월 29일 화요일

시간당 15원 더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최저임금 '현실화'입니다."

 

이제야 드디어 노동계가 설득력 있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네.

 

 

처음 한국에 '알바'란 말이 도입될 때 이 말은 마치 사소한 용돈벌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위장되었다. 이 말의 어원은 독일어 'arbeiten'으로 그냥 '일하다'라는 뜻이다. '직장'과 '알바'를 굳이 구분짓는 것에서 비정규직-알바에 대한 최저임금 착취가 시작된다.

 


산업화 시대의 직장은 평생직장, 즉 생업으로 보장되었지만 오늘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소위 'IMF 시대'를 거치며 노동계가 경영계의 구조조정 담론에 밀려 불안한 고용 정책을 수용해준 까닭에, 이제 기초생활 수준을 보장할 제도는 최저임금 밖에 안 남았다. 마땅히 현실화 해야 한다.

 

 

최저임금 현실화야말로 소상공인에게까지 국부가 분배될 수 있게끔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삼성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하고 무역에 흑자가 난다고 해도 당신의 생활에 전혀 실감이 없다면, 그것도 결국 최저임금의 문제다.


자영업 비중이 너무 높아져서 동네 구멍가게 사장님들도 많아졌다.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장님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이 새로운 '구조조정'에 동참해야 한다. 결국 PC방 알바가 동네 당구장 가서 돈 쓰고, 편의점 알바가 동네 호프집 먹여살리는 거다.

 


시장이 있고 기업이 있는 나라 치고 최저임금 협상이 조용하게 끝나는 나라가 없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노동계의 건투를 바란다.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월드컵 단상

 

일본이 파라과이에 이기지 못하길 바라고 있다.

 

이미 16강이므로, 이기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은 곧 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남이 지길 바라는 마음- 이건 시샘하는 마음이다.

파라과이가 승리하길 응원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패배하길 염원한다는 건,

역시 좀 치졸하지 않나.

 

솔직히 '원정 16강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면 그들이 먼저인 것이 순리 아닐까 싶은데-.

(한국 선수들이 돈 받고 일본에서 뛰는 경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이 치졸함을 숨겨두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그들과 우리 사이엔 있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미식보단 호색

미식보단 호색이 낫다.

 

호색은 적어도 다른 것을 죽여 즐거움을 찾지는 않는다.

젊은 사자들

원래 숫사자들은 나와바리 안에서 최고가 되지 못하면 잉여가 되고 만다.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이 가치 있는 수컷의 운명이라고 하겠다.

 

유시민은 젊은 숫사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것 같다. 원래 수컷들이란, 말 많고 똑똑한 동료를 증오한다. 특히 그 수컷이 그닥 대단한 희생을 치른 바 없음에도 번지르한 외모 덕에 예상 밖의 지지를 얻고 있다면.

 

수컷들이 지지할 수 있는 수컷이란 오직 두 종류 뿐이다. 나를 지배하는 권력자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동지로 납득할 수 있는 자. 유시민은 젊은 수컷들을 승복시키지도, 영도하지도 못했다. 그의 이미지는 마초보다는 페미니스트, 터프가이 보다는 인텔리다. 어느쪽이나 수컷들은 지지하기 보단 혐오하는 이미지다...

 

과연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2010년 6월 2일 수요일

낙관주의

성선설을 믿는다는 건 본질적으로 환경결정론자라는 뜻이다. 환경결정론자들은 구조주의를 통해 세계를 해석했고, 지옥은 필연이 아니라는 희망을 생산해냈다. 이것은 하나의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어느쪽인지 대략 가늠이 잡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선의로 세계를 해석한다)-고 믿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노무현의 자결이 무위로 돌아간다면, 이 나라에서 정치운동을 통해 뭔가를 시도하기는 틀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뭐, 이미 그렇진 않은 것 같지만.

 

 

2010년 5월 27일 목요일

안희정, '수도권(서울) VS 지방' 프레임 가동 확인.

안희정, '수도권(서울) vs 지방' 프레임 가동 확인.

(2010년 5월 27일. 김미화 인터뷰로부터)

 

1.

차기 대선에서 진보가 승리하는 전략의 기초가 될 것이다.

노무현이 놓아두고 간 "진보의 미래"라는 난제의 해법으로, 그의 동지들이 들고 나온 이 전략이 반갑다.

 

온 곳과 갈 곳이 다른 수많은 길들이 서로 만나 교차되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완전한 원이 이데아에 불과한 것처럼, 완전한 평행선 또한 실재할 수는 없다.

이런 게 희망의 근거다.

 

 

2.

이번 선거는 "근대화-산업화 세대 vs 민주화 세대(386)"의 프레임으로 치러야 승산이 있다.

 

 

"저희는 산업화 세대, 부모님 세대가 21세기 대한민국을 향해서 준비한 세대입니다. 그 부모님 세대들이 못다 이뤘던 선진국의 꿈, 좋은 나라의 꿈을 저희 세대가 이제 이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이 미래를 향한 도전, 저 안희정의 도전입니다. 키워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적은 되도록 적게, 아군은 많게 전선을 긋는 쪽이 당연히 승산이 높다. 세대별 지지율 격차를 유심히 봐야 한다. 산업화에 뒤따른 고령화는 근대화 세대의 위기감을 낳아 그들을 결집시켰다. 따라서 그들을 다독이는 동시에, 386의 연대를 일으킬 수 있는 레토릭이 효과적인 것이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좋게 말하면 좋게 생각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 까닭이다.

 

유시민의 전략인 '386의 연대' 역시 그 사이즈 만큼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야 제법 그럴듯하게 구축되었다. 김진표가 저 승산 없는 싸움에 응해준 것을 보면, 그 또한 참 대인배인 모양이다. (혹은 그냥 얼간이던지.) 경선이 흥행에 실패하면 본선은 볼 것도 없는 것이 요즘 선거다. 장기적으로 봐서, '팬'과 '안티'의 규모는 항상 정비례한다. (따라서 노빠질 또한 안티 형성을 우려해 자제할 필요가 없다.)

 

중앙에서 유시민이, 지방에서 안희정이 짜들어 가는 이 거대한 프레임을 보라. 나는 그들 사이에 모종의 결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그러나 저들 역시 최선의 전략을 갖고 이번 전쟁에 임하고 있으니 주시해야 한다. 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동해야 한다. 만약 이번 지방선거에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겨우 승리한다면, 다음 대선이 정상적으로 치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저들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존재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나는 그런 정치가 우리에게 이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6월 2일 꼭 투표하십시오.

국민참여당 당원으로서, 참여당에 찍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굳이 노빠, 유빠들이 싫으시다면, 1번 말고 아무거나 일단 찍어만 주십시오.

파란색 1번은, 지금은 곤란하니 잠시만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2010년 5월 26일 수요일

이창동 칸 각본상 수상에 부쳐

우리에게도 '월드 클래스'의 인물이 제법 있는데, 알아보는 이는 적다.

 

세계를 걷는 이들의 보폭에 맞추긴 어려울지언정, 발목을 붙들진 말자.

 

세계와 함께 숨쉬고 세계와 함께 보는 이런 '큰사람'들을, 샘내어 따돌리고 끝내 쓰러뜨리고 마는 자들이 있다. 배금주의의 시대를 맞아 득세한 소인배들이다.

(<운명이다>가 자서전이라는 건 그저 정치적인 레토릭이다. <운명이다>는 위인전이다. 그의 마지막 선택 때문에 자서전의 형식을 빌어 입었을 뿐.)

 

사람 그릇의 크기는, 피와 아의 경계를 얼만큼한 범위에 설정하느냐로 알아볼 수 있다. 누구는 대기권을 울타리 삼아 대륙과 대륙 사이를 유유히 넘나드는데, 소인배들은 고작 손톱 만한 땅덩어리에 철조망을 치고 담벼락을 높이는 일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고 싶을까- 하긴, 그들로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그들에게 보이는 세상의 전부니까.

 

 

2010년 5월 25일 화요일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하는 법. 안희정.

처음으로 안희정의 연설을 보았다. 그는 먼 지역 사람인데다, 감옥을 드나들고, 또 그림자 안에 있던 사람이므로, 그의 연설을 자연스레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게 당연하다.

 

그는, 그가 딴지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슬픈 이유로 2인자의 노선을 택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은 기독교에 비유하자면 '십자가의 보혈'이 된다.

작년 5월 23일 아침까지만 해도 안희정에겐 미래가 없었다. 노무현이 몸을 던진 이유 중에는, 그의 앞길을 열어주려 한 의도가 분명히 포함된다.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노무현은 안희정의 책(<담금질>)이라도 팔아주려다 한번 크게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도지사 출마 연설에서 안희정은 "내가 노무현을 만들었다"고 선언했다. 이 또한 노무현이 인정한 바가 영상기록 증거로 남아 있다. 내가 참여정부의 노선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그들은 기록하고 또 공개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그래서 중요하다. 쥐가 쏠기 전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  

 

대놓고 자신의 장점을 자랑질 하는 것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건 (정치) 목숨을 건 도박과 같다. 진실로 한 점 숨겨둔 감춰진 일이 없는 사람만이 이 전략을 통해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이 한 점 부끄럽게 살기 쉬운가. 따라서 부끄러울 일 없이 살아온 삶이란, 일찍부터 삶을 형이상학적 가치에 따라 계획해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희정은 어려서부터 유별나게 조숙한 학생이었다. 비록 그 의기는 크게 한번 좌절되기도 한 모양이지만.

 

그 좌절을 통해 그는 1인자 대신 2인자의 길을 택했다. 충청도 사람 답다. 경상도에 의리가, 전라도에 기백이 있다면, 충청도에는 끈기가 있다. (경상도에는 87년 대선까지만 해도, "이번에는 김영삼이 하고, 다음엔 김대중을 밀어주자"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리고 80년 광주 이전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전라도에서도 김대중과 박빙을 이뤘다.)

 

이에 비해 은근하고 끈질긴 충청도인의 기질은 김종필이나 이회창과 같은 '최고의 2인자'를 여럿 탄생시켰다. 최고의 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1인자의 자질을 가진 이가 2인자의 위치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1인자의 자질을 가진 이라 할지라도, 대세가 따르지 않는데 무리하게 1인자의 위치를 탐내게 되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어쨌거나 결국 1인자의 자리를 거머쥐지 못한 이들 덕분에, 충청도는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안희정은 연설을 통해 지역감정을 대놓고 도발했다. 그는 당당하다. 그는 김대중과 노무현, 즉 전라도와 경상도의 두 대표선수를 합당한 댓가를 치르고 계승했다.

