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중요한 건 누구의 유전자가 남겨지느냐. 이다.

가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변경될 수 없는 사실 또는 사건에 대해 '이랬으면 저랬으면'하는 미련을 갖는 행위를 찌질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분명 이건 찌질한 게 맞다.

 


세태(世態)는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선 잊어버리는 것을 '쿨함'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한때 나 또한 동조했다.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모든 행위의 가치를 판단해줄 존재는 결국 나뿐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상이 내 눈꺼풀과 함께 닫힌다는 상상은-분명 절망의 한 근거였으되 한편- 어린 나를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쿨함'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루키'(적인 것)를 쿨함의 적당한 표본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몇몇 어설픈 흉내쟁이들은 그가
68세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68은 곧 우리의 386이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 쳐부숴야 할 적(敵)이 명확했던 시대.
물론 이 나약한 용기로 저 터무니없이 비장한 '구국의 강철 대오'에 서지는 못했을 테고,
또는 (십대 때부터 이문열의 세례를 받은 자로서) 딴에는 '시대와의 불화'를 고민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바위에 던져져 깨어지는 달걀 같은 삶을, 자긍할 수는 있었을 것 같다는 얘기.

나는 노무현의 구두닦이가 되고 싶었다.

 

 

 

이젠 요절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스무 살에 죽는다면 박종철처럼,
서른 살에 죽는다면 예수처럼, 아니면 하다못해 기형도처럼이라도 죽어야 했다.
내 나이 마흔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쉰 예순 일흔은, 어휴.

 

 

 

...

 

 

 

서른 두 해 남짓 살아오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있는 집'은 형제가 많더라. 친인척 두루두루.
3남매 정도를 기본으로, 6, 7남매도 적지 않다. 당연히, 먹고살 만하니까 가능한 선택이다.

최근의 저출산 경향은 우리의 유전자 풀로부터 빈자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배제해나갈 것이다.

 

 

형제는 50%, 사촌은 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기대값)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1:28)"는, '실존(實存)'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낳고 길러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설령 본인이 부정한다 할지라도, 가장 강렬한 충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욕망을 초월할 만한 그릇이, 나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세상에 남겨질 내 유일한 피붙이가 될 조카의 성장을 마냥 행복해 할 수가 없다.
나는 시샘하고 있다.

나는 찌질하다.

 

 

 

 

찌질한 소리는 여기까지.

 

 

 

 


인격은 환경의 산물인 동시에 선택의 결과다.
'자아(自我)'를 '분자 단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경우, 주체성이란 실재할 수 없지만,
개체로서의 인간은,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해두는 편이 이해가 편하다.

 

밈(meme)이란 개념이 있다.
이해가 편하다는 말은 밈 복제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내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gene 아닌 meme이다.

 

다행스럽게도, '쿨게이'의 유행은 곧 지나갈 듯하다.

'곧'이 1~2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예정된 사실'이 누구에게나 다행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다.

 

누가 먼저 GG칠 것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사진=이석주)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최승자,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노무현 종교화 프로젝트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에, '교주(敎主)'라는 직업이 앞으로 전망이 있겠다 싶어 그것이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성공하는 교주의 7가지 습관>이란 게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주제를 정해놓고 꽤 진지하게 탐구했더랬다. 별 성과도 없었고 결국 7가지를 채우지도 못했지만, 과거의 몇몇 성공한 교조(敎祖)들의 사례들을 돌아보며 나는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교조는 생전에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였다. 예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붓다는 왕좌를 버리고 광야를 떠돌았다. 공자는 한 번도 뜻을 펴지 못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다. 젊어 죽건 늙어 죽건 제대로 된 교조라면 육신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차야 한다.

 

둘째는 "교조는 저작을 남기지 않는다"였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플라톤이 썼고, '복음'은 열 두 제자들이 남겼으며, '논어' 역시 안회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조는 다만 입으로 떠들 뿐, 받아 적어 후세에 남기는 일은 제자들의 몫인 것이다. 심지어 '라엘리안'들조차 끌로드 보리용이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아 적은(적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밖에 "교조에겐 말씀을 기록할 제자(들)이 있다"라든가, "제자들 중엔 꼭 말씀을 왜곡하는 얼간이가 섞여 있다"와 같은 자질구레한 공통점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점차 '갖다붙이기'란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어쩄거나 최근 내가 주목한 것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삶이 위의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을만치 드라마틱했으며, 그토록 염원했던 회고록조차 제 손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는 녹음된 목소리만으로도 눈물을 질질 짜게 된 수많은 제자들을 만들었고, 개중엔 그의 본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이들도 틀림없이 섞여 있을 것이다. 앞으로 50년쯤의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이름을 내건 사상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을 제외한 어떠한 것의 신성성(神聖性)도 부정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 위에 인간을 벗어난 초월성를 덧씌우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그 이름은 이런 하찮은 노력 없이도 역사에 길이 빛날 테지만.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

이병헌 단상

나는 이병헌을 좋아했다. <공동경비구역JSA>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에서 특히 멋있었다. 당시의 그는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외모의 배우였다. 어딘가 살짝 쑥스러워하는 듯한 그의 미소는 젠틀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조각처럼 단련된 복근을 자랑스레 내보이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론 권상우 등이 몸짱 열풍을 일으키고도 한참 후였던 것 같다. 그때를 즈음하여, 그의 특유의 미소에선 다정함이 사라지고 어딘가 모르게 지나친 자신감이 드러났다. 이 자신감은 지극히 남성적인, 그중에서도 최민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짐(헬스장)에서 은근슬쩍 끼워 팔곤 하는 근육강화제(중 특히 스테로이드 약물)의 심각한 부작용을 알게 된 이후, 갑작스레 근육이 불어난 사람들(요즘 특히 늘어났다. 몸짱이니 뭐니 여기저기.)을 보면 괜한 의심이라도 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이번 '사건'의 행간에서 드러나는 이병헌의 '비정'한 면모와, 어느날 문득 세상에 드러낸 그의 초콜릿 복근 사이에 혹시나 어떤 상관이 있을까 궁금한 거다.

 

 

 

 

 

뉴스를 보다가 문득

 

대략 전선이 두 개로 압축된 듯하다. 하나는 한명숙, 다른 하나는 세종시.
적들은 세종시 전선을 이참에 마무리하고, '한.명.숙' 석 자를 더럽히는데 일로매진하고 있다. 성동격서라고나 할까.
 
 
- 민주당은 어느쪽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특히 세종시를 타협하면 민주당은 공중분해 될 것이다. 토픽에서 세종시가 사라지고, 유야무야되는 순간, 충청은 완전히 넘어 가고 호남은 산산조각나며 영남은 확고부동해진다.
필요하다면 서울을 적으로 돌려도 좋다. 서울 유권자 대부분이 지방에 친인척 하나쯤은 다 갖고 있다. '서울 대 지방' 구도로 몰아가면, 서울 가족은 지방 친인척들의 전화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는 것을 육체적 피로보다 더 괴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 한명숙 해법?
저들은 대놓고 힘으로 눌러버리겠다는 전략이다. 정치에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체로 부정적이던, 좋은 시절은 지났다. 도덕이 가출한 시대니 만큼, 사람들은 강한 것에 더 쉽게 굴종한다. 저들은 굴종하는 백성을 원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좋은 전략이다.
강제연행도 불사할 것이 확실하다. 양 어깨 치들려 끌려나오는 모습이 TV로 나가면 한 전 총리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다. 그걸 막으려면 물리적인 '수성전' 한 판이 크게, 오래 벌어질 것인데, 그 그림이 클수록 아군의 피해가 막심해질 것이며, 결국 한명숙 카드도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강제 연행을 막는 시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체포 경찰이 서를 뜨기전에 물리적으로라도 제압해야 한다.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공세적인' 실력행사를 하면 현재 민주당의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인 "무기력함"을 씻어내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법리 논쟁은 대중에 오래가지 않는다.
 
- 한명숙은 대선 직전까지 결코 버릴 수 없는 박근혜의 대항마다. 박근혜는 (좀 이상하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는 상당수) 여성들의 강력한 롤모델이며, 그녀가 박근혜이기 때문에라도 적의 가장 강한 카드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의 저 철옹성 같은 지지율을 크게 한 번 흔들지 못하면 아군에 희망은 없다. 한명숙은 박근혜를 링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다. 노통은 이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차기 대통령으로 한 전 총리를 지목하셨던 것이다.
 
 
 
내친 김에 보태기.
 
- '4대강사업'을 핵심 쟁점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한 번도 저지되지 않은 MB의 '폭주'는, 그의 '불도저같은 추진력'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저들은 "4대강사업=경부고속도로"라는 등식을 내세워 '건설족'에 떡밥을 뿌리는 동시에, '영남'에 아첨하고, '지방'을 기만하는 등,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 프레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와서 "4대강 사업"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지 못할 바엔 차라리 손 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손 터는 과정'은 극적이어야 한다. "개발"은 어차피 첫 삽 뜨고도 한참이다. 단기 이익의 환상을 허락하되,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분명히 하면, 틀림없이 어디선가 탈이 난다. 그 '탈'들은 하나하나 MB의 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최선은 사업 자체를 막는 것이다. 한 번 막힌 불도저는 더이상 믿음직한 불도저가 아닐 것이므로. 그러나 너무 늦은 듯하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면 "내 돈(세금)으로 뻘짓한다"쯤에 있을까... 자기돈에는 민감들 하니까.
 