그는 참여정부 5년 내내 실업자 신세였고, 노무현 사후엔 민주당 잔류를 택했다. 그에게 민주당 잔류가 위험했던 까닭은, 노무현 살해의 종범들과 동침하는 것이 되므로 '골수노빠'로 불리는 분들의 적극적 비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극성맞은 분들의 타겟이 되면, 정치인생이 피곤해진다.

그는 이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들을 끝내 견뎌냈다. 그리고 이제 '지역 감정 해소'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대중과 노무현 공동의 이상'을 계승하기로 선언함로써 그는 이 골수노빠를 납득시켰다.

 

우리나라 정치엔 2인자가 성공적으로 1인자를 계승한 전례가 없다. 언제나 그들은 1인자에 대한 부정 위에 자신의 기초를 쌓으려다 무너졌다.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가 지금까지처럼 현 정부의 폭주를 관망하며 2인자의 역할을 소홀히 하다간 다른 2인자들의 전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2012년에는 안희정이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몸조심하셔야겠다. 알아볼 줄 아는 자가 저들에 있다면 지금부터 싹을 잘라버리려 할 것이다. 그를 지키려면 관심을 갖고 계속 지켜봐야 한다.

 

 

키워드 -

 

2인자 노선
2인자를 스스로 선택하고, 또 경험해본 사람

충청도 사람=말이 느리다.(어눌하다)
안희정, "충청도의 새 역사" 싸이즈 대박.

지역통합("김대중 노무현의 꿈 이어나가고 싶다는 것이 꿈")
2인자가 1인자를 승계하는 방법.
'진성노빠'들에게 민주당 잔류의 명분 명백히 설명.

자기 장점 대놓고 말하기. 당당함. 부끄러워 할 일이 없음.

"안희정이 누구야?"
정보 전파의 기회. = 컨텐츠가 있다면 입소문을 탄다.

서울 집값이 충청 발전(세종시)과 직결되는 이유 명백히 설명.
"봉급생활자의 집세(및 대출이자) 부담"
세종시는 이미 합의한 바가 있는 법안. ('절대 명분')

최초의 충청 출신 대통령 가능성
최초는 언제나 환영받는다.

말씨가 바뀌지 않은 사람. 말씨의 중요성.(무의식적인 인상비평을 좌우한다)

 

"386의 마지막 과제와 임무"
중앙권력에 대항하는 분권의 시대를 열어야


"전국 골고루 잘사는 대한민국"
골고루 잘사는=평등 강조=좌파적 시각을 자연스럽게 침투시킨다

 

세대론
근대화 세대 / 민주화 세대, 그리고 자유분방한 20대-상실의 세대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짧은 기록

 

종일 잔 비가 뿌렸지만 그래도 광장은 가득 채웠다.

 

2010년 5월 22일 토요일

전야

1.

최초 나의 참여 목적은, 진짜를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시선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잊은 채,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정말 이기고 싶다.

 

 

2.

대중심리 조작 전문가들의 기술이 필요한 시점에 그들이 일부라도 나선 모양이다. 다행이다. 정치는 많은 좋은 상품들이 적절한 마케팅의 기회를 얻지 못해 사라지고 마는 시장이다. 노무현이 죽음으로 독려한 덕분에 아마도, 전국 곳곳에서 좋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꽤나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물론 기회라고 생각하고 덤벼든 파리떼도 제법 있을 것이다마는 어쩔 수가 없다. 옥석을 모두 가려내기엔 상황이 급박하다.

 

 

3.

한나라당의 패배 만큼이나 노무현의 승리도 필요하다. 이는 같은 듯 미묘하게 다르다. 한나라당은 노무현의 죽음을 주도하거나 적어도 관망했다. 일이 일이니 만큼,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그 상황을 방조하거나 관망해서는 안 되었다. 따라서 얼마간 애꿎은 피해자가 되더라도 불평해선 곤란하다.

 

저들은 씻기 어려운 죄를 지었다. 이 죄를 보는 관점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을 보는 중세 유럽인의 시각과 닮았다. 600만을 잡아 죽일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번 죄를 지은 자들은 벌을 받아야 한다. 저들은 다시 나기 어려운 강한 영혼을 끝내 꺾었다. 벌을 받아야 한다. 혹시 이 징죄의 과정에 휘말려 다소간의 피해를 입는 이들도 감수해야 한다. 모두가 죄인이다.(신해철 씨는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나. 당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직도 조용히 있으면 안 되지.) 우리에겐 시끄럽게 떠들 권리가 있다.

 

 

4.

노무현의 승리는, 사람에겐 언제나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파괴는 언제나 또다른 창조의 시작이지만, 그 파괴와 창조 사이의 시간차는 작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희망은 창조의 동력이 된다.

내겐 이번 선거가 그를 해친 자들을 벌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계획들을 좀더 진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있다. 그는 계획을 길게 잡는 사람이었다. 많은 계획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상당 부분 복원해내고 또 개선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내 힘은 오직 1/n 뿐이다. 이걸 잊으면 조급해지고 오만해진다. 판단을 그르친다. 판단력을 잃은 시선으로 사물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가 헛죽었을 리 없다.

 

 

2010년 5월 7일 금요일

...

스무 살 대학시절, 군에서 막 돌아온 한 선배는 술만 먹으면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푸념하듯 말하곤 했다. "삶은 왜 이리도 남루하냐." 서른셋 먹은 요즘, 이 문장이 어른거린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면, 높이서 내려다보면, 흘낏 보고 지나칠 수만 있으면, 삶은 결이 참 곱다.

 

2010년 4월 26일 월요일

판도라의 상자

1.

'판도라의 상자'라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판도라라는 처자가 있었는데, 신이 그녀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 줬단다. 절대로, 절대로 열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상자를 주면서 열지 말라니 무슨 심보였는지 짐작은 되지 않지만, 하지 말란 짓은 원래 더 하고 싶은 법. 그녀는 결국 이 상자를 열어젖혔고, 상자 안에서는 질병과 고통, 증오, 분노와 같은 온갖 못된 것들이 잔뜩 튀어나와 인간 세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다시 닫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신의 명령을 어긴데다 대형사고까지 쳐버렸으니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에게 상자 속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단다. 기왕 배린 몸, 판도라가 상자를 다시 열어보니 그때 나온 게 바로 '희망'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악의 근원에 대한 신화로, 흔히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 저주받은 상자에 과연 좋은 게 하나라도 들어 있었을까. '희망 고문'이라는 신조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저주로써 작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2.

인간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의견이 판이한 것 만큼이나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러하다. 나는 오랜 생각 끝에 노무현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인간형에 닿아 있다고 판단했는데, 말인즉 내가 그를 '군자(君子)'의 한 전범으로 삼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끝없이 회의하던 사람으로, 회의를 통해 학습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며, 그의 두드러진 용기는 폭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인간애에서 비롯한 것이었기에 절제가 있었다.

 

운나쁜 타인을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 틀린 것에 성낼 줄 아는 수오지심, 자신의 행운에 교만해지지 않는 사양지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남을 옳게 구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옛 성현들이 군자의 조건으로 세운 네 덕(인,의,예,지)을 그는 모두 갖추었다. 군자란, 임금된 자다.

 

 

3.

공화주의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보다 유별나게 뛰어날 순 없다는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에 선악을 묻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 이익의 평균값이 떠도는 어딘가에서 최선 아닌 차선이나마 건져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나는 순혈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라기 보단, 본질적으로 왕당파에 가깝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래도 그나마 그것이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박지만이나 전재국, 전재용이 통치하는 '대한왕국'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덕분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행운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였다. 자본이 곧 권력인 이 시대를 고대 로마 시대에 비유하자면 저 자본가와 현대판 귀족들은 집정관과 원로원이며, 평민에 의해 선출되는 권력은 호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시기에 마침 좋은 호민관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흔치 않다.

언제나 그래왔듯 호민관은 집정관에 비해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떠났다. 왠일인지 어떤 평민들은 도무지, 자신이 평민임을 자각하질 못하는 까닭이다.

 

 

4.

그래서 어쩌면, 노무현의 가장 큰 죄악은 평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는 어쩌면 확률 범위 안의 작은 파동이었을 뿐인데 어떤 전조로 오독된 것이었다면.

 

하여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나는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그의 이름 아래 희망을 건다. 조선 반도에 역사란 것이 시작된 반 만년 이래 처음 스스로 곡기를 끊은 임금이 이곳을 떠난지 단 1년 만에 벌써 그날의 황망함을 다 잊었다고 한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슬픔과 노여움

 

DAUM을 비롯한 포털의 메인화면에서 '盧'자가 잘 보이지 않게 된 지 꽤 되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임에도, 가슴 한 켠이 싸하다. 이제 곧 5월, 그날이 오는데, 사람들은 다시 기억해낼 수 있을까.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아이들을 전쟁터로 데리고 나온 게 잘못이야"

 

이 비디오는 이 공격에 의해 살해되고 상처 입은 무고한 시민, 기자, 어린이들에게 바쳐진 것입니다.

 


이 비디오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웹사이트인 wikileak.org(주로 내부고발자 동영상)에서 입수되었습니다.

 

이는 당신의 정부와 군대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돈을 갖고 벌인 짓입니다.

 

이 비디오는 그 내용-범죄와 살인-에도 불구하고, 주류 미디어로부터 무시 당했습니다.

이 내용을 TV나 신문지상에서 보리라 기대하지 마세요. 깨어나십시오.

 


2010년 4월 5일, 뉴 바그다드(이라크)의 이라크인 지역에서 미군이 로이터 통신(세계 최대 통신사) 기자 두 명을 포함해 열두 명이 넘는 사람들을 도륙하는 장면이 담긴 군사기밀 비디오가 WikiLeaks에 공개되었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사건 직후부터 정보공개법에 의거, 해당 비디오를 입수하고자 노력해왔으나 그동안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 비디오는 아파치 헬리콥터의 기관총 거치대에서 촬영된 것으로, 무고한 시민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 이 영상은 미국 시민에게 호소하고자 제작된 거지만, 천안함 사건과 관련, 우리에게도 공개를 요구해야 할 군사기밀들이 제법 있다는 점에서, 남의 일로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없다.

 

 

2010년 4월 6일 화요일

Off the record

확실히 '현장'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off the record'를 요청받고 있을 것이다. '오프더레코드'란, 취재원-이를테면 정치인이나 거물 기업인 등-과의 대화 또는 인터뷰 중에 행하는, 결코 그 내용을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가리킨다. 아마도 특정 유명인사의 담당이 되어 수 년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덧 낯도 트고 말도 꽤나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실은 서로가 서로를 꼴도 보기 싫어할지라도, 어느새 슬금슬금 '친분'이란 게 쌓일 수밖에 없다. 개중엔 더러 사적인 안부가 포함될 것이고, 또 개중엔 가쉽 담당기자에게라면 귀가 번쩍 뜨일 만한 '껀수'가 섞여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쉽거리'는 대체로 정치부나 사회부 기자에겐 그닥 쓸 만한 기사거리가 되지 못할 수 있다. 이럴 때의 오프더레코드는 암묵적인 합의 하에 이루어진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말하지 않아도, 알지?" 이렇게 그들은 비밀을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비밀을 공유하는 것은 관계를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또 특별한 관계만이 특별한 비밀을 공유할 수 있게 한다. 비밀이 특별한 것일수록 관계 또한 특별해진다.