- TV를 완전히 빼앗겨버리면 승리 비용은 곱의 곱이 된다. 이미 너무 많이 밀렸다. 인터넷의 영향력은 2002년에 비해 오히려 축소했다. 반비례로 TV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SBS는 애당초 기대할 것이 없었고, YTN도, KBS도 하나둘 넘어가더니 드디어 MBC마저 저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판이다. 이에 손석희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다. (당내 행사 또는 '범진보진영' 행사에 초청 연사로 정치적 발언을 유도, 보도되도록 하는 방법 정도가 떠오르긴 하는데- 글쎄...) 엄기영은 노출이 많지 않아 성향을 잘 모르겠다.


※ 이상, 어젯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홈페이지에 올린 글.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Call to arms

간만에 의욕나서 답방 투어를 좀 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나와 어딘가 통할 것 같은 사람들'이 산다.

call to arm.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다.

공성 전차는 모여서 한꺼번에 들어가야 한다.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밀덕 : 밀리터리 마니아

 

 

밀덕

'밀리터리 오타쿠(마니아)'를 낮잡아 이르는 말.

 

 

남성성이 이를 수 있는 극한의 영역 가운데 하나.

오로지 실용성 만으로 다듬어진, 한 점의 애교가 없는 디자인. 반할 만하다.

 

 

 

정치 망상

아고라에 이상하다 싶을 만치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180 루저' 발언을 트리거 삼아 새삼 폭발한 것 같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담론 자체는 그보다 적어도 1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된장녀" 운운하는, 낮은 계급에 속한 젊은 남성이 현혹될 만큼은 그럴듯한 사례들이 많다.

 

권력은 항상 이들 '낮은 계급에 속한 젊은 남성 집단'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쥐었다. 이들이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계층이다. 이런 걸 떠올리면 아고라의 우경화 조짐은 막연하지만 분명한 불안요인이 된다.

 

...

 

이런 움직임의 배후에 '박근혜-최초의 여성 대통령' 만들기를 기도하는 세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건 역시 지나친 망상일 뿐인 걸까.

 

 

남녀갈등이 커지면 어쨌거나 국면은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예컨대, 이들 '젊은 우파 남성' 그룹의 표가 필요하다면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 (일부) 부과하겠다"는 떡밥을 던지면 되고, 그들의 안티 그룹(급진적인 페미니스트로부터 온건한 남녀평등주의자들까지)의 표가 필요하다면 남녀 평등에 관한 슬로건을 내걸면 된다.

 

- 저들이 선거전(戰)에 지역 갈등'만'을 이용하리라 생각할 만한 근거가 내게 있는가?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댓글 읽는 대통령

노무현이 특별했던 점 또 한 가지는, 그가 인터넷 댓글을 읽는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과 글 곳곳에서 그가 상시로 인터넷 댓글을 읽고, 드물게는 쓰기도 했던 것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익명성을 보장해줘야 더 많은 '생생한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은 분명한데, "악플러" 문제나 "언플" 문제의 발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사.사.세"와 "민주주의2.0" 등을 통해 모종의 실험을 진행 중이었으나,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났다. 관찰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도 못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20초 정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온다. 아직도.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조증이 온다

1.

세상사가 다시금 눈엘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질 아니한다. 연달아 피워무는 담배의 탓이 크겠지만 그것을 피워 물게끔 하는 울렁임이 있다. 하나의 중독으로부터 깨어나 다른 중독으로 옮겨가는 중인 듯하다. 두어 달 깊었던 울증이 가고 조증이 오는가 보다.

 

 

2.

한동안 외면하려 애썼던 세인들의 아우성이 다시 귀를 때린다. 엉뚱한 곳을 헤매며 답을 구하는 이들이 안타깝고, 답이란 없다고 믿게 되어버린 이들이 딱하다. "한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국제결혼 하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치들의 독단, "180 안 되는 남자는 루저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그녀들의 순수한 어리석음, "수능을 망쳤어요, 어찌 살아야 될지 막막"하다는 고교생의 공포 같은 것들,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크고도 깊다. 이를, 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어떤 여자아이는, 이런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그런 아이였다-, 항상 슬프고 아팠다. 너무 슬프고 아파서 아무 이야기도 보고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유약함을 나무라곤 했지만, 이제사 좀 알겠다. 많이 아프고 무서운 것이로구나. 느껴버리게 되면.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Sacred land 망상.

1.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라자]를 보면 '세이크리드 랜드(sacred land: 신성불가침의 영역)'라는 마법, 혹은 유사 마법적 현상이 등장한다. [드래곤라자]의 배경이 되는 대륙에는 여러 신격(神格)들이 공존하는데, 특정 지역에 어느 한 신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져 다른 신들의 '법칙'을 무시하고 해당 신의 법칙만이 작용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죽음의 신'의 세이크리드 랜드에서는 이미 죽은 자가 좀비로 되살아난다던가 하는 일이 벌어진다. 동 저자의 후속작 [퓨처워커]에서는 '순결의 신'에 의한 세이크리드 랜드가 나타나 동식물의 출산이 줄어드는 상황이 묘사되기도 했다.(실제 원인은 다른 데 있었지만 어쨌거나.)

 

문득 '세이크리드 랜드'라는 키워드가 떠오른 까닭은, 진정한 종말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하자면 종말은, 혼돈보다는 질서의 과잉으로부터 온다. 엔트로피 증가의 끝은 열평형 즉, 완벽한 질서다.

 

가변적인 것, 불확실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혼돈이라면, 질서는 불변의 것, 절대 진리, 필연의 법칙과 인과율 같은 것들일 터이다. 유사이래 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진리 체계들은 대부분 이러한 질서를 추구, 혹은 유지하는 것을 선(善)으로 정의해왔고, 나 또한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여기서 파생된 여러 규범들에 대체로 수긍하고 순종하는 편이다. 인간의 선은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는 것이라야 한다.

 

2.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 한국인은 지나친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어찌 보면 '현대'라는 시대를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으로, 굳이 말머리를 '한국인'으로 제한한 것은 외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탓일 뿐 대강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질서에 사로잡혀 있다.

 

혹자는  온갖 패륜적 범죄들, 묻지마 살인, 등이 횡행하는 이 혼돈의 땅, 가치 상실의 시대에 무슨 개소리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하나의 절대 가치, 즉 '돈(money)'이 도사리고 있음을 아는 이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좀 고상하게는 '경제'라고도 하더라마는.

드물지 않게 헤드라인에 오르곤 하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일면식 없는 타인을 난자하는 등의 흉악 범죄들은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그동안 기록되거나 전달되지 않았을 뿐, 인류사에 늘 있어온 일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은 극히 합리적으로 계산되는 우리 '행복'의 평균과 총량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행복한 삶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적어도 '평균 이상'의 생계를 원하는데, 그 평가의 잣대가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의 힘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고졸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일은 없다. 해가 갈수록 서울대는 강남 출신 학생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각자가 그리는 '보통의 삶'을 쟁취하려 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 로또라도 맞지 않는 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서로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뻔한 삶 위를 걷게 된다.

 

'암흑기'라고도 불리는 유럽의 중세 외에, 그 어디 어느 때에 이토록 강력한 질서가 자리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말인즉,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또 하나의 '암흑기'로 보고 있다는 뜻이 되는데- 내 삶이 대체로 유쾌하지 않은 것에는, 거창하게도, 대략 이런 이유가 있다.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별일 없이 못 산다.

'잉여'의 삶을 산다.

 

한때 '애자' '병진' 등 어감은 기발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신조어들을 생산해내곤 했던 인터넷에서 요즘엔 '잉여'라는 표현들을 쓰는 모양이다. 초딩을 비롯한 키보드 워리어들이 사용하기엔 다소 고급 어휘라는 느낌도 있는데, 어쨌거나 고용없는 성장 시대의 핵심문제를 잘 짚은 듯하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닿고 닿지 않고를 떠나, 스스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다만 그 어떤 쓸모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커서 아직 우리 사회는 적당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

개인사적으론 처음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실감하는' 과학기술의 발명자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은 우리의 시대를, 흡사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한 시대를 우리가 '근대', 혹은 '산업혁명의 시대'라 부르듯이, 또 하나의 혁명의 시대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 현대를 일컬어 "영웅이 사라진 시대"라 했다. 허 모가 조조를 일러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했다는데, 본디 치세엔 영웅이 날 수 없는 법이다. 산업혁명이 낳은 자본주의의 구조가 얼핏 한계를 보인 지금이 바로 난세다. 난세가 영웅을 필요로 해서 나타난다기 보단, 난세는 영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작용한다. 빛과 물, 그리고 흙이 없다면 대부분의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것가 마찬가지로 영웅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영웅의 출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말인즉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것처럼, 재림한 그(the one)를 십자가에 다시 매달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우리 세계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정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

재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엔가 어디엔가 소용에 닿을 재능을 갖고 있다. 이는 공명정대한 신이 저 하늘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질량불변과 같은 자연 법칙에 의거한다.

 

(선생질로 먹고사는 한 친구가, 장래를 걱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소위 '불량학생'인 몇몇 제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장차 지구의 종말에 준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 아이들의 재능이 인류를 보전하는데 더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쓸모'란 항상 상황과 연동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 것인지에 대해선 100%의 확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0% 또한 존재할 수 없기에, 따라서 그런 아이들의 존재 가치는 유효하다. 그 개체수가 '지나치게' 증가하지만 않는다면.

물론 그 친구는 그다지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영웅의 그 대안이 궁금하다. 그는,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직 수긍하지 못한 누군가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2009년 9월 18일 금요일

로또, 남 얘기 하듯

"한 주의 희망, 로또"라는 카피를 언젠가 본 듯하다.

절묘하지만 아마 오래 쓸 수는 없었을 거다.

 

한 주의 희망이 정말 로또 뿐인 사람이 많은 사회라면, 가망이 없는 사회다.

 

언젠가 한 아우는 자기의 희망은 갓 태어난 자식과, 로또 뿐이라고 했다.

막 사는 나야 그렇다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녀석이 왜 그래야하는 건지.

 

 

2009년 9월 4일 금요일

네이버 웹툰, '짧은 댓글' 시스템의 긍정적 효과?

 

네이버 웹툰의 독자 댓글은 40자 제한으로 매우 짧게 제한되어 있다. 이는 독자의 의견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이며, 또 독자간의 소통을 차단하고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짧은 댓글은 더 많은 '사소한 참여'를 이끌어낸다. 다음 웹툰의 독자평이 아주 많아야 수백여 개에 불과한 것에 비해 네이버 웹툰의 경우에는 수천 건을 훌쩍 뛰어넘는 게 보통이다. 짧은 만큼 쓰기도 쉽고, 읽기도 쉽다.

 

예컨대 웹툰 작가가 작품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댓글을 읽는 데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한 시간여 정도라면, 네이버의 작가는 '더 많은 독자의 반응을 살핌으로써 독자반응의 평균값을 파악'해볼 수 있고, 다음의 경우 '더 많은 독자의 추천을 이끌어낸 우수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과연 어느쪽이 독자의 반응을 더 정확히 피드백하여 작가로 하여금 더 우수한 작품을 생산케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즉 더 우월한 시스템인가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네이버의 댓글 시스템은 '작가를 향한 독자의 팬레터' 성격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중앙집중적이다. 이에 비해 다음은 '독자와 독자' 사이에서 '감상평'이라는 2차 저작물을 육성하는데 주력한다는 느낌이다. 네트워크다.

 

...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이회창 총재의 부활?과 이슈 파이팅

"심대평 탈당"이라는 이슈가 생기자 덩달아 '자유선진당'과 '이회창'이 웹에서 유력 키워드로 떠올랐다. 자유선진당이 원내교섭단체 요건을 유지하려면 골치는 좀 아플지 모르지만 일단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던 그들이 하마평에 오른 것 자체가 이번 소동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들의 발언이 메이저 포탈 메인 기사로 다뤄진 게 대체 얼마만인가.

 

정보 홍수의 시대에 '무플'이란 '악플' 만도 못하다. 불구경보다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이라는데, 코딱지 만한 조직이 오순도순 너무 잘 지내봐야 일반 유권자에겐 그야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다...

 

소위 '친노신당' 창당에 부쳐 '민주개혁세력'의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너무 높다 보니 정말로 적전분열처럼 보일 지경이지만,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

막말로, 실체가 모호한 '민주개혁세력' 혹은 '진보진영'에 속해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이가 줄지어 민주당에 입당이라도 한다해도, 기존 민주당내 세력이 공천권을 '절반쯤 뚝 잘라' 내놓지 않는 이상 그 '단결'이란 것도 허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로 "각개약진 후 합종연횡" 하는 수밖에 없다. 약진 중에 터져나오는 소음을 통해 끊임없이 유권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슈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앞으론 "영남패권주의" 운운이나 "민주당 한계론" 따위가 아닌 진짜 정책 논쟁을 '우리' 사이에서 보고 싶다.

 

2009년 8월 29일 토요일

MBC 새 예능 <노다지> 인상비평(?)

 

※ 작위성이 튄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을 PD가 했다면 변태-가학물이란 비판을 못 면할 테고, <천하무적 야구단>처럼 MC 중 누군가가 들고 나왔다면 시쳇말로 "가식이 쩐다"고 할 만한 꼴이다.

특히 "나, 일밤 안 해!"라는 김제동의 귀에 거슬리는 절규(?)는 프로그램 중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프로그램의 제작방침을 사전에 통보받고도 녹화에 참여했다면 입 싸물고 협조할 일이고, 통보받지 못했다면 제작진에 충분한 항의를 했어야 할 상황이다.(폭우 속 진창 속 녹화, 뜬금없이 강압적인 마라톤과 선착순... 등)  한창 날리는 <1박 2일>이 요즘 부쩍 강조하는 '버라이어티 정신'은 그렇게 막장 상황을 묵묵히 견디는 게 아니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양분한 버라이어티 쇼프로에 김제동 또한 신선한 한 축을 맡아주길 열렬히 기대했으나, 이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 캐스팅 미스?

- 조혜련은 원샷 한 번 더 받아서 인지도 높여야 할 짬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욕심이 지나치다. 예컨대 1회에서 정육점 청년(?)으로부터 호감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면 젊고 귀여운 '보람'이나 섹시한 황보가 앞에 나서게끔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는 직접 나서(거기다 후속타는 김나영...) 저질 댄스를 작렬시킨다. 이수근의 '오동잎 댄스'나 김종민의 '피곤 댄스'는 단순한 동작으로 짧은 웃음 한 번에 끝낼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조혜련의 저질 댄스는 좀 자제했으면 한다.

그녀의 캐릭터는 말하자면 '여자 박명수'다. 이른바 '비호감' 캐릭터 중 하나다.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잘 구별하지 못하면 아주 쉽게 채널이 돌아간다.

 

- 최민용... 이건 왠 난데없는 조합인가. 제작진으로부터 "<1박2일>이나 <무한도전>처럼 개고생하는 프로입니다"라는 식의 통보를 미리 받지 못했다면 얼른 제작진을 고발하길 권하고 싶다. 하지만 만약 '각오 단단히 하고 나오라'는 귀뜸이라도 받은 바 있다면 좀 성실하게 녹화에 임해야 되겠다. <노다지>에서 최민용은 <1박2일>의 이승기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멀끔한 녀석이 가끔 어리버리하면 웃겨주는 캐릭터란 얘기다. 그러나 이승기와 달리 최민용은 나이가 많다. <1박2일>이라는 '야생' 버라이어티에 이승기가 끼어들게 된 것에는 "어린 승기가 얼결에 납치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있다. 사지멀쩡 '평균이상'의 캐릭터인 최민용이 굳이 이런 막장 버라이어티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그의 입지는 좁디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하무적야구단>의 오지호나 김준에게는 '그저 야구가 좋아서'라는 환상적인 핑곗거리가 있다.)

 

 

※ <1박2일>이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찾아 소개한다(+연예인들의 개고생)"이라는 컨셉이 가능한 것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가 제법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일수록 촬영에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노다지>는 연예인들을 말 그대로 길바닥에 굴리고 있다. (화면에 언뜻 드러난 병목현상 같은 건 깊이 파지 않기로 하자) '민폐'와 '민간의 자발적 협조'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노다지>는 과연 잘 타고 넘을 수 있을까.

 

 

※ 카메라 댓수가 모자라나?

- 편집이라는 후보정 작업으로 웃음의 포인트를 만발하게 하기 위해선 출연자 개개인의 순발력을 100%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촬영시간 내내 따라다니는 VJ의 중요성은 <1박2일>을 보면 알 수 있다.

 

 

※ 남자 vs 여자 과연 먹힐까?

버라이어티 쇼에서 게임은 점차 출연자의 '진지한' 자세를 요구하는 추세인데, 당연히 진지해지다보면 '망가지는' 상황이 끝없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그깟 한 끼 굶어도 그만일 <1박2일> 출연진이 왜 어묵 한 개에 눈이 뒤집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남대여 구도는 이래저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쇼 중에 게임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여자 출연자들이 '험한 꼴' 당하지 않게 배려하다 보면 정작 게임이 시시해진다. 또 남자가 여자를 괴롭히거나, 속여먹거나, 심지어 등쳐먹는 상황 등은 시청자를 불편하게 한다. 리모컨 집어들기 쉽상이다.

비록 조혜련, 황보, 김나영, 전보람이라는 라인업은 '망가뜨리기에' 별로 부담스러운 조합은 아니나, 여자 연예인의 망가짐과 시청자의 호응도에는 묘한 함수가 존재한다는 게 문제다. "예쁘고 귀한 연예인이 망가질수록 시청자의 호응도는 높아"지지만, 이 망가짐에 대한 '내성'이 해당 연예인의 미모에 거의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시청자 입장에서 '멀쩡한' 여자 연예인의 망가짐이 용납될 수 있는 한계치는 아마 <골드미스가 간다>의 최정윤이나 예전 <하이파이브>의 김민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진재영이나 예지원은 '멀쩡함'을 포기함으로써 망가짐을 소화해낼 수 있었지만.) 스타는 하늘 저 높이 떠 있어야 스타다. 그런 연예인이 시청자의 '연민'을 사게 되면 끝장난다. 예능 프로그램'만' 할 것이라면 모르되, 앞길 구만리인 젊고 예쁜 여인들이 선택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길이다.

그래서 <노다지>의 남여 대결구도가 과연 실속이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2009년 8월 23일 일요일

30년만의 국장이라는데

- 명칭은 '국장'인데 지난 '국민장'과의 차이를 못 느끼겠다.

 

- 슬픔이 통 전염되질 않는다...

 

- 영결식이 끝나고 굳이 동교동을 거친 것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가신'들에게 일종의 정통성을 인증하는 세러모니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 전 과정에서 먼저 떠난 노무현을 철저하게 배제한 듯한 느낌이다. 이를 동교동계가 민주세력 내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나아가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한 수작으로 해석하면 너무 짙은 색안경을 낀 것일까.