 

2010년 3월 21일 일요일

처세의 달인

 

돌아가는 분위기 보아하니 이번 지방선거에 한나라당은 잘해야 석패, 여차하면 참패다. 2012년을 위한 준비에 진작 돌입한 박근혜로선 굳이 이번 선거에 개입해 지지율 까먹는 모험흘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박에겐, 이번 선거를 크게 지든 작게 지든, MB계파에 그 책임을 물으며 기세등등 복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다.

 

'삽질MB 대신 쿠데타공주'라니, 왠 미친 소린가 싶겠지만 그녀를 '대안'이라고 믿는 얼간이들이 의외로 많다... 공주님 머리 속에서 이런 유연한 처세가 나올리는 도무지 없으니, 전략 참모가 누군진 몰라도 대단한 넘임은 틀림이 없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사형제 존폐론 단상

요즘 일각에선 사실상 폐지되었던 사형제를 다시 집행하자는 얘기로 시끄러운 모양이다. '살의'를 그토록 쉽사리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의 단순함이 두렵다.

 

사형제도에 찬성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 사람은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뜻이다. 이 '어떤 경우'는 사형제나 정당방위와 같이, 법률에 의거함으로써 얼마간 공정성을 보장받긴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100%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1)

 

국가의 할 일이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에 한정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잠적한 범죄자를 찾아낸다던가, 가난 구제(*2)와 같은 일들이다. 우리가 군대나 전쟁을 통해서 배운 바와 같이, 살인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굳이 국가가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꼬리가 몸통보다 기네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정당방위

'을자도' 115mm 은장도, 장추남 @knifegallery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정당방위란 말은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약육강식이 무슨 지고의 원리인 줄로 아는 이 체제의 다윈주의 해석은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만, 맞다고 한들 약자의 투정을 들어줄 필요가 있는가.

소유권이 보편윤리보다 우선시되는 체제라면 생존권도 소유권에 양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리 그것이 클리셰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들 저 '아프리카 기아 난민'에 대해 우리는 무죄하지 않음이 분명한데 아무도 기소되지 않고 있다. 허나 커피 농장의 인부들이 원두에 독을 섞지 않음에 누군가는 감사해야 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가끔 쇠스랑이나 들고 일어설 뿐이니.

 

자살률은 세계에서 수위를 다투는데 범죄율은 그 이하라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나약해 빠졌다는 뜻이다. (흔히 자살은 나약한 정신의 한 증거로 다뤄진다.) 나를 죽일 수 있는 자가 남도 죽일 수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 세계에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다.

 

나는 미국 민주당의 총기 소지 제한 정책을 지지하지만, 그건 총이란 개인이 통제하기엔 너무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이지 사람이 총을 가질 권리가 없어서는 아니다.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Avatar 명대사 하나

 

 

... Sometimes your whole life boils down to one insane move.

때로, 전 생애가 단 하나의 미친 짓으로 응축되는 순간이 온다.

 

어떤 미친 열정으로 끓어 넘치던 삶이라면, boils down을 '졸아 붙는다'고 옮겨도 뜻은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강물처럼

2009년 말 즈음, 그러니까 2009년 중순에 닥친 비극에 따른 격정이 어느정도 가신 어느 날, 한 네티즌의 제안으로 이 '시민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당연하게도, 그날의 슬픔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고, 따라서 그 슬픔은, 비록 격정은 담뿍 담겼으되 때로 얼마간 조악한 형태로 배출되기도 했다. 그릴 줄 아는 자는 그리고 노래할 줄 아는 자는 노래한 것인데, 허탈함과, 때로 분노가 너무 컸던 탓으로, 가신 이에 대한 사랑은 다소 과장되기도 하고, 가끔은 나이브하게 드러나기도 한 것이다.

 

이를 못내 아쉬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강물처럼 가사

 

(후렴구를 따라 불러보려다가 당황했다. 주책맞게도 목이 메어 제대로 불러지지가 않는 것이다. 내가 미친 노빠, 노무현 광신도인 까닭일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가사를 쓸 수 있는 이가 가사를 쓰고, 노래할 수 있는 이들이 노래했다. 이를 모둠 할 줄 아는 이가 모두어, 영상을 편집할 줄 아는 이가 마침내 만들어냈다.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듣고, 퍼나를 수 있는 이들이 퍼나를 것이다.

 

가사와 멜로디를 외워둬야겠다. 오는 5월 23일에는 여럿이 함께 노래하고 싶을 일이 많을 것이다. 대신 표현해주는 이들이 있어 감사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6월 2일 밤 그들과 함께 웃을 것이다.

 

 

사족

2010년 3월 4일 목요일

[쪼가리뷰] 시가테라

(스포일러 있음.)

 

 

 

1. 소년 판타지

<시가테라>는 찌질이 루저가 예쁜 여자애랑 떡치는 소년 판타지물이다. 6권의 단촐한 구성으로, 3권의 첫경험 장면이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다. 누군들 잊을 수 있으랴 그 순간.*1

`나구모(히로인)... 다 보여...`

`오기노(주인공)군도 다 보여...` *2

 

짜증나는 부분은 (아마도 한국어판에서만) `가장 중요한 장면`-나체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에 팬티와 브라를 그려 입힘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망쳐버렸다는 점이다. 빌어먹을 15금. 다소 외설적인 묘사라도 할라치면 블로그에라도 비닐캡을 씌울 기세. 자유 없는 곳에 창조 없다. 정부는 각성하라~

 

 

2. 후루야 미노루.

저 유명한 <이나중 탁구부>*2의 작가.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고 계획도 당분간 없지만, 오래전 대강 훑어본 것만으로도 작품의 위대한 `병맛*3 포쓰`를 느껴볼 수 있었다. <시가테라>는 이런 `병맛` 전문 작가 후루야의 진지한 극화라는 이유로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그답게, 아마도 `만화 역사상 가장 찌질하게 진지한 주인공` 상을 받아도 적당할 캐릭터 메이킹은 여전했다. 찌질이가 줄곧 바보짓만 하는 `진지하지 않은 개그만화`와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성장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만화의 장르는 `청소년 성장 드라마`로 분류할 수 있다.

<이나중 탁구부>, 이런 만화다.

 

3. 사춘기

일본 만화-를 비롯한 각국의 온갖 대중 예술작품들-에는 이 시기를 다룬 작품이 많다. 이 시기를 거치는 중인 독자들이 대중문화의 주 소비계층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컨텐츠 생산자들의 연령대는 천차만별이 아닌가. 차라리 이 시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 작가든 독자든 그것에 `고착`되게끔 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흔히 `질풍노도`에 비유되는 이 시기는, 21세기라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4. 청소년 지도와 관련-

불량소년 타니와키는 귀를 잘리고 돌아온 여름방학의 결과로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 과정은 극히 단촐하게 묘사될 뿐이지만, 또한 극히 현실적이다.

 

타니와키(주인공 오기노의 상상 속 이미지)

 

`참고로 타니와키는 그 사건에서 약 한 달 후, 집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퇴학 처분을 받았다. 오랜만에 등교한 문제아가 귀가 잘려져 있었으니, 학교 측도 큰일이다 싶어 녀석의 동네까지 가서 빨리 대책을 세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야만과 문명 사이를 거치고 있는 우리라면, 아무래도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파악하려 했을 것이다. `솔직하게 모두 말할 때까지 너 집에 못 가.` 이게 고문이다. 예전엔(혹은 여전히) 이 과정에 흔히 `사랑의 매`가 동원되곤 했다...

아니다. 타니와키는 이런 상황이 오기도 전에 진작 퇴학을 당해 소년원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덜 독한 인간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며, 훨씬 더 무서운 범죄를 더 가볍게 해치우는, 그런 종류의 인간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우리의 학교 역시 너무도 일찍 아이를 포기하곤 한다.

 

 

5.

똥 무더기를 뒤져 꽃씨를 찾아내는 작업은 상찬받아 마땅하다. 그 안은 불결하고 추악하기 떄문에라도 보통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것을 헤집어 보는 데는 많은 용기와, 낙관적 전망이 필요하다. 나는 그 낙관에 전적으로 동의할 뿐더러, 그 용기에는 존경심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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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일 수요일

쉼표

몰입의 달인들은 쉼표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모든 몰입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또한 쉼표가 필요하다.

2010년 3월 2일 화요일

몰입!

 

숨은 잠재력을 일깨우고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지침서
이 책의 저자 황농문 교수는 30년 가까이 공학연구에 몸담아 온 공학자며 ‘하전된 나노 입자 이론’으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한 과학자다. 몰입이 잠재된 우리의 두뇌 능력을 일깨워 능력을 극대화하고 삶의 만족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방법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왜 우리가 몰입적 사고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몰입으로 천재성을 끄집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몰입의 개념과 필요성을 새로운 시각에서 정의하고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몰입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준다. ‘생각’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몰입은 확실히 눈에 띄는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불안과 우울을 고질병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몰입적 사고’를 가르쳐주는 충실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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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만난 행복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미치도록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SBS 스페셜 <몰입>을 준비하면서 '몰입의 고수' 황농문 교수를 만나, '몰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하고, 마침내는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사흘간의 짧은 몰입으로 스스로 뉴턴의 미분 문제를 풀어내고 활짝 웃는 중학생들의 싱그러운 얼굴도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잡담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으로 보석 같은 삶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가 쓰레기통에 던져 놓았던 먼지 낀 시간들을 순도 100%의 황금빛 삶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 이승주(SBS스페셜 <몰입> 기획 부장)

- YES24 도서 정보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책 자체는 그렇게까지 '몰입'할 만하지 않다. 하지만 운좋게도 저자인 황농문 교수의 강연을 직접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강단에 더 익숙하신 탓인지, 책보다 강연 쪽이 열 배는 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얼핏 '광기어린-'으로 묘사하고플 만큼의 열정적인 강연은 당시 컨퍼런스에 참여한 청중 대부분을 완전히 몰입시켰다. 책은 차라리 그런 강연의 학술적 정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을 '한 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몰입은 지적 존재인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경험이다.

2) 몰입은 인위적으로 유도될 수 있다.

 

자, 이제 '몰입'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책을 보시라.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만 년짜린 없어

0.

사랑이, 대략 2년에 걸쳐 벌어지는 생리현상의 일종임은 분명하다. 이는, 어떻게 초극될 수 있을까.