사실이든 아니든, 엄숙함만 강조되고 일반의 '참여'가 제한된 느낌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그의 후계자들의 한계인지도. 이를 호부견자라 해야 할까.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베라를 위한 변명 - 쓴 소리 못 참는 한국인

 

- 그러고보니 '베라'라면, 핑크플로이드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녀 아닌가? ㅋ

 

 

[관련 글]


 

 

1. 불면증과 스트레스

밤늦게까지 일한 후 2차, 3차로 이어지는 (원치 않는) 술자리 때문에 서울의 수많은 밤거리에서는 '훌리건 난동'에 비유할 만한 상황들이 펼쳐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것들이 '순수한 절망'에 비롯한다는 관찰 역시 날카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행동들이 그들 자신의 '절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터이다. 그저 자신은 가끔 '술자리'를 즐길 뿐이며, 이러한 '자리'들이 자의보단 타의에 의한 것임을 굳이 부연함으로써, 행여나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알콜 의존을 의미하는-조차 애써 부인할 것이다.

 

 

2. 아름답지 않은 서울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래된 건물은 서투르게 복원되었거나 이상하게 페인트칠 되어 있다." 이는 한국의 문화재를 찾을 때마다 드는 감상과 일치한다. 한국의 건축이 극단적인 실용주의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됐나. 그나마 지자체들의 활동이라도 없었다면 아직도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를 덮어쓴 채 방치되고 있었을까.

베라의 지적처럼 한국에서 '영원성'이란, 그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된 일부 성소(聖所)들을 제외하면,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고려되지 않는 낡은 가치가 된 것으로 보이곤 한다. 특히 건축이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더더욱.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가 붕괴 직전의 아파트보다 -'재건축'이라는 명분 덕에- 오히려 값싸게 거래되기도 하는 나라라니.

 

 

3. 잡지 부록

어떤 문화에 있어서 '불필요한, 무계획적인 소비'는 충분히 역겨워할 만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못생긴 얼굴'이나 '뚱뚱한 몸매'에 쉽게 드러내곤 하는 혐오감보다는 훨씬 건전한 것이다.

쇠락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근검절약'의 정신과, '럭셔리'란 말로 포장된 과시적 소비행태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2009년 대한민국에,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개념은 아직도 부끄러울 만큼이나 낯설다. 배보다 배꼽이 큰 '부록'이라는 기묘한 마케팅 기법은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이에겐 어처구니 없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갈수록 심각해지는 멀쩡한 성인 여성들의 소녀 취향 역시-

때론 일종의 성장지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처럼 한국의 성인여성들이 자신의 '원숙미'보다 '백치미'나 '동안'에 집착하는 현상에는 남성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하기는 그래봐야 실리콘을 코에 넣느냐 가슴에 넣느냐 정도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4. 애국심

우리의 애국심은 유난스럽다. 그 유난스러움을 아예 자각하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애정어린 지적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만큼이나.

어쩌면 이런 것 또한 좁은 곳에 오글오글 모여 가슴 가득 분노를 채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 거다.

 

 

베라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면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결혼이 '지옥' 또는 '사랑의 무덤'이 되는 까닭

다음은 결혼을 둘러싼 2009년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양상에서 큰 줄기만을 추린 겁니다. 당연히 침소봉대하고 성급한 일반화도 있습니다.

 

1. 성비불균형 문제

 

현재 소위 '결혼적령기'란 건 갈수록 늦춰지는 추세로, 남성의 경우 대략 30~35세, 여성은 27~32세 정도이지요. 그런데 딱 이 세대가 대한민국에서 '성비불균형'이 극심해지기 시작한 세대란 것이 문젭니다.

 

세계적으로는 여권신장과 함께 '혼전순결'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은 덕분에 남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섹스를 만족시키기가 용이해졌습니다. 여성분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하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남성의 경우 섹스가 해결된다면 굳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널리 씨(?)를 퍼뜨리려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지요. 상대적으로 여성은 임신, 출산과 함께 경제적으로 무력해지기 쉬운 탓에 '성실한 남성'을 배우자로 두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런 괴리를 없애기 위해 여러 선진국들은 '싱글맘'을 위한 갖가지 복지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지요. 헐리웃 로맨스 영화에서([이프 온리] 정도?) 동거 또는 그에 준하는 관계를 이미 갖고 있는 여성이 남성으로부터의 '프로포즈'를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고전적인 결혼과 연애관이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에 대해 보수적인 전통적 가치관이 그 힘을 잃지 않은 까닭도 없진 않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결국 '성비불균형'입니다. (덧붙여, '혼전순결'로 상징되는 고전적 가치관 역시, 그것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으며 또 더 무너질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대의 흐름인 것입니다.)

 

자연상태에서 출산 당시 성비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아주 근소한 차이로 많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활동적인 수컷들이 영유아기에 사고로 죽어나가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것을 배려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데- 어쨌거나 결혼적령기, 즉 생식적령기 쯤이 되면 거의 정확히 1:1로 맞춰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 성비가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현재 결혼적령기 남녀의 출생 즈음입니다. 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짝궁' 없는 남학생 많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신문과 방송에 실리기 시작했지요. 심지어 학급 편성 시 아예 '남자반'을 만들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이 자라나 결혼이란 걸 해야 할 시점이 오니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비혼(非婚) 또는 동거' 추세를 역행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더러워서 결혼 못 해먹겠네. 내가 무슨 머슴노릇 하려고 결혼하는 거냐."라는 식의 자조를 늘어놓게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한국남자들 결혼하기 어렵습니다. 여성으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간택을 받아야 간신히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요즘 여성분들 좀 까다롭나요.

 

 

2. 경제위기 담론

 

그런데 여성분들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것만도 아닙니다. 이유는 경제위기 담론, 즉 높아진 눈높이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가처분 소득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높아진 것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된 탓이 크며, '경제위기'란 말에 굳이 '담론'을 덧붙인 것은 이 위기감이 어느 정도는 허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는 까닭입니다.)

 

시쳇말로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하지요. 모두 우성형질의 배우자를 바라는 암수의 본능을 반영한 것입니다. 남성이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문제-'임신과 출산' 때문에라도 여성은 상대적으로 안정지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보시면 적당하겠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능력이란 곧 경제력을 뜻하는데, 이 경제력이란 것이 쉽게 갖춰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입니다. 현대 한국 경제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남성들을 '모든 걸 다 가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열패자(?)들로 갈라놓는 구조지요. 다시 말해 여성들이 취할 만한 '쓸 만한 남성'의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여성분들의 '쓸 만한 남성'관은 대략 이렇습니다. "난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냐. 집에 재산은 없어도 좋으니, 그냥 연봉 3000 쯤 되는 '조금' 안정적인 직장에, 남 보여주기 쪽팔리지 않는 정도의 외모였으면 좋겠어." 성실하고 자상한 성격도 갖췄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 남성의 몇 %가 이 '쓸 만한 남성'의 커트라인 안에 들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 소수의 '쓸 만한 남성'을 쟁탈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살인적인 다이어트 스케쥴을 견뎌내고, 알뜰하게 모은 저축을 깨 눈과 코, 피부 등을 '살짝' 업그레이드 합니다. 또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유행에 너무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싼티 나지 않고 세련되면서도 발랄한" 패션 센스를 발휘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겠지요. 이토록 어렵게 자신의 가치를 높였는데 아무 남자한테나 자신을 내줄 수 있나요. 정신줄 놓을 만큼 열렬한 사랑이 아닐 바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조건'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연애를 한두 번 해보고 나면, 아뿔사, 어느새 '내일모레 서른'입니다.

 

 

3. 트로피 와이프

 

비극(?)은 여기서 또 다시 시작됩니다.

미국 속어 중에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란 게 있습니다. "(부자가 얻은) 젊은 미녀 아내"를 뜻하지요. 우리에겐 어쩌면 '띠동갑 마누라'의 경우가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에는 노력과 재능, 행운 등 여러가지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공한 미혼 남성'이 되기 위해선 당연히 '연애질'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까요. 연공서열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남성이 '이만하면 그럴듯한 결혼식을 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겠다' 싶을 만큼 성공하고 나면,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을 넘어서 있기 쉽습니다. 어쩌면 그 성공의 과정에는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며 떠나간 가슴 아픈 인연도 하나둘쯤 있었을 수 있겠지요. '섹스'를 만족시키는 데 특별히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는 이들이 문득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입니다. 바로 '2세'와 바로 '트로피 와이프'.

'2세'야 상식 차원에서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이므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트로피 와이프'란?

 

흔히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에 소홀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자신에 국한된 얘기라면 사실은 사실입니다만, "옆에 어떤 여자를 끼고 다니느냐?"의 문제라면 얘기가 좀 다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했지요? 예, 아름다운 여친, 애인, 와이프는 성공한 남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즉 '트로피(trophy)'지요. 이들에게 성공이란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한 증거물로써 아름다운 배우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례로 '띠동갑 마누라'에 대한 남성 친구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런 도둑놈!" 그리고 바로 다음에 바로 따라 나오는 말은, "오~ 자식, '능력' 있네."