 

 

1.

여체는, 극히 섬세한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나 섬세한지, 30억의 시리얼 넘버가 있다면 30억 종의 작동 방식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역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절대로 도중 '왓더헬암두잉히야?'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언제나 절대로 항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다. 때로 난폭함을 동원한 생략은 '수컷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상의 '암컷성'을 극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 법적 윤리적 책임이겠지만...) SM플레이와 같은 것들은 이러한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요소가 이상적인 무드(조명의 밝기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교환된 감정의 선율과 같은 것들까지) 아래에서 이상적으로 배열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예지란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또한 환경 역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게 보통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다. 말하자면, 이제 막 사랑에 빠져 서로를 열어보려 하는 두 사람의 욕망의 강도는, 앞으로 습득해나갈 서로에 대한 정보량과 정확히 반비례하게 된다. 누구라도, 줄줄이 암송할 수 있는 책을 다시 읽고 싶진 않은 것이다.

 

 

1.

'나'라는 존재가 나의 육체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다음에야, '나를 안다는 것'에는 일정 비율 이상, '나의 몸을 안다는 의미'가 포함되며, 마찬가지로 '나의 몸을 아는 남'은 분명히 연애 또는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적인 비밀은, 많은 연인들이 가장 흔하게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1.

물리력이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있다. 망치를 집어들어 정수리 쯤을 힘껏 내리치면 된다. 혹, 누군가의 영혼을 쓰다듬어주고 싶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영혼을 쓰다듬어주었으면 하고 느낀다면, 일단 누군가에게 머리를 내어맡길 일이다.

 

대체로 부모들이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부모를 닮은 대상'에게서 안식을 구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처럼 자기 표현에 쓸데없이 엄격한 '때곳'에서는, 대상의 부모에게서 좋은 관계란 것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서로를 더 많이 더 자주 쓰다듬어주고, 서로에 대해 더 깊이 넓게 이해할수록 사람은 더 오래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둘 중 하나가 죽어 사라질 때까지, 혹은 둘 다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이를 영원한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안고 싶고, 당신이 다른 남성에게 당신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함으로써 행복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기를 또한 바람과 동시에, 그 곁에 내가 항상 함께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당신은 내가 최근 느끼는 많은 행복감의 원인이며, 당신 역시 나로 인해 잦은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상태를 일컫는 말로 사랑 말고 다른 것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욕망? 욕망은 사랑의 상위 개념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비롯한, 때로 숭고하게 여겨지는 많은 사랑들 또한 서로 대상과 형식을 달리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집착? 사전은 집착을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으로 정의한다. 이 경우 사랑으로 추정되고 있는 나의 감정상태는 '다소 집착하는 사랑'으로 묘사될 수 있다. 즉 집착은 사랑을 수식하는 말이지, 사랑 아닌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경중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모든 사랑은 일종의 집착이다-라고도 말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고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꽤나 열렬히 욕망하며 제법 집착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이나.

 

 

허나 사랑의 약속은 물 위에 쓴다고 했다. 언제가 될까. 당신과 나의 눈앞에 드리워진 콩깍지의 커튼을 들어 내는 날은. 키스하며 입냄새를 느끼게 되고, 서로에 대한 신비감에서 비롯했던 존경심이 여지없이 벌거벗게 되는 그날. 우리는 이미 여러번 서로의 알몸을 보았고 앞으로도 수없이 보아나갈 테지만, 진정으로 발가벗은 영혼을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약속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약속을 걸고자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준 것만으로도 앞으로 당신이 보여주게 될, 당신은 스스로 추하게 여길지도 모를 당신의 모습을, 무조건적인 선의와 함께 해석해나갈 것이다. 설사 우리의 관계가 보편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닥칠지라도 이 약속은 유효할 것이며, 이는 모든 상황을 야기할 책임이 당신보다는 내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포르노 단상

 

포르노물은 그 자체로도 꽤 즐기는 편이지만, 그럴듯한 핑계도 따로 있다.

 

핑계인즉슨, 어떻게 하면 변화무쌍한 인간의 성욕을, 단 하나의 이성하고만 평생토록 섹스하도록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어쩌면 포르노 제작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일본의... ... 또 어쩌면 이 질문은 주로 남성들에게 주어진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제9계명을 한 번도 어겨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여기서 제외된다.

 

욕망은 해소되어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되곤 한다. 이는 건전하지 않다.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문명은 우리의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발전해왔다. 문명은 더욱 세련되어질 수 있으며, 이는 모든 욕망의 건전한 발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 건전함에 대한 합의야말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헌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 된다. 법은 과연 "최소한의 도덕"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망할 법이 헌법을 거슬러가며 포르노를 금지하고 있으니... 이런 뭣같은 경우가 다 있나. 아동 포르노나, 미성년자 매매춘과 같은 문제는 경제정책의 과제지 윤리로 따져들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 생명이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허용된다.

 

2010년 2월 16일 화요일

What a freak?

번뇌가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욕망이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욕망을 죄의식과 연결시킴으로써 욕망의 생성과 발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죄없는 욕망 앞에서라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 혹은 통제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것으로 예측되는 어떤 욕망들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팔을 베고 잠들었다 문득 깨어났는데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대체로, 무심코 저지른 사소한 행동-팔을 베고 잠들었는데-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실-'팔 병신'이 됐다-을 일으키곤 한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사람이란 아무래도, 저항할 근거를 찾게 된다. 공포가 절실할수록 그 근거는 처절한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인간의 행동을 촉발하는 두 가지 동기로 욕망과 공포를 들기도 했다. 욕망이 능동, 공포가 피동이다.)

나는 사랑을, 문명화된 양식의 소유욕과 성욕으로 정의하고 있다. 소유욕은 사랑의 인간적인 면, 성욕은 동물적인 면이다. 이 둘은 때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한 것 같다. 부끄럽게도.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친구2

친구라는 말로부터 내가 두 번째로 떠올리는 인물은 L군이다. 이 친구가 두 번째가 된 까닭은 늦게 만난 탓도 있지만, 이 자의 성향이 어떤 면에 대해선 나와 완전한 대극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그 까닭을 같은 기질이 다른 환경 속에 자라난 탓 아니겠는가- 추측한다.) 이 친구와 교류를 시작할 무렵, 나는 그를 "적(敵)"이라 부르곤 했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나라에는 양호라는 장수가,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꽤나 끗발 날리는 장수들이었다곤 하는데 그래봤자, 말하자면 대하 드라마 삼국지 제작 후기 쯤에나 잠깐 등장하는 식이니 별 비중은 없는 이름들이다. 아무튼 이 양반들이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하니, 이런 고사가 '호항지교'라는 말로 전한다.

 

272년, ... 하루는 양호와 육항이 같은 시간대에 사냥을 나갔는데 양호는 오나라 군대의 구역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냥을 하였고 자신의 구역 안에서 오나라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짐승은 모두 오나라에 돌려주었다. 이에 약간 오기가 생긴 육항은 사냥감을 돌려주러 온 병사에게 양호가 술을 좋아하는지 물었으며 병사가 "술은 잘 마시지 못하시지만 좋은 술이면 아주 잘 드십니다"라고 말하였고 육항은 웃으며 "좋은 술이 있으니 사냥감의 답례로 장군에게 바치거라"하며 술을 한 병 내주었고 병사가 그 술을 양호에게 바치자 양호는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술을 한 병 모두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수들은 "적군의 장수가 보내온 술에 뭐가 들어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함부로 드셔도 됩니까?"라며 걱정했으나 양호는 "육항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대답하였고 하루는 육항이 병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접한 양호는 병사에게 시켜서 육항에게 좋은 약을 지어 보내도록 하였다. 육항은 양호가 보낸 약을 보고 "이 자가 내가 보낸 술값을 보내왔구나"라며 약을 먹었는데 오나라 장수들도 양호의 장수들처럼 약을 먹는 것을 말렸으나 육항은 개의치 않고 약을 먹고 쾌차하였다.
...
274년, 다시 병으로 누운 육항은 죽기 전 서릉의 중요성을 손호(오나라 왕)에게 알려 서릉의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고 긴 상소문을 올렸으나 손호는 이를 무시하였고 육항은 4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육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나라를 멸할 수 없다며 ... 오나라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 사마염(위나라 왕)은 양호가 죽은 뒤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 오나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 이로써 약 100년간 이어진 삼국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내용출처)

 

적이란 내게 이런 의미이다. 어쩌면 이 친구 덕분에 나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품기 이전에, 한 번 정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쩐 일인지 요즘엔 좀 낙심한 듯하다. 안빈낙도할 타입이 아닌데 그러고 있으니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이봐, 아직은 우리 한 번 더 실패해도 괜찮아. 불혹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고독이라는 것이, 이제와 새삼 더 두려워해야 할 무엇은 아니지 않아?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후회에 대하여

왠지 근래에 알게 되는 이들은 "난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후회 같은 걸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모르겠으나, '난 절대로 후회한 적 없어'로 보이는 경우엔 좀 난감하다. 후회가 무슨 큰 죄악인양 할 때도 있고, 외려 너무 큰 후회할 거리가 있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후회는 바람직한 것이다. 후회란 장차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다짐이다. 같은 상황이란 게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라 문제지, 선택의 기회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다른 선택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같은 선택을 할 만하다면 애당초 후회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내게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는 '행복한 사람' 또는 '행복을 가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이 정도면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아?"라든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와 같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까.

 

효도관광 후기

 

사반세기(四半世期)만의 쾌거를 이뤘다.

SF도 싫고, 우주선도 싫고, 외계인도 싫고, 일단 춥고 멀리 가기 귀찮아 싫으시다던 근엄한 울 아버지,

객석으로 날아 든 CS-40 최루탄 깡통에 움찔! 하셨다.

(다른 모든 어르신들과 함께. 우연찮게도 유난히 많더라.)

 

움찔!은 몰입의 증거다.

몰입하실 수 있었으면 됐다. 몰입할 수 있으면 된다. 해서, 감상은 따로 여쭙지 않았다.

 

다음 대선엔 유시민에 투표하실 확률이 1%쯤 상승했다.

 

2010년 2월 9일 화요일

결국 정치

돈이 아니라 권력이다. 메뉴판을 들고 내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권력. 사랑하지 않는 고객님에게 사랑을 고백케 하는 권력. 돈은 매우 합리적으로 고안된 권력의 계량 단위이다. 즉 돈은 권력의 교환가치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다.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게 아니라 권력에 의존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권력은 추구해볼 만한 가치이다.

마키아벨리가 선의의 권력자를 위해 대중을 조작하는 법을 고안했다면, 이제는 대중에서 시민으로 각성한 하나하나 스스로가 주변의 소수를 조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조작'은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작이 나쁜 게 아니라 오도된 선의가 나쁜 것이다. 설득할 수 없다면 조작과 선동이라도 해야 한다.