 

 

4. 결혼이 피곤해지는 이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요는 결혼에 임하는 남녀의 서로 다른 생각이 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상황과 맞물려 '행복하지 않은 결혼'의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a. 성공한 소수 남성

- 선택의 폭은 과거에 비해 더 넓어졌습니다. 온 세상 여성이 그들을 원합니다. 고르고 골라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합니다. '도둑놈'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까지만 해도 '하자'가 없었던 이들의 부인은 결혼 후 '얼떨결에 잃어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남편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남성 또한 어려웠던 날들을 함께하지 않은-즉 조강지처가 아닌- 부인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남성의 성공에 위기라도 닥치는 날이면, 곧바로 지옥문이 열립니다.

 

b. 평범한 다수 남성

- 결혼 자체가 어렵습니다. 야동 따위에 탐닉하다 어느날 애인이라도 생기면 처음엔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하지만 곧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항상 봉사와 희생을 요구받는다는 피해망상과, 어떻게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다 결혼 후 덜컥 형편이라도 나아지면 성공한 친구들의 트로피와이프가 부러워집니다. "애들 때문에"라도 마누랄 버릴 순 없으니 탱글탱글한 애인이나 하나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c. 어린 미모의 여성

- 세상은 이들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운이 좋다면(?)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결혼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박제가 된 자신의 신세를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친구들이 어느덧 하나둘 열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랑에 빠져듭니다. 덜컥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채 늙어가는 건 아닌가 싶어집니다. '더 젊고 예쁜' 여자들에 남편이 혹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세월을 이겨보려 안간힘을 써봅니다만 언젠간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충분히 좋지(?) 않다면 고르고 고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d 항목의 여성들과 동지가 됩니다.

 

d. 적령기(라고 쓰고 '고령'이라 읽는다)의 평범한 여성

- 주말에 할 일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죄다 애엄마. 서른두엇 전까지만 해도 "결혼 언제 할 거니?" 묻던 가족, 친지들이 이젠 슬슬 눈치만 봅니다. 찝적대는 놈들은 더러 있었지만 하나 같이 영 밍숭맹숭 합니다. 스스로를 '속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건을 따지고 싶진 않지만 가슴 속에 '불'이 통 붙질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적당한' 남자와 '적당히' 사귀다 '적당히' 결혼합니다. 결혼-임신-출산까지 순식간에 세월이 지나갑니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낳은 자식은 하난데 기르는 건 둘입니다. 한때 '남편'으로 불렸던 '큰놈'은 단념하고 '작은녀석' 기르는 재미에 삽니다. 다행히 녀석은 아직 자신에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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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의 남성과 연하의 여성 커플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전통적 가치관에 의한 고정'관념' 탓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어떤 커플의 결혼 성사 가능성이 남성의 경제적 자립도에 의존하는 구조가 반영된 것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곧 계급, 서열의 '정당한' 지표가 되며, 이는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 원칙(?)에 따라 결혼한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에게 구박 받는 경제력 잃은 남편은 이러한 관계의 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결혼은 여성의 성과 남성의 능력을 교환하는 거래였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흡족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각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지 잘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생의 한 순간도 치열함을 잃지 않았던 거인 한 분이 또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렇게 한 시대, 거인과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살아남은 난쟁이들의 시대는 앞으로 어떻게 풀려갈까...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고로 명복을 빌지 않고, 다만 한국사 가운데 가장 드높은  명예가 그분의 비석 아래 깃들 것임을 믿는다.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DC갤러들, <탐나는도다> 짤방 제작 시작.

 

- 위 포스터는 현재시간, 디씨갤러들이 만들기 시작한 짤방. 실시간으로 업뎃되며 갤러들의 의견을 수렵하고 있다. 온라인의 스캐빈저, 디씨갤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드라마의 흥행면으로 볼 때 일단 매니아층은 확보됐다는 얘기다. 입소문 타기도 좋은 조건이다. 디씨가 뭐냐. 키워의 헤드쿼터, 마이너리티의 본향 아닌가. 얘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현재 2화까지 방영되었고, 아직 한 번도 보진 않았지만 괜찮은 드라마가 간만에 또 하나 나온 모양이다. 꽤나 그럴듯한 순정만화 원작에, 사전제작 방식으로 상당부분 촬영이 이미 끝나 있단다. 이는 극의 구성이 그리 허술하지 않을 것이란 어떤 신뢰감의 근거가 된다.

 

 

- 블로그스피어를 둘러보건대, 이 드라마의 흥행이 어려우리란 전망의 근거로 '주말 방영'이 거론되고 있다. 글쎄 과연 그럴까?

 

- '주말 연속극'의 시간대는 가족 단위 시청자의 시간이다?

<커피프린스>나 <꽃보다 남자>류 드라마의 주요 타겟인 젊은 시청자층, 주말 저녁엔 데이트도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할 테니 리모컨을 부모세대에게 넘기는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요즘의 청춘들은 그리 한가하지가 않은 것 같다. 이 대대적인 성개방,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가엾게 시들어가는 청춘들 또한 만만찮게 늘어나버린 거다. 주말이라고 해봐야 TV, 인터넷, 온라인 게임이나 붙들고 있다가, 친구를 만날 때마다 '소개팅'을 부탁하는, '솔로부대'를 만든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 또한 이젠 '아줌마'도 젊다.

결혼 또는 출산을 '아가씨'가 '아줌마'로 변이하는 분기점으로 보았을 때, 이젠 '아줌마'들도 왕년의 아줌마들이 아니다. 나이로 보자면 30대부터 40대초반까지를 아우른다. 결혼과 출산 여부에 관계없이 '골드미스', '미시족' 등으로 불리는 이 세대의 여성 들 또한 이 드라마에 열광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젊었을 때' 한국 순정만화는 전성기를 보냈다. '이승기'나 '샤이니' 등의 '연하남 트렌드(쇼타콘?ㅡ,.ㅡ)'와 '초식남', '훈남' 등의 신조어 역시 이들을 위한 것이다.

 

- 더욱이 난 <솔약국집...>이 재미가 없다.

얼마 전부터 <1박2일>을 무척 사랑하게 된 까닭에 본방사수를 외치며 TV를 켜보곤 하는데(성공한 적은 별로 없다...;), 막상 <1박2일>이 끝나고 나면 채널을 돌릴 곳이 애매해지곤 했다. <솔약국...>을 본 적이 없어 대체 어떤 내용의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채널이 그것을 스쳐지날 때에도, 단 한번도, 어떤 신선함도 느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딴 게 '딱히 볼 게 없어 <솔약국...>을 본다'-는 시청자도 적지 않을 것이란 추측이다.

 

 

- 세대갈등과 계급갈등을 적당히 버무린, 그나마 피상적으로 다룬 시시껄렁한 드라마의 시대는 이제 그만 끝나줬으면 좋겠다. 국수주의, 강성대국주의를 민족주의로 포장한 과거미화 사극도 여간 남사스러운 게 아니다.

 

로맨틱코미디사극에 '문명충돌'이라... 재밌는 냄새가 난다.

 

 

펼쳐두기..

 

 

2009년 8월 9일 일요일

"생각대로 T"와 "쇼를 하라, 쇼"

"쇼하면 된다"라는 카피가 눈에 띄었다. 실제로 변경된 건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로써 '쇼'와 'T'라는 두 거물 사이에 "하라"는 사라지고 "된다"만 남았다.

("생각대로 된다"겠지 "생각대로 하라"는 아닐 것이므로.)

 

"하라"가 진취적-능동적-행동/과정 중심적이라면

"된다"는 수동적-피동적-자기/결과 중심적인 뉘앙스를 띤다.

"하라"를 자기 외의 대상에 대해, 나의 선택에 의해, 결과에 개의치 않고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된다"는 자기자신이 특정 상태에서 '보다 나은' 다른 상태로 변이하거나, 타자가 그 의지와 관계없이 '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워너비'라는 말이 있다. wanna be=want to be, 즉 '되고 싶다'란 뜻이다.

에리히 프롬은 근대 이후 언중들이 점차 'be' 대신 'have'를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남을 지적하면서 물질만능주의의 득세를 경계한  바 있다.

'want to do'가 아니라 'want to be'를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현대의 언중들에 대해 그라면 과연 어떤 분석을 해줄까.

 

 

 

 

2009년 7월 15일 수요일

조세희와 조세희

 

네이버 인물검색에서 '조세희'를 찾은 결과다.

전직 가수이자 레이싱 모델인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 옆에 코딱지만하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 소설 <난쏘공>의 저자 사진이 올라 있다.

조금쯤 씁쓸하다.

 

딴지 "[논픽션] 가출소녀들과의 동거 - 1화" 기사에 부쳐.

"[논픽션] 가출소녀들과의 동거 - 1화" 기사에 부쳐. 

딴지일보, 신상 공개를 원치 않는 어느 먹물

 

 

- 이런 얘기,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한 딴지뿐.

 

- "내가 더러워?"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아냐, 너희는 더럽지 않아.'라고 말해준들 이 아이들에게 씌워질 평생의 굴레가 깃털만큼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100만의 매춘인력은 이렇게 공급된다. 10년째 '노가다' 일당이 물가상승률에 비해 거의 오르지 않은 것처럼 매매춘의 대가 또한 별반 변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통계가 있는데, 세계 여러 나라의 '화대'는 그 나라 노가다 일당, 그리고 구두 한 켤레의 가격과 같다고 한다.

 

- 설사 얘들이 맘 잡고 '정상인'의 생활로 복귀한다 해도 결국 얻을 수 있는 직업이란 외국인 노동자들과 임금경쟁 해야하는 3D직종 뿐. 이런 아이들에게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견뎌낼 어떤 번뜩이는 '재능'을 요구할 수 있을까.

 

- 또 이런 아이들이 '정상인'의 모럴을 회복하는 건 어쩌면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다. 얘들이 시집이라도 가서 남편에게 자신이 원조교제하던 가출 청소년이었음을 밝힌다면 그 사실을 감당해낼 수 있는 남편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이냐. 밝히지 않는다면 평생 지고가야 할 그 마음의 짐은 누구를 문책해야 할까.

 

- 이런 아이들을 찍은 '아마추어 포르노'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아이들 둘을 '데리고 산' 어떤 싸이코가 찍은 걸로 추정된다. 그 새끼는 걔들에게 최소한 밥은 먹였을 텐데, 밥값을 그들만의 기묘한 방식으로 치른 그 아이들에게 "창녀가 되더라도 건강한 창녀가 되거라"는 것 외에 나는 감히 해줄 말을 못 찾겠다.

 

- 댓글 가운데 한 번 보고 말기엔 아까운 글이 있다. 김영하의 소설 <비상구>를 생각나게 하는 명문이다. 빌어먹을 딴지는 댓글은 따로 링크를 걸 수가 없어 기사를 보고 난 후 댓글 중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다. 제목은 "우리가 먹물을 대하는 방법"이다.

 

 

KBS <미녀들의 수다> 지난 방송을 보다가.

1. 한국 상인들, 서비스가 좋다?

-> 더 엄밀하게는, "돈 주고 받는 서비스가 좋다"라고 해야 맞다.

"소비자가 왕이다"라는 소비자주권주의는 반대로 "소비할 수 없는 자는 개천민이다"라는 말이 된다. 소비라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시스템은 당연히 소수에게만 우호적이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온 계집애들이 한국의 서비스업을 상찬하며 자국의 '불친절한' 업자들을 폄훼할 때면, 그 '3차산업'의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친절이라는 굴욕'을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택배가 하루만에 배송되고 편의점이 24시간 문을 여는 한국적인 '친절'의 이면에 최저생계비나 받으며 일하는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는 걸 그녀들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그녀들이 간혹 자랑스레 말하는 자국의 긴 휴가나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데.

나는 아직도 돈을 내고 어떤 봉사를 받는 것에 도무지 익숙해지질 못 한다.

 

 

2. 연예인의 봉사활동에 대하여(조민기가 출연한 편에서 단상)

-> 사람들에게는 묘한 편견이 있다. 한국인에 국한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연예인이 막 떴을 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뜨니까 쇼한다"고 한다. 아직 못 뜬 연예인이 하면 "뜰려고 쇼한다"고 한다. 떴다가 지고 나서 하면 "다시 뜰려고 쇼한다"고 한다. 결국 죄다 '쇼'라는 거다. 이래서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진정성'을 이해받기가 이토록 고되다. 김장훈쯤은 해줘야, 즉 본인은 전세 살면서 수십억쯤은 기부해줘야 겨우 쫌 하는갑다- 한다. 그래도 만약 김장훈 같은 이가 정치라도 할라 치면 "아 그동안 정치하려고 쇼했구나"할 거다. 그러니 결국 국회에 백로는 얼씬을 못하고 까마귀만 드글댄다.

정치가 좃같아서 혐오하는 게 아니라, 혐오하기 위해 정치가 줄곧 좃같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좃같은 경우가 다 있나.

2009년 7월 12일 일요일

MBC스페셜 '노무현이라는 사람'

MBC스페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방금 다시 보았습니다.

 

그분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한동안 피해다니다가 결국 다시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소리내어 엉엉 우는 제 꼴이 참 궁상맞다 생각하면서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몇년 동안 한 번도 그분을 마음에서 놓아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알고 있는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데까지 알려 보려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는데,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큐를 보다가 모르던 사실을 하나 알았습니다.

봉하마을 노짱의 집무실은 부엉이 바위가 곧바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더군요.

검찰(과 그 뒤에 줄선 흉흉한 민심들...)의 압박을 그곳에서 홀로 견디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어쩌면 젊은 시절에 벌써 그는 그 바위 위에서 생과 사를 고민한 적이 있었더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연스레 잊혀갑니다.

이 잊힘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2009년 7월 11일 토요일

차기 대선 후보.

1.

2012년 유시민 지지 확정. 승부는 경선에서 난다.

 

2017년(또는 개헌 여부 따라 2016년) 안희정 또는 안철수.

- 변수는 1) 안희정의 대중인지도가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2) 안철수의 행정경험(+성과)가 얼마나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인가.

 

- 안희정은 잘 생긴 젊은 정치인. 논변 좋고 철학 좋고. 충청 출신이라 지역감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게 강점인 동시에 약점. 인지도가 낮아 지지층이 얇다. "무능하고 말 많은 386"이라는 프로퍼갠더에 함몰될 위험 있다. 차기 유시민이 집권하면 곧바로 입각해 행정 실무를 맡아 경험을 쌓으면 된다.

 

- 안철수는 살아 있는 성자+유능한 CEO. 정계에 진출만 한다면 테크니션 출신 중에선 유례없는 대중적 지지도 획득 가능. IT시대에 적절한 리더십. 약점은 정치판이라는 곳이 발만 디뎠다 하면 똥물 뒤집어 씌우는 게 일상다반사라 작은 흠결만으로도 치명타 맞을 수도.

 

 

2.

딴나라당 대선은 보나마나.

박근혜 대세론으로 가다가 여의치 않으면 홍준표나 오세훈, 김문수로 바람을 일으키려 할 것.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  지지해볼 만한 자는 없음.

 

2002년 이후 미국 대선이든 우리나라 대선이든 승부는 경선에서 갈렸음. 경선 때 전국적 이벤트 못만들면 대선은 하나마나. 이벤트가 되려면 대립각을 세워야 하는데 정동영은 현재 정치 지형-지역구도 상 비빌 언덕이 없음.(그러게 참여정부 때 잘 좀 하지... 쯧) 80년 광주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당분간 호남엔 인물이 없음.

 

혁명없이 개혁다운 개혁 해볼 만한 인물 로드맵은 대략 이러함. 10여년 이후의 정치 지도자 깜은 나보다 어린 세대들이 골라줄 것임.

 

 

3.

한국 대통령 및 정치인 평균연령, 짜증나게 높음. 박정희 처음 집권할 때 46세였음. 정치인이 늙으면 나라에 활력이 사라짐. 50세 대통령+3~40대 비서진. 40~50대 장관. 이렇게 가는 게 적당함.

 

60대 이상은 은퇴해서 골프나 치고 낚시나 다니시는 게 나라에 도움이 될 것임. 실버산업 육성하고 얼마나 좋아.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는 구조적으로 말하자면 늙은이들이 은퇴를 두려워하고 386은 안주해버리는 바람에 청년층이 기회를 못 얻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음.

 

 

4.

따라서 친노그룹은 친노신당 창당으로 가는 게 옳은 길. 분열이다 뭐다 하지만 분열 없이 지지층 확대는 없음. 진보는 분열로 망하는 게 아니라 주적개념이 모호해서 망하는 게 맞음.

관심을 못받으면 팔리지 않고, 정치에 있어 안 팔린다 함은 지지층의 소멸을 뜻함. 빠돌이를 만들 만한 변별성이 없으면 지지층은 발생하지도 않음.

 

따라서 관심을 받으려면 싸워야 함. 싸우려면 포지션이 서로 달라야 함. 호남의 구 민주당 지지층과 유시민류의 친노-영남개혁파(?)는 충분히 포지션을 차별화 할 수 있음. 이는 분열이 아니라 지지층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

 

민주당 간판 걸고 영남을 쪼개는 건 절대 불가능. 이건 상식. 지역감정은 없앨 수 있는 게 아님.

 

반한나라당 세력으로써도 친노그룹이 영남을 쪼개며 독자세력화 한 후,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이벤트를 벌이는 게 적절한 선택임. 말하자면 소연정.

 

다소 급진적인 순혈 진보주의자들은 이 과정에서 그나마 가까운 친노그룹과 협력하는 쪽이 지지층 확대에 효율적임을 깨달아야 함. 그러나 그럴 리는 없을 듯. 몇몇의 하는 꼴을 보아하니 노통의 서러운 죽음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는 듯함...

 

 

 

2009년 7월 9일 목요일

지식인의 역할

칼럼니스트의 역할, 미디어의 역할, 멘토의 역할, 뭐라고 부르던 대중이 지식계급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예언(Oracle). 저 고대 주술사회로부터 현대라 불리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물질 생산에서 열외받고 때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미래를 내다보며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건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의한 것이건 간에 말이다. 온고이지신, 과거를 익혀 결국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이다. 비가 올 때를 예측하지 못하는 기우사는 불태워져야 한다.

 

그런고로 미래를 예측불가능한 혼돈 속에 내버려둔 채 함께 관찰하고자 하는 시선은 환영받지 않는다. 이 첨단의 과학시대에도 여전히 미신이 횡행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대중은 언제고 그들의 주술사를 찢어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죽음이 두려워 예언을 내놓지 않는 주술사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졌다. 그러니 누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겠는가.

2009년 7월 7일 화요일

미수다 메모. 20090707

미수다 메모.

 

- 한국인 다 됐다. 사실상 한국인이다. 좋은 감수성이다.