응?

약속은 어쩌면 남자를 위한 것. 몇 시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내가 존재하리란 약속. 확정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전망. 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 그리고 공포. 낯선 잠자리 같은 것들. 지켜야 할 소중함. 가족, 연인, 사랑. 결국 사랑. 사랑의-

2010년 2월 6일 토요일

착한 척

 

나는 언젠가부터 대놓고 착한 척을 하게 되었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잘난 척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착한 척이라도 하게 된 모양이다. 잘나고 싶은 거야 인지상정이지만, 내 경우엔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얼마나 잘난 척을 좋아하는지, 무엇 하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한 구멍만 파는 끈기가 부족했고, 결국 뭐 하나 잘난 구석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잘난 척은 사람들이 통 받아주질 않고, 아 젠장, 착한 척이라면 좀 더 쉽겠거니 생각한 게다. 좋아. 착한 척을 하자. 음... 근데 뭐가 착한 거지?

착한 게 뭔지를 알아야 무슨 척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과연 무엇이 착한 것인가 곰곰 생각해보게 된 거다.

 

이런저런 생각의 과정이 있었지만 귀찮으니 과감히 생략하고, 노무현이 바로 착한 사람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런저런 상황 아래서 노무현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기준 삼아 흉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모든 상황에서 그와 같은(같을 거라고 추정되는) 선택을 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쯤은 착한 척하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 진작 되어 있었겠지. 나는 고해할 수 없는 죄를 많이 지었고, 앞으로 죄가 될 지 모를 선택들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착한 척일 뿐이다.

 

2010년 2월 4일 목요일

게임 이야기

 

드디어 리치킹이 쓰러진 모양이다. 관련기사

 

유출된 엔딩 동영상을 보니 컴백의 욕구가 용솟음친다. (아서라... ㄷㄷㄷ)

한국어 더빙 이전에 먼저 유출되었던 대사를 살펴 보니, 더빙이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진 않다.

 

다른 모든 생명을 대신해 영원한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려 한 무모한 영웅들의 이야기...

이는 십자가에 못박혀 원죄를 대속했다는 어느 신의 아들 전설과 같은 모티브가 아닌가.

그러고보면 디아블로II의 탈'라샤의 경우에도 그렇고, 블리자드 게임의 영웅 이야기는 뭔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맛이 있다.

 

탈'라샤, 적당한 팬아트가 없어 직접... -,.ㅡ;

 

 

독도는 우리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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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67.212.174.244


 

 

어여쁜 아키바 리에짜응이 독도 관련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일본인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넘도 참... 놈이다. 꽤나 새디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이건 말하자면 개신교도한테, A.D.원년에 중동 어딘가에서 태어나 서른 해 남짓 살다 간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라는 자가 신이냐 인간이냐 묻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도 무슬림 한 가운데서.

 

대체 어찌들 '독도는 100.000...% 우리 땅'이라고 확신하고들 사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내 경우에는 노통의 확고한 권리선언①에 힘입어 '독도가 백만 년 전에 누구에게 속했거나 말거나, 당장은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정도로 정리해두었지만, 이는 사실의 판단이라기 보단 가치의 선택이다. 권리라는 것은 사실판단에 따라 도출되는 게 아니라 가치선택에 따라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관찰자의 기록 없이 성립하지 않고, 관찰자는 그 포지션에 따라 관찰 내용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② 따라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두 관찰자의 기록은 당연히 서로 다르게 쓰여지며,③ 따라서 아키바 리에 양의 믿음과 나의 믿음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나는 '적진 한 가운데'서 민감한 사안을 자극한 그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우리 한국인이란 별달리 애국자연하지 않는 이들조차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하는 게 사실이다. 국수주의는 결국 파시즘과 하나로 흐르는 것이므로 지양되는 편이 옳다.

 

물론 리에 양의 이번 발언에 3.1절에 방영된다는 TV극의 흥행을 노린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혐의를 씌워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한들 나의 지지를 흔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의 도리에서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마케팅의 방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번 사건(?)이 사람들로 하여금 저 노무현의 명연설을 한 번쯤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 참에 리에짜응도 한 번...

 

 

사족


 


 

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친구 1

내겐 정치를 시키고 싶은 벗이 하나 있다.

어떤 의미에선 내게 단 하나뿐인 이 친구가 최초 사학과를 지원했던 것은 어쩌면 청소년기 나와의 교류에서 조금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도무지 학자 타입이 아닌 녀석이 사학과를 지원했다 했을 때는 역시 납득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녀석은 정치외교학과로 학적을 옮겼고,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졸업을 했다. 정외과라면 납득할 수 있다. 정확히 뭘 배우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에겐 리더십이 있었다. 항상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무리를 이끌었다. 대체로 선생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그들의 적과도 원만히 지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항상 유지했다. 녀석이 학생회장이니 반장 부반장 따위를 별로 하지 않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녀석에게는 의로운 구석이 있었다. 바로 내가 녀석에게 반한 부분이다. 물론 오늘날의 왕따현상이나 '이지메'의 원류라 할 따돌림이 우리 시절에도 있었지만, 녀석은 그런 아이들에게 다소 짖궃게 굴기는 할지언정, 누구도 무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녀석의 무리 안에 끼어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에겐 용기가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나는 스스로를 비겁한 쪽으로 분류하는 편인데, 그것은 내가 나서야 할 때 침묵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녀석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저가 알아서 나섰고, 누군가가 떠맡기면 피하지 않고 맞섰다.

 

 

녀석에게 생은, 날것 그대로의 것이었을 것이다. 낡은 책 속의 늙은 문자가 아닌, 펄떡이는 삶 속에서 녀석은 녀석의 길을 찾았다. 녀석은 지금 빛나는 사람들을 빛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녀석은 내게 전화를 걸어 푸념같은 말들을 한아름 쏟아놓고선 내 구름 잡는 소리에 잔뜩 고개를 주억거리고 돌아가곤 하는데, 여전히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녀석은 자신이 그리던 길 위에서 얼마간 비껴나 있는 듯하다. 충분히 치열하게 살지 못한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시련과 권태가 그에게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요즘 녀석과 전화를 맺을 때는, 어떻게든 휴가를 내 적어도 일주일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충고하곤 한다. 왠지 녀석은 굵어져가는 허리와 반대로 점점 메말라 가는 느낌이다. (점점 바싹 말라가는 내가 이런 얘길 했다는 걸 알면 녀석은 피식 웃을 테지만) 지난 십 수년간 쉴새없이 퍼올린 네 안의 우물이, 드디어 이제 바닥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는 재능이나 그릇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청춘이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확신하건대 최근 몇년간 자네는 단 몇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아바타 옹호하기도 지친다 정말

"내가 이르케 날아와써. 이게 너야. 내가 이르케 틀어써. 바람 느껴져써. 나 되게 세게 틀어따구."
"응응. 나도 급하게 날개를 굽혔어(bank)."
 
 
내가 만약
전략핵무기를 포함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에 명령을 내릴 어느 한 사람을 선발할 권리를 가졌음에도
가장 높은 문맹률을 자랑하는 어느 백인 집단을
문명인답게 계몽할 목적으로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티끌 만큼의 더함도 뺌도 없이 딱 아바타처럼 만들 거다.

 

그리고 또한 제임스 카메론과 똑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어

혹시라도 뭔가 인류에 기여하고 싶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별로 없을 거라고도 나는 확신한다.

 

지구라는 요람에 60억의 인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지구는 언제나 제몸에 엉겨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될만큼의 먹을 것을 내줘왔다. 잘못은 항상 나눠먹는 방식에 있었지 지구에 있지 않았다.

 

컨셉아트 중 하나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일기는 일기장에

오래 전 별생각없이 스크랩해두었던 동영상을 보고 잠시 또 운다.
병신짓이지만 부끄럽지 않다. 언젠가 나는 또 이 글을 보고 다시 오늘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또 얼마간 잊었다.
별 일 없이도 기억은 조금씩 좀먹는다.
나만은 잊지 않기로 했었다.
이렇게 잊어갈 지도 모른다고, 조금 더 울기도 했다.

무심코 클릭한 동영상이 다행스럽다. 나는 아직 울 수 있다.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2010년 1월 26일 화요일

디씨 압갤 정모 후기

생판 모르는 고딩이들이랑 정모를 했다. 정확히 말해보자면 현역 고딩 하나, 막 수능 친 고딩 하나, 3년 전에 수능 친 고딩 하나. 본인들은 각기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를 10여년 전에 지나친 나로서는 다 거기서 거기다. 나를 돌아봐도 그렇고.

나이 먹으면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다.

 

근 보름 전부터 영화 <아바타>에 푹 빠져 있었다. 영상미도 영상미지만, 제임스 카메론이 4억 달러나 들여서 이런 착한 영화를 만들어준 것이 고마워서라도 다시 볼 때마다 먹먹했다. 첨단 중에서도 최첨단 문명의 힘을 빌려 만든 반문명 영화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건 기분 좋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통 열광하는 이가 없기에, 꾸역꾸역 대한민국 '잉여'의 총본산 '디씨'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까 벌써부터 '아바타 갤러리'가 만들어져 있다. 게시물 '리젠 속도(인터넷 게시판에서 글 따위가 여러 사용자에 의해 등록되는 양)'도 만만치 않은 것이 꽤나 활성화된 것 같았다. 이들의 화제는 온통 <아바타>였다.

 

반가운 마음에 진작 써둔 리뷰를 퍼올리고, 과연 얘들은 어떻게 노는 걸까 궁금해 같이 댓글놀이를 하며 지켜보는데, 마침 정모를 하잔다. 나야 먹고 죽을래도 주말에 약속이 없는 사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나타난다 해도 나 역시 장년의 남성, 피해야 할 이유도 없고.

 

정모 하면 뭐할까, 하는데 나오는 얘기들 역시 대략 10년 전에 즐기던 것들이다. 허허, 그래 나도 그 나이 땐 노래방 열심히 다녔니라. (피시방은 없었지만) <아바타>는 3D 뿐만 아니라 4D로도 한다는데, 그거 첫경험이나 좀 하자. 대충 리딩하는 녀석이 눈에 띄길래, 슬쩍 교통정리를 좀 했다. 시간-장소-회비, 사실 이것만 정하면 어떤 사람들끼리라도 만남은 가능하다. 보통 이런 만남이 계획단계에서 파토가 나는 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이럴 땐 잽싸게 '대장'을 뽑아놓고 딱 저 세 가지만 정한 후 나머진 몽땅 위임하는 게 좋다. 민주주의는 그게 더 효율적일 때나 가치 있는 거다.