 

- 그들이 "한국인은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뒤집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디선가는 상식인 것이 또 다른 어디선가는 전혀 상식이 아닐 수 있고, 이는 비상식, 몰상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 납량 특집 따위,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특히 정말로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던가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하는 이들은 법정에서도 똑같이 증언할 각오하고 발언해야 할 것. 흥미거리에 그치는 것이야 탓할 바 아니지만 이런 식의 비합리적 가치관의 재생산은 위험하다. 연예인들, TV에서 정치적, 종교적 견해 밝히는 것에는 그리도 몸사리면서 과학을 모욕하는 데에는 태연자약하다. 문화가 바뀌어가는 듯 하더니 도로 이 모양이다.

 

※ 가위눌림 따위를 자신의 심약함 탓이 아니라 외부의 어떤 작용의 결과로 보는 건 "나 얼간이요." 하는 것과 같다.

 

- 연예인 패널들, 아싸리 중년 연예인들로 바꿔보는 건 어떨까. '미녀'들이 한국의 20대 여성 감수성에 너무 잘 적응해버린 나머지 특유의 '시각 차이'는 둔해진 반면 중년 패널들과는 전혀 공감, 소통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녀들의 입을 빌려 우리 시대의 중년들과 대화함으로써 우리 내부의 소통 채널을 하나 더 늘려보는 건 어떨까.

검찰을 진정 정치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

검찰을 진정 정치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
- 언론 보도시 검찰 이름을 내건다. "오늘 ㅇㅇㅇ 검사는 범죄사실을 포착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형식. 스포츠 스타, 연예인, 의회 스타도 있는데 왜 검찰, 의사 등은 안되나?
(그나마 의사는 어느정도 가능) 공직자의 공명심을 자극하면 공정성을 잃는다?

 

No. 인맥은 대중화되었다. 어찌보면 가장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 연예인일지도. 어딜 가나 사람들이 주목하기 마련이니까. 사생활은 더 은밀해지고 집밖에선 지극히 건전하게. 은밀한 사생활이라봐야 자기검열에 막히겠지만.

 

검사는 행정부 소속이면서도 사실상 하나하나가 독립기관으로 기능한다고 한다. ㅇ검사와 ㄴ검사의 정치적 견해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이 다름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권장되어야 하며, 이로써 그들의 명예욕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비뚤어진 권력욕보다는 엉큼한 공명심 쪽이 건전하다.

 

무엇무엇을 금지하는 방식은 언제나 더 많은 부작용을 낳음. 무엇무엇을 독려하고 상찬함으로써 유사한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쪽이 항상 비용 대 효율이 좋음.

2009년 7월 3일 금요일

DJ 오래오래 사시라.

1.

혹시 민주당은 DJ의 서거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민주당이 소위 '범진보진영'의 지지를 '한 큐'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슈는 이것 말곤 없어 보인다.

한국의 비좁은 정치 공간 안에서는 이미 더 커질 공간이 없는 거인이자 '살아있는 전설'인 DJ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발언을 어떻게 한들 어떠한 정치적 임팩트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바다에 한 컵의 물을 더한들 묽어질 리 없고, 한 사발의 소금을 더한들 더 짜질 리 없는 까닭이다.

 

 

2.

노짱이 즐겨봤다는 미드 <The West Wing>.

 

미드 <웨스트윙>을 보면, 치매'끼'와 노환에 시달려 오늘내일 하면서도 절대 사임은 하지 않는 어느 대법관의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의 대법관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한번 임명되고 나면, 죽거나 탄핵되거나 혹은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교체되지 않는다. 그 임명의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으나, 반드시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미드 <웨스트윙>의 정치 지형은 녹록지 않다.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대통령은 새로운 대법관을 확실한 진보성향의 판사로 임명하고 싶다. 게다가 대통령의 지지율은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결국 대통령은 늙어 죽어가는 대법관에게 사임을 종용하게 된다. 자신의 임기 중에 대법관을 임명해야 진보 성향의 판사로 그 자리를 메꿀 수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런데 대법관은 20여년 전 카터 시절 임명된 진보적인 판사이다. 그는 자신의 죽을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임하지 않고 끝내 버팀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미스테리는 에피소드 말미에 가서야 해소되는데, 자신이 사임해봤자 대통령이 결국 이도저도 아닌 인물을 그 자리에 채워넣을 수밖에 없음을, 즉 공화당이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허술한 인물을 새로운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음을, 이 현명한 늙은이는 이미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힘없는 대통령은 저 혼자서 아무리 좋은 인물을 세우고 싶어도, 그런 인물은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결코 인준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 대법관은 다시 무너져가는 몸을 이끌고 법원으로 돌아간다.

 

3. 

나는 DJ로부터 이 늙고 지쳤지만 꼬장꼬장한 대법관의 고독을 본다. 그의 집권 중 한때는 "그의 주변에 '인(人)의 장막'이 둘러쳐 있다"는 소문이 떠돌곤 했다. 조중동의 쑤석임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의심하면서도, 어쨌거나 그의 추종자를 자칭하던 이들조차 그에게 등을 보였다. 집권 말기 아들 비리가 터지자 등돌려버린 이들이, 지금은 그의 후계자를 참칭하며 현재 민주당의 주류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호남 민심은 아직도 DJ의 발언에 민감한데, 정작 DJ가 그토록 애착하던 민주당에 속한 의원 나리들은 진작 DJ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노짱의 영결실에서 오열하는 김대중

 

나는 이러한 점, 즉 'DJ의 노환'이 어쩌면 세칭 '친노그룹'으로 하여금 신당 창당의 노선을 망설이게 하는 몇몇 이유 가운데 큼직한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나라의 자랑인 어르신의 서거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아프고 또 망측한 소리지만, 그럼에도 예측은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나이 83세, 그의 건강은 신문 헤드라인에 언제 부고가 떠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 아닌가...

 

가장 바람직한 건 그가 앞으로도 10여년은 더 정정하게 생존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호남의 민심과 '친노그룹' 사이의 유대를 더 확실하게 복원해주고 떠나기를, 나는 희망한다.

MB의 임기 중 그가 세상을 떠나버리면 엉뚱하게도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시대정신은 방향성을 상실할 것이며, 나아가 엉뚱하게도 친노그룹이 정치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친노의 궤멸은 영남을 그대로 딴나라에 헌납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며, 어떻게든 영남을 포섭하지 못한 채 차기 대선을 치르게 되면 필패할 것이란 예측에 그리 대단한 통찰은 필요치 않다.

 

 

※ 이 포스팅을 올린 바로 다음날(7.3) DJ는 "노무현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말라"(오마이뉴스)라는 기사를 통해 지난 영결식 때 하지 못한 추도문을 공개했다. 이는 딴지의 김어준이 평한 것처럼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과 상처를 일거에 치유하고 다시 하나로 정서적 통합시킨, 절대 순간"의 연장선 위에 있다. (관련기사)

 

※ 2009. 7.6 일부 수정.

2009년 7월 1일 수요일

5만원권 신사임당 왜 박근혜를 닮았을까

1.

나는 박근혜가 싫다. 그가 나로부터 특별히 더 미움을 받아야 할 정치적 행위를 한 기억은 없다. 미움받을 짓이 아예 없었다기 보단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특별히 더' 미움받을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그리 싫은고 하니,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바로 그 점이다. 지난 대선, "열차 페리 구상"이라는, '애매 오묘한' 공약을 내놓은 것을 제외하면 그네를 상징하는 어떤 정치적 행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네는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필요한 몇몇 'veto' 행위에만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이의 지지율은 가장 높다. 최근 기득권 세력에게 쏟아지는 온갖 악재에도 흔들림 없이 국민의 약 30%가 그를 차기 대통령감으로 꼽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그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비토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마침 최근 새로이 발행된 5만원권 지폐에 등장한 신사임당이 정말 '우연찮게도' 박근혜를 쏙 빼닮았다. 나는 그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를 두고 닮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하루빨리

안과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적어도 이 사람들 만큼은 닮았다.

이형철과 조지 클루니


     

위의 신사임당 표준영정은 박정희 시절 이당 김은호에 의해 그려진 작품을 그의 제자 이종상이 이번에 다시 그린 것이다. 이 작품과 5천원 구권(舊卷)에 새겨진 율곡 이이 영정을 이당이 그렸고, 신권 5천원도 이종상이 다시 그렸다.

이당에겐 친일 부역의 혐의가 있어 신권 발행 즈음에, 또 그리고 이번 화폐인물 선정 때 다시 논란이 일었지만,(관련기사)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한 채 그대로 5만원권 지폐에 들어갔다. 

 

2.

그런데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었던 옛날옛적 세상을 떠난 성현들의 초상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려진 걸까? (참고자료) 

   

우리나라 '위인'들에게는 초상화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몇번의 큰 전란 사이에 많이 유실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성현들께선 어쩌면 초상화 따위로 남겨지는 것을 마뜩찮게 여겼을 수도 있다. 유학은 본디 삿된(邪) 것들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학문이었으므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선조 초상화의 화풍은 매우 객관적이었다. 못생겼으면 못생기게 그렸다. (관련기사) 

   

 

3.

따라서 나는 이당이 육영수를 모델로 신사임당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녀의 백성'들을 위했던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 대한 증언들이 꽤 여럿 남아 있는 것에 비추어 미루어 볼 때, 당시 육 여사가 매우 사랑받던 영부인이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이당은, 어떤 의혹을 품어볼 만한 유별난 이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육 여사를 신사임당 표준영정의 모델로 삼았을 수 있다.

 

동시대 가장 명망 있는 여성의 얼굴을 빼다박은 영정을 그려놓고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어처구니 없지 않겠나.