 

대장을 뽑아놓고 나니 일사천리로 약속이 잡혔다. 영등포역 9시. 으잉? 9시라니. 최근 몇년간 9시에 취침한 게 9시에 기상한 경우보다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토요일에 일을 나갔다. 원래는 안 나가는 날이다. 날짜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알바를 보고서야 토요일이란 걸 알았다. (너무 비웃지 않았으면 한다. 뉴턴도 이런 버릇이 있었댄다.) 헛헛한 마음에 근처에 있는 국참당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마침 이 사람들도 죄다 MT를 갔다. 한 명도 남김없이. 허허 이런 젠장.

암튼 이런 심리상태에서 밤을 샜다. 뭔가 딴짓에 열중하다 정신차리고 보니 새벽 2신가 3시쯤 됐더라. 9시까지 영등포로 나가려면 집에서 8시엔 나가야 한다. 씻고 어쩌고 하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난 잠이 쉽게 드는 타입이 아니라 한두 시간씩 뒤척이곤 한다. 잘해야 2~3시간 자고 나가게 생겼다. 그나마 일어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결국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던 하루쯤 밤새는 일이 점점 더 고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역사적인' 만남, 하루쯤 밤새줄 수 있다.

 

결과적으론, 처음으로 <아바타>를 보다 졸았다. 3D나 4D였으면 안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다섯 번이나 봐서 웃음도 한 템포 일찍, 눈물도 한 템포 일찍 나오는데 어쩌랴. 추격씬에선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더라. 가끔씩 옆자리의 또랑한 눈망울을 훔쳐보며, 아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는구나 싶었다.

 

이런 '짓' 안 했으면, 내가 언제 내 나이 절반 되는 친구들과 말 섞어볼 수 있었을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녀석들을.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걸으면서도 화제가 바닥나지 않는 조잘거림을.

 

이봐 친구들. 횽은 니들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술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술도 한잔 하자꾸나. 우리 이대로, 뭔가에 미치는 것을 겁내지 말자. 세상은, 미친 놈들이 만들어 가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I see you."

2010년 1월 25일 월요일

거지에게 돈을 주십니까?

길을 가다 거지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동전 한두 푼 던져주는 일이 본질적으로는 그이의 문제를 조금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쥐어주는 이들과,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묵묵히 지나치는 이들이 있다. 코를 싸쥐며 유난스런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들을 나는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호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뭔가 변명같은 이유를 생각하며 그 앞을 서둘러 지나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어떤 소문에 따르면 개중엔 나보다 훨씬 풍족한 이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앞을 그냥 지나친 내가 당당해지는 건 아니다.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서른셋의 자화상

유시민은 자신의 서른 살을 맞아 다음과 같은 자서(自敍)를 남겼다. 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멘토 중 하나다.


서른 살의 자화상_유시민


다시 읽어봐도 정말 그릇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제 정신이라면 도저히 이곳에 링크를 걸어두기는 민망할 노릇이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덮어두고, 나도 나의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한다. 나도 이젠 서른 하고도 셋이다.

 


01.
나는 뭐든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질 못한다. 인정하긴 무척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떤 선천적 기질 같은 것이었을까. 내겐 첫 '타인의 시선'이었던 초등1학년 담임선생의 생활 평가는 "두뇌 명석하나 주의가 산만함"이었다. 이 열 두 글자는 이걸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학생들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생활기록부를 꽤나 어릴 적에 보게 된 모양이다. 초등학교를 두 번 전학했는데, 아마도 그 와중이었던 것 같다.


(그땐 "주의 산만함"의 뜻을 몰랐다. 그저 '주의가 山 만하다'는 소린가 흘려 넘기고 '두뇌 명석'에 만족했다. 곧바로 국어사전을 뒤져볼 정도의 부지런함만 내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02.
그래서인지 내 앎이란 것은 넓고 또 얕다. 자랑삼아 말해보자면, 나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평균 이상'의 상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분야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가장 대중적인 대화소재랄 수 있는 연예, 스포츠, 자동차 이 세 분야에 대해선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이슈들의 공통점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든 좀 식자연하는 사람들이 주로 기피하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그들 중 하나라고 느낀다.


문제는 내 앎이 얄팍하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한때 '박학다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무슨 '자뻑'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엷을 薄자에 먹을 食자를 써서 '薄學多食'이었다. 당시 나는 사자성어에 좀 빠져 있었고, 더는 스스로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을 때 이 이름도 버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學이 薄하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내 얕은 앎은 내 인간관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다.

 

 

03.
사람은 동류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해본다면, 자신과 종(種)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동류를 좋아한다. 여기서 동류라 함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공통의 관심사는 평화를 주고, 고독을 가져간다. 평화가 지루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자신이 항상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든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 사람을 하나 찔러 볼 일이다. 그리고 감방에서 난동을 좀 피워주면, 몇대쯤 얻어맞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즐기는 것을 국립 원룸에서 마음껏 누릴 수 다.)

 

동류는 곧 동족이다. 명빠나 노빠나 결국은 다 정치 '오타쿠'들인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제각기 머리 속에 품고 있는 세계가 있고, 저마다 다른 종족과 어울려 살아간다. 내 세계엔 이건희가 있지만, 이건희의 세계엔 확실히 내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아마 점(pixel) 하나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터, 이 사실은 내게 별로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유쾌한 기분으로 나아가기 위해, 즉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동족을 찾아나선다.

 


04.
대개 동족은 무리지어 산다. 그런데 나의 동족들은 대체로 돈 버는 재주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우화(羽化)한 후 나비처럼 날아가더라는 소식이 간간이 전해오긴 하는데, 그보단 지리멸렬한 인생이 더 많다. 가끔 골방에 모여 앉아 우화의 비법을 수근대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외롭게 지낸다. 가끔은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깜빡하기도 하면서.

 


05.
이방인이 어느 동족집단에 끼어들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통과의례는 동족인 척하려는 자를 효과적으로 걸러낸다. 척하려는 자는 대개 신용할 수 없으므로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앞에서 밝힌 이유로 해서, 다양한 통과의례를 비교적 쉽게 통과하는 편이다.

 


06.
무리의 중심에 들어가면 무리의 구루(guru)를 만날 수 있다. 그 형태가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아니면 아예 아나키즘이든, 무리 중에는 무리를 이끄는 자가 있다. 그들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근슬쩍 드물게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무리를 조종한다. 그들이 내놓는 말의 무게는 다른 동족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리의 중심 혹은 변두리 어느곳에서 내가 운좋게 그 구루들과 마주치게 되면, 그들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곤 한다. 구루들은 모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 그들이 내놓는 시험은 여느 통과의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 박학은 당연히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이대로 남아 무리의 규칙을 배울 것이냐, 아니면 무리를 떠날 것이냐.

 


07.
나는 대체로 떠남을 선택했다. 저 바깥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 어딘가에는 진짜인 나를 알아봐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라는 기대는, 만남과 떠남이 반복되면서 점차 엷어졌다.

 

운좋게도 일찍부터 여러 구루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좋은 구루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세상에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주 까다로운 안목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란 상실을 겪어보기 전엔 매우 어려운 일이다.

 


08.
결국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지금보단 정신력이 강했던, 혹은 둔감했던 시절에는 그것도 대충 견딜 만했다. 요즘엔 좀 한심한 말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이방인(etranger)',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그리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사용되진 않았던 덕분에, 더러 작은 무리의 구루 행세를 할 기회도 있었고 외로움도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나는 흑맥주 스타우트의 초기 CF를 좋아했는데-"덤벼라 세상아!"- 그것이 저 호시절의 기분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09.
그리고 어느덧 서른셋이 되었다. 이럴 땐 정말 한국식 나이세기가 싫다. 하지만 만으로도 32세. 공자님 말씀대로라면 이립(而立)을 진작 지났다. 이립은 똑바로 선다는 뜻이다. 지학(志學)의 시기에 내 나이 서른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대략 "남자 나이 서른이면 대충 인생의 결론이 보이는 나이"라고 썼다. (당시 지금의 내 나이 무렵이던 선생께서는 그 프린트 뭉치를 받아 들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이제 서른 셋이다. 요즘 나는 내 삶에 대해 묘사할 때, "휘청댄다"라고 쓴다.

 


10.
나는 내 휘청임이 부끄럽다. 아직 내 곁에 남아준 벗들에게 부끄럽고, 아직도 내게 기댈 수 없는 부모에게 부끄럽고, 내 몫의 짐까지 짊어진 아우에게 부끄럽다. 나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운 건 바로 열다섯의 나 자신 앞에서이다. 나는 그 녀석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아니, 살지 않았다.

 


11.
나는 핑계가 많다. 운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그중엔 '나는 치열하지 않았다'는 식의 내'탓'도 섞여 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더 큰 죄악이라던데, 그게 바로 내가 잘하는 그것이다.

 


12.
이제 결론을 내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 즉 성공은 운과 환경, 그리고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


운은 좋았다.

그중 최고는 정직하고 현명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아버지이다. 무학에 평생을 가난했지만 인격적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아들들이 쉽게 비뚤어진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끼도 밥을 굶은 적이 없다. 굶주림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도 보았다.
어머니도 좋았다. 그리 현명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건강을 잃기 전에나 후에나, 친자식을 정말로 잊어버릴 만큼이나 나와 내 아우를 공정하게 보살피셨다. 백일휴가 복귀 날, 깜빡 두고 간 휴가증을 찾으러 돌아갔을 때 발견한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것이다.


환경은 좀 별로였다.

적절한 시기에 "8학군" 진입을 선택한 아버지는 현명했지만, 충분히 악착같지는 못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서초동 꽃마을에선 마을 이름에만 꽃이 피었다. 거기서 보낸 유년은 내게 깊은 열등감과 비뚤어진 호승심, 그리고 분수를 모르는 욕심을 남겼다. 이는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도 몇몇 아주 똘똘한 벗을 함께 주었기에, 그냥 만족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모든 것이 핑계일 수밖에 없을 만큼 명백히 어리석었다. 시야는 좁았고 선택은 항상 일렀으며 또 무모했다. 용기와 무모함을 가르는 기준은 리스크를 알고 있느냐이다. 나는 용기라고 믿었지만 실은 무모함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운과 환경은 누구도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노력 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머리가 내 선택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마음만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충동의 결과가 나의 오늘이다. 나는 이 사실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바꿔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13.
여전한 문제는 내가 아직도 나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동족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순 없다. 선택이 필요한 종류의 일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 시간이 온다. 나는 이미 얼마간 늦은 듯하다.


따라서 다음 계단까지의 남은 삶을 걸고 나는 다시 선택한다. 이번 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길 기대하면서.


첫째, 나는 내 배움을 기록한다. 찌질한 일기든 어설픈 선동이든 소소한 감상의 기록이든, 내겐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쓰며 사는 삶을 꿈꿨으면서도 항상 다른 것에 취해 있었다. 취함은 쾌락은 줬지만 기능을 닦아주진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열심히, 끈질기게 하지 않는 것을 잘하게 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좋아하는 것은 자주 하기 때문에 잘하게 된다. 많이 쓰다보면 조금은 더 잘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건다.

 

둘째, 나는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지 않는다. 가능하면 연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한으로 한다. 덜 쓸 수 있으면 덜 벌어도 된다. 덜 벌어도 되면 이 소중한 자원을 더 많이, 쓰는 것에 투자할 수 있다. 더 많은 투자는 더 나은 결과의 확률을 높일 것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다. 즉 돈은 시간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간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산다. 마침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인생은 무척 안락해질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흔치 않다. 팔 수 있는 시간의 값이 너무 싸다면, 하고 싶은 일의 양이라도 줄여야 한다.

삶은 공정하다. 무엇이든 버린 딱 그 만큼만 얻는다. 3천원 짜리 타꼬야키를 포기하면 1천원 짜리 붕어빵을 사먹고도 2천원을 남길 수 있다. 다행히 내겐 미식의 취미가 없다.


 

14.
이 남루한 자서를 쓰며 그나마 스스로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헤매던 시절도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아니다. 긴 방황이 내게 남겨준 유일한 자산이다.

나는 내 욕망을 그 어느 때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내 욕망은 내 분수를 벗어날 만큼이나 크고 단단하다. 그리고 이 탐스러운 욕망을 난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는 누가 뭐래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서른셋이 다소 불만족스러울지언정 또다시 절망해야 할 만큼 낙오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_발정이 절정에 달한 어느 늦은 새벽에 쓰다.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The Road>


1.
사람이란, 오래 굶다 보면 서서히 몸이 약해지고, 곧 병들어 죽는다.
만약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한 경우엔 어떨까.

 


2.
이 영화는 삭막하다. 시종일관 어둡고, 희망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다. 딱정벌레 한 마리에 걸어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 영화를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많이 아프다.

 

길 위에선, 함께 절망을 견뎌줄 수 있는 동행이 필요하다. 그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성장한 자식이나, 친구, 혹은 동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온전히 홀로 그 절망을 견뎌야 한다면. 그 절망의 끝에는 어떤 희망도 약속되어 있지 않으며, 아니, 희망이란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

 

때때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무채색의 바람이 불어대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굳이 종말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관객을 이끌고가는 힘은 오로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강렬한 부성, 아니, 그것을 넘어선 이유와 흔적에 대한 집요함이다.

 


3.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때때로, 대개 잠 못드는 밤이다.

 

여럿이 함께 이 영화를 본다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엔, 몇몇은 쫓기듯 서두르며 절망을 털어내려 할 것이다. 더러는 감독을 원망하며 눈물을 좀 떨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여 개중 나와 닮은 이들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피하며 극장을 빠져나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게 될 것 같다.

 

 

 

"If I were God, I would have made the world just so and no different."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아바타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관련글.

http://blog.naver.com/hajin817?Redirect=Log&logNo=60097100997
http://www.cyworld.com/inbj220/3456761

 

 

냉소적인 태도를 훈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사실은, 냉소의 대상이 자신보다 강자인 경우 냉소는 찌질한 투정에 불과할 것이며, 약자인 경우는 인간실격
의 한 증거가 될 수 있으리란 점이다. 따라서 적절한 냉소란 사실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대상에겐 분노를,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대상에겐 짜증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불쾌감을 드러낸다고 봤을 때, 현대인은 분노는 점점 잃어가고 짜증만 늘고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발견해버린 이 거대한 세계 앞에서 점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대략 비슷하다.

 

나는 이러한 '짜증의 과잉'이 하나의 시대적 유행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설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가장 크게 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DJ는 이를 두고 "담벼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 했다.

 

물론 이런 정말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분노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편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힘을 상상할 수 있는 이라면, 북경에서 퍼덕인 나비의 날개가 뉴욕의 증시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는 관객 모두에게 어떤 영웅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또다른 아바타 조종사 노엄처럼 군바리놈들에게 죽빵 한방 날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헬기조종사 트루디처럼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할 수도 있을 터다. 그것도 아니라면 홈트리 붕괴 때 눈물이 그렁해진 이름 없는 오퍼레이터 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이입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런 보통사람들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반쯤 돌아버린 소위 '예술영화'의 또라이들이 아니라.

 

아바타의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그래, 난 바보를 좋아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사랑할 어떤 이의 별명도 '바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바보가 어느 너절한 평론가보다 지능이 낮았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If you are one of us... Help us"

얘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단 마음이 들면 '바보'인 거야?

 

 

 


하악하악

 

디씨의 고딩들과 말을 섞다 보니, 이외수가 느꼈을 설렘이 이해가 좀 된다. 나중에야 결국 버럭! 했겠지만.

 

아, 부러운 청춘들이다. 나 때만 해도 뭔가 오덕질을 하고 싶은 건수가 생겨도 재료를 구할 곳이 없었다. 인터넷이 깔려서 온갖 정보가 저렴하게 공유됐던 것도 아니고.

 

정보가 사유화하지 않고 공유된다는 건 정말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요샌 선진국 흉내도 좀 낼 수 있게 된 힘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넋두린 블로그보단 트위터가 적당할 텐데- 아직 못 배웠다 트위터.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아바타 관련 읽을거리들

횽아들! 언냐들!

오빠 달려~♥!!!

 

 

 

 

무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을 때 참조하기 좋은 곳들이 있다. 단편적 지식이나 상식으로 충분할 때는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in이 쓸만하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좀 마니악하다면, 디씨(dcinside.com)는 더할 나위 없는 정보의 창고가 된다. 장담하건대 디씨, 웃대(humoruniv.com), 루리웹(ruliweb.com), 요 세 곳만 잘 훑어도, 적어도 향후 반년간 대한민국 트렌드의 첨단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곳이 어디냐. 얼리어댑터들의 고향, 오타쿠의 성지, 대한민국 잉여의 총본산이다.

 

이런 곳들에서 발견한 아바타 관련 읽을거리들을 링크해둔다.

짧은 글토막은 출처를 밝힌 후 copy&paste.

 

 

 

아바타가 오마주를 바친 6개의 영화 _PSB

http://blog.ohmynews.com/hypersurface/162772

어디 이뿐이랴만.

 

 

판도라 백과사전(영문)

http://www.pandorapedia.com/doku.php

공식(official) 홈페이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등장인물 별 사망 이유 _mithril(dcinside)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871

그레이스 : 엔딩 장면에 대한 사전 설명용.
족장 : 엔딩후 생길 수 있는 이것저것 귀찮은 일 방지.
쯔테이 : 족장과 이유 동일.
트루디 : 괜히 살아있다가 원군 아크란들이 오해해서 공격받으면 개민망.
노엄 아바타 : 마지막 대결, 네이티리와 제이크 만남씬 방해되서 노엄이 밖으로 나갈 명분 제공.
쿼리치 : 얘가 숨쉬는 한 싸움이 끝이 안남.

ㅋㅋㅋ

 

 

아바타 평점이 낮은 이유 _ㅇ_ㅇ(dcinside)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942

ㅋㅋㅋㅋㅋㅋㅋ

 

 

영화를 보고도 이해가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875

옥의 티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 댓글을 보자

 

 

 

(계속 추가... 할 지도)

 

 

잘하면 4반세기만에 아부지 손 잡고 극장 갈 기세.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아바타> 극장 관람 후기

 

"I see you"

 

1.

오히려 3D는 기대만 못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단 관람 매너 따위 알 리 없는 꼬꼬마들과, 4시 방향에서 끊임없이 종이 봉지를 구겨댄 이유가 궁금한 '스크자응' 한 분, 그리고 영화는 중반까지 왔는데 "어머, 쟤가 제이크야?"라고 묻던 7시 방향 아가씨까지,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빨리 돈 벌어서 극장이나 하나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동족들에 대한 투정은 이 정도로만 하자. 적어도 덕분에 30대 독신남 홀로 극장에 앉아 질질 짤 만큼 몰입하진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런 걸 감사히 여긴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기를.

 

각기 다른 표정에 주목

 

2.

이미 천 만 가까운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한다. 두 번, 세 번 본 이도 있을 테니 실제 관객수는 조금 모자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다. '이런' 대박 블록버스터들이 흔히 그러하듯 작품의 감상과 평가도 "최고다!"에서부터 "쓰레기다"까지 양 극단을 아우르는 듯하다. 다소 감성적인 다수파와, 냉소적인 소수파.

평소 최후의 소수파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아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주저없이 다수파 곁에 서기로 했다. 그들이 옳다. 내 편이 제대로 봤다.

 

내게도 세상에 대한 냉소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건전한 재능을 쌓아올려야 할 시기에 내 정신은,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익기도 전에 병들었다." 멀리 혹은 넓게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들, 불합리들, 부도덕들을 노둣돌 삼아,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고 결론지었다. 악화는 언제까지나 양화를 구축할 것이고,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것이다. 이런 곳에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고 별달리 용기있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오늘 또 하루 간신히 숨쉬며 휘청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2002년 겨울,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나 답게 좀 느릿한 걸음으로.

<아바타>는 이런 우리들에게 바쳐진 영화다.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가장 울컥했던 장면. 사랑해요 트루디!

 

3.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21세기에 속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권위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봉건의 잔재들도, 철모르는 아나키즘과 대책없는 낙관주의 같은 것들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 머물러 있다.

한때 나의 영웅이던 이문열 같은 이들은, 역사를 권위주의와 아나키즘의 무한루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 <칼레파타칼라>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 <호모 엑세쿠탄스> 이후의 그의 책은 하나도 읽질 않았으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없다면 여전히 희망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 <아바타>는, 가상의 별 '판도라'를 통해 20세기를 매조지하려 한다. 그 방식은 새 시대의 첫차라기 보단 구 시대의 막차다. 영화가 '피에타'서부터 <원령공주>, <공각기동대> 등 일본 애니메이션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놀랍게도, 아직도 '오마쥬'라는 말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휘라고 한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일에 표절이니 패러디니 매번 난리굿.)

마침(?) 판도라는 고통과 희망이 함께 담긴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과학기술 즉 문명이, 신성(神聖)의 영역을 침범할 때 간혹 인용되곤 한다.

 

"Network of energy"

 

4.

생떽쥐베리는 "완벽이란 무언가를 더 할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했다던데, 나는 이 어르신 말씀을 신용하는 편이다. <어린왕자> 쯤 되는 작품을 쓰고, 날아 다니다 죽었으면 그런 양반이 한 얘긴 복음처럼 들어줘야 한다.

 

<아바타>에는 단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더라. 하기는 러닝타임 162분에 제작비 3천억 원, 페르미식 막계산 때려보면 프레임 하나 당 무려 100만원꼴이다. 단돈 13000원에 이런 위대한 성취를 목격할 기회를 얻었다면, 조용히 찬가나 부르는 게 나 같은 필부의 역할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쪼가리뷰] Avatar, 어머니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Avatar, 어머니 가이아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검색해보니 CGV 홈페이지에 링크된 리뷰만 600편이 넘는다. 나올 얘긴 벌써 거진 다 나왔을 것 같다. 한 편의 리뷰로 엮을 의미는 더 이상 없을 듯해서, 늘 하던대로, 쪼가리뷰로 정리한다.

 


1. 가이아 가설


영화 <아바타>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먼저 '가이아 가설(지구유기체설)'에 대한 이해를 조금
쯤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15년 전 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이것을 접했을 때는 항상 '가설(hypothesis)'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언젠가부터인지 무려 '이론(theory)'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하기는 '이론'을 '검증된 가설'이라고 정의한다면, 이것도 이론은 이론이겠다. 반박될 수 없고 따라서 검증될 수도 없으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유신론이다.

 

판도라(열어서는 안될, 또 마지막 희망이 든 상자-라는 의미의) 행성은, 인류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 비해 고도로 진화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어머니 대지' 가이아에 비해 더 정교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신경망이 빤히 눈에 보이는 덕분에 관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판도라의 '식물'들은 지구의 식물과는 겉보기만 같지 우리로 치면 오히려 동물에 가깝다. 광합성 하는 원생생물, 클로렐라의 파이널 버젼이랄까.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건 누가봐도 '피에타'다. '성모'와 상처입은 그녀의 아들.

 

 

제임스 카메론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바타> 역시 강인한 모성을 희구한다. 네이티리는 제이크를 향해 "너(너희, 영어의 you가 단수와 복수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는 아기 같아. 소란을 피우고 해야할 바를 모르지."라면서도 결국 가르치고 보살피는 역할을 떠맡는다.

물론 "가득 찬 잔을 채우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지치지 않호기심이 있기도 하다. '용기'와 '호기심'은 <반지의 제왕>과 같은 환타지 세계관에서 흔히 인간종족의 미덕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2. 스머프 포르노?


어느 어줍잖은 블로거가 평하길, <아바타>는 "스머프 포르노"란다. 버섯 아래 사는 파란 녀석들의
섹스파티니까 나름 적절하긴 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포르노 작품을 보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불필요한 이유로 금지된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포르노 또한 예술의 극한영역 가운데 하나다.

 

나비족의 '사타구니'는 영화 극초반에 단 한번 노출되는데, 외성기가 없다. 팔랑거리는 천조각 하나로조차 가릴 필요는 사실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관객들은 더 큰 이질감을 느꼈을 테지만. 이질감은 곧바로 영화수익의 감소로 이어졌을 테고.

 

나비족의 외성기는 인디언식으로 땋은 머리털(사실은 음모)로 가린 채 뒤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구생물에게 익숙한 삽입식 성행위 대신, '플러그를 연결하듯이' 성합할 것이다. 바로 "샤헤일루(the bond)"다. 말과도 하고, 익룡과도 하고. 그러니 포르노가 맞긴 맞다.

 

 

 

3. <아바타>는 대마초 영화?


나비족의 외성기(?)와 대마의 암꽃

 

나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 외국 포럼을 뒤져보니, "Avatar was a pro-marihuana movie"라는 아티클도 있더라. 비약과 망상은 떨쟁이들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긴 하지만, 영화도 그걸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What the hell have you people been smoking out there?"
파커, 그레이스와 언쟁 중에.

 

해서, 제임스 카메론의 관련 발언을 조낸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가이아 가설'의 창시자 러브록도 마찬가지. 다만 관련 뉴스그룹에서 그의 이름이 엄청,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되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흥미로운 사이트 하나


 

 

4. 악역은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쿼리치 대령은, 사실 존경할 만한 불굴의 용사다. 그의 '울타리 밖의 적'이 설사
저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였다고 해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는 통이 결여된 용기를 대표한다.

 

 

 

5. 판도라의 미래


<아바타>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 한다. 다음 편을 예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주요 테마는 틀림없이 '인간의 역습'이 될 것이다. 인류는 눈 앞의 이익을 결코 포기해본 적이 없다. 문명화(civilize)를 거부하는 나비족이 어떻게 하면 더 강력한-어쩌면 전술핵무기까지도 동원할- 우리의 역습에 맞설 수 있을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후속편이 나오면 <매트릭스> 때와 마찬가지로 전편 다시 보기가 유행할 거라는 점이다.

 

 

 

...

일단 여까지. 내일 드디어 3D 관람이다.

2010년 1월 5일 화요일

초성체가 싫다구?

1.

국문과 출신(잠시 뿐이었지만)에, 한때 문장을 문법에 맞춰 뜯어고치는 일을 업으로 삼던 전직 편집자(이 역시 잠깐...), +자칭 글쟁이로서 나는, 인터넷과 방송을 떠도는 형식 파괴의 신어(新語)들을 볼 때면, 묘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한 오만과 편견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은 편이긴 해도, 지식·정보의 보급과 전파에 있어 '표준화(standardization)'란 불가피한 일로 납득하는 쪽이다.

이를테면 '출판용 문장'과 '블로그, 다이어리용 문장'을 구분한다는 식이다. 출판의 경우 아무래도 웹에 비해 비용이 더 크므로 보다 선별된 컨텐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비용'의 문제는 언제나 중요하다) 또, 웹의 텍스트가 공시언어학의 과제라고 봤을 때, 출판은 보다 통시적이다. 후세에 남기는 현재의 유적과 같은 것이다. 비교·참조할 텍스트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 의미는 사라진다. 즉 유행을 타선 곤란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 웹툰]의 초신성 '랑또'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겼다.

 

"분명 1년만 지나도 촌스러울 거야- 흑흑. ㅠ.ㅠ" - <악당의 사연>, 후기 중에서

 

이에 비해 웹에서의 글쓰기는 한결 자유롭다. (역시 비용의 문제다.) 과연 몇 %의 독자들이 "드립"의 의미를 알고 함께 웃을 것인가. "꿀벅지"의 유행 또한, 2009년을 전후해 불어댄 '걸그룹'들의 쇠젓가락 같은 다리의 광풍이 지고 나면, 마니악한 취향의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who care?

 

 

2.

후(後)-근대는 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이 땅에 상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서는 하루키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인문학에선 푸코와 데리다가 유행했다. 정치경제에선 케인즈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 '가치의 해체, 더 많은 자유'로 요약되는 이러한 경향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세력을 확장해왔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애당초 그러한 것으로 시작되었던 웹의 경우이다. 웹은 후-근대의 신생아다. 따라서 웹에서는 오히려 후-근대적인 것이 '주류'가 되었다. 주류라 함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뜻이다. 인지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해서 '포스트모던'은 이곳에서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악플러'나 '낚시글'과 같이, 이들의 전위를 통해 두드러지는 웹의 중요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글쓰기다. 그들의 행동(action, 또는 reaction)은 원칙이나 논리보다는 충동과 감상을 동력으로 삼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엔 '목적'이 아예 없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건 과정과 그것을 즐기는 글쓴이 자신이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 따위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혹시 이 포스트를 읽고 있는 독자가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그것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으로 직접 확인해볼 수도 있다. '설명문'이랄지 '논설문' 등으로 분류할 만한 포스트, 즉 '목적이 분명한' 글타래가 과연 몇이나 될까.

 

 

3.

나는 여기서 후-근대의 이후를 본다.

 

목적이 불분명한 글쓰기란 바꿔말해, '자기목적적인 글쓰기'라 할 수도 있다. 창조자 자신만을 위한 피조물.

이를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이라 해도 상관없다. 자위 잘하는 사람이 섹스도 잘할 확률이 높다. (뭐든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편이 낫다.) 단순한 배설이나, 모욕을 목적으로 하는 악플이라도 괜찮다. 모욕은 그 내용과 대상이 합당하지 않을 경우 결국 그 칼끝을 발화자에게 겨눌 것이다. 무엇보다 욕을 들어쳐먹어야 할 것들은 욕을 좀 먹어주는 게 서로에게 이롭다. 욕도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짓인 것이다. 무플은 악플보다 외롭다.

 

마찬가지로 형식 파괴의 신조어 또한 아낌없이 남용되어야 한다. 형식이란 목적을 위해서나 필요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 혹은 자기목적적인 글이라면 형식에 얽매여야 할 이유가 더욱 없다. "ㅋㅋㅋ"도 좋고, "아 ㅅㅂ 꿈"도 좋다. 더 많은, 더 경박한 댓글을 마구 날리는 게 좋다. 중요한 건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더 많은 소통의 기회'이다.

 

인터넷 댓글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그림과 같은 광경을 한 번쯤은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다음 웹툰 <내츄럴 리로리드 : 시커먼 빛>(전상영作) 22화의 '베플'.

 

어떤 상황 아래서는 가장 조악한 표현이 가장 적확할 수 있다. 도대체 문자 텍스트로 어떻게 표현해야 "ㅋㅋㅋ"로 드러내는 정서, 즉 조금 방정맞고 꽤 실없이 웃으며 동시에 '당신이 왜그러는지 난 알지롱'하는 심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국어에 외국어를 무심코 섞어 씀으로써 국어를 오염(!)시키는 것도, 국어교육을 너무 잘 받은 한국인이 외국어엔 통 젬병이 되는 것도 모두 이와 관련된 현상들이다.

 

 

4.

이쯤에서, 어떤 초월적 선(善) 의지의 추종자들이나, 신념의 투사들은 '격조(格調)'란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형식의 파괴 속에서 번뜩이는 실마리를 제때 잡아채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낙오할 것이다. 이외수가 우연히 <하악하악>을 낸 게 아니다.

 

무엇보다 저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와의 생존게임에서 더 쉽게, 더 많이 살아남는 이유는 일단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는 똘추들은 그저 얼간이일 뿐이겠지만,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살면 결국 그 손해는 결국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인 것처럼, 발화(發話)되지 않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당신의 견해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당신의 생각보다 가치없지 않다.

 

 

 

 

 

지네 다리


 

 

2010년 1월 4일 월요일

폭설

밤사이 온 천지가 하얗게 덮이었습니다

눈은 낡은 옥탑의 남루도 가려주었고

어쩌면 눈부셔 내 눈도 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서정주의 싯구처럼 눈은 그저 괜찬타, 괜찬타- 하는군요

그 아래 묻힌 것들이 무엇이건

 

달콤한 거짓보단 쓴 진실을 원합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눈은 녹아 사라질 테지요

 

고마워요 숨기지 않아줘서

그래도 눈발이 나리는 날에는 춥지 않아 다행이에요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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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선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진눈깨비>, 기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