 

신사임당 표준영정과 故 육영수 여사

    

욕먹어야 할 자는 조강지처를 두고 '젊은 년들'과 놀아나다 총 맞아 죽은 그녀의 남편이지 그분께 무슨 죄가 있으랴. 그녀의 비극적 죽음에 어떤 비정한 사연이 더 숨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그분께는 아직까지 아무런 유감이 없다. (그러나 당신께서 떠나신 후 따님은 좀 잘못 자라난 모양이다.)

 

 

4. 

이러한 넘겨짚기 끝에 나는 대략 이러한 결론을 내려둔다.

 

 

a. 신사임당 영정은 육영수 여사를 모델로 그려졌다.

 

b. 이종상의 작품은 스승 김은호의 화풍을 닮는다.

 

c. 육영수 여사와 박근헤는 모녀 사이. 당연히 서로 닮았다.

    따라서 5만원권의 신사임당과 박근혜는 서로 닮게 된다.

 

이런 거다. 

 

 

여기서 내가 굳이 딴지를 걸고 싶은 지점은, 가장 지지도가 높았던 독립영웅인 김구를 제쳐두고 어쩌다 신사임당이 새로운 화폐인물로 선정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세 가지의 '음모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 차기 대선 땅고르기 작업, 박근혜 띄우기?

 

박근혜가 입은 후광은 위대한 독재자 박정희의 것만이 아니다. 결혼도 한 적 없고 아이도 낳아본 적 없는 그가 육 여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엉뚱하게도 현모양처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는 현실이 있다.

 

한때 그는 '철의 여인' 대처의 이미지를 도용하려 하기도 했는데, 이건 별 재미를 못봤다. 대처의 실각 이래 영국 보수당이 거진 20년을 야당으로 지내야 했다는 점과, 또 무엇보다 한국인은 외국 정치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캠페인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튼 이런 그의 얼굴이 최고급 화폐에서 날마다 우리 눈에 띄게 되면 그에 대한 지지율이 올라가면 올라가지 내려갈 일은 없지 않겠나. 누구도 최고액권에 침을 뱉거나 찢어버리려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해볼만한 담대한 캠페인이다.

   

 

2)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의 초상을! ...응?

 

상상해보라. 한두 해가 지나고 또 다시 10만원권 발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화폐 인물로 백범이 거론된다면? 아마 고액권 발행에 대한 저항은 지금보다 훨씬 덜할 것이다. 기득권의 무리들이 언제나 고액권의 발행을 환영해왔다는 사실과 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므로 따로 부연하지 않는다.

다만, 10만원권이 나와야 할 때쯤이면 차라리 0단위 하나를 절삭하는 화폐개혁을 한번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비밀금고의 검은 돈, 지폐뭉텅이들이 은행을 한번씩 거쳐야 하는 화폐개혁은 분명 저들이 반기지 않겠지만.

   

 

3) 대한민국은 아직도 양반, 즉 귀족 세력이 지배한다.

 

우리는 얼마전 서민 출신의 영웅 노무현을 잃었다. 김구 또한 평민 출신이다. 어째 현재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모델은 죄다 양반이고, 이씨(李氏)들이다. 세종대왕도 이씨, 이이, 이순신, 이황, 거기다 마침내 이씨의 부인이자 이씨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까지. 이건 뭐 이씨 종친회에서 발행하는 상품권도 아니고... 어쩌면 소중한 화폐에 평민의 얼굴이 들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힘센 사람들이 로비 활동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든다.

 

평민 영웅의 얼굴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 치고 화폐에 조국 독립의 영웅 초상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없다. 우리를 제하면 말이다. 조국 독립의 영웅을 이토록 푸대접하는 이유가 나는 매우 궁금하지만, 이 또한 굳이 캐내지 않아도 알 듯 하다.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유니클락

유니클락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볼까 했는데 벌써 누가 해놨다.

그것도 무려 소녀시대와 연관지어서 근사하게.

 

소원을 말해봐, 유니클락 - 소녀들의 유혹에 사로잡히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어 링크만 걸어놓는다.

 

유니클락이란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우수 블로거? ㅡ,.ㅡ;;

'틈새시장 공략'(?)의 첫 성과가 나왔다.

 

며칠 <The West Wing>에 푹 빠져 지내느라 업데이트에 소홀했는데, 반성해야겠다.

'제대로 된 리뷰'를 하기에 앞서 어제 써둔 일기를 붙여둔다.

 

 

미드 <웨스트윙>에 빠져 있다. 4년치를 며칠 사이에 '독파(!)'하려니 눈알은 빠질 것 같은데 멈출 수가 없다. 난 항상 적당한 데서 멈추는 데 문제가 있다.

 

두 가지로 중간 감상을 정리해두자면,

 

1. 당장 백악관에 들어가서 참모 노릇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2. 야식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는 길에 눈에 띈 넝마주이가 검은 머리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지하는데 2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 듯하다. 귀국 이후론 처음이다, 이런 느낌.

바로 그 미드 중독이다.

 

아 시바. '넝마주이'라니. 아무리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고도 하루 만원짜리 한 장 벌기 어려운 직업이라지만 뭔가 덜 경멸적인, 좀 폴리티컬리 커렉트한 호칭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이미 그런 호칭이 이미 존재한다면, 나란 인간이 대한민국 평균보다는 다소 나은 인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맞다고 볼 때, 그 한국어 단어를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역시 좀 더 화가 날 것 같다.

 

 

- 현재 7시즌까지 방영된 모양이다. 7시즌이라...... 폐인생활이 며칠 더... 쿨럭.

 

 

2009년 6월 11일 목요일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촛불집회로 시민의 의사를 알릴만큼 알렸으며, 결과는 촛불집회에 대한 면역력과 물리적인 억제능력만 키워줬다.

 

앞으로 집회와 가투에서는 대학생과 청년백수 100만이 주력이 되어야 한다. 더이상 '촛불소녀'들 등 뒤에 숨어 있을 면목도 없고, 투쟁의 세대 386은 왕년에 할 만치 했다. 더욱이 이들은 유사시 나라살림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장 서야 하고 앞장 설 수 있는 것은 아직 잃을 거라곤 '미래'밖에 없는 학생과 88만원 세대 백수들 뿐이다.

 

대학생 및 백수 제위께 고한다. 당신들 이대로 졸업하면 '88만원 세대'말곤 미래가 없다. 갓 졸업한 선배들 보면 모르는가? '지나간 좋았던 시절'에야 대학교만 들어가면 학창시절을 내내 탱자탱자 보내던 짱돌 쥐고 보내던 최소한 밥벌이는 했다. 허나 지금도 그러한가? MB 따라 운하 삽질하러 가던가 88만원짜리 비정규직 되는 길 뿐이다. 도대체 누가 나서서 나라를 바꿔주리라 기다리고 있는가?

촛불시위 귀칞다. 그냥 혁명하자.

종일 광장에 앉아 있다 추워서 그냥 들어왔다. 으슬으슬하다.

우리나라 시민 정말 문화적이다. 세계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울 만하다.

그런데 시발, 그 뿐이다.

 

나도 평화 참 좋아한다. 비폭력 운동? 내 정치성향은 간디 바로 옆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 이건 아니다.

 

먼저 집회 준비에 여러모로 수고 많으셨던 것으로 보이는 노조 여러분들. 정말 애 많이 쓰셨다.

그런데 집회의 아젠다가 너무 분산된다. 군중을 움직이려면 선언문은 세 줄이면 된다.

비극적 사례로 이것저것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대체 우리가 MB정부에게 원하는 게 뭔가?

민주주의를 살려내라고?

아, 뒈진 걸 어떻게 살려. 이미 뒈졌으면 어떻게 살리냐고.

 

지금 우리는 '살인의 현장'을 보고 있는 거다.

지금 어느 강도 새.끼가 선량한 시민을 칼로 찌르고 금품을 강탈하려고 하는데,

그 살인자에게 죽빵을 날리고 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인가, 아니면 피해자가 칼 맞아 뒈진 다음 강도가 유유히 사라지면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거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뭔가?

 

 

나는 구체적으로, "MB의 즉각적인 하야와 국회의 해산" 및 "임시국회를 대신할 가칭 '국가비상사태대책 국민회의'의 결성"을 요구한다. 여기서 사법부, 조중동, 니들은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일 좀 수습되고 나면 새로운 국회와 새로운 소비주권으로 박살을 내줄 테니.

비상국민회의의 주관으로 먼저 대선을 치르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 개헌을 국민투표에 붙여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 7공화국을 출범시키는 것이다.

 

그래. 바로 혁명이다.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던, 백성에 의한 혁명. '시민 혁명'!

 

요즘 세상에 무슨 혁명질이냐고 코웃음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나라 역사든 돌이켜 보라. 혁명 없이 수립된 민주 정부가 있었는가? 요즘 세상?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경제가 불안하다고? 그럼 MB한테 3년 고대로 맡겨두면 좋아질 것 같나? 간단히 말해 가능한 한 이른 시간 내에 MB와 그의 무리들이 경제에서 손 떼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에 이로운 거다. 이거 동의 못하면 촛불이 개뻘짓이란 얘기가 옳은 거고.

 

북한 땜시 안보가 불안하다고? 미국이 어젠가 그젠가 불가침 선언에 준하는 외교 제스쳐를 북한에 날렸다. 미국이 핵문제로 북 먼저 안 때리면 북이 남 도발할 이유가 없다. 남한에 혁명이 일어나건 말건 개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단 소리다. 최소한의 위협은 혁명이 나거나 말거나 국방에 충실할 국군이 알아서 막아준다. 나도 그러려고 군대 다녀왔고.

 

행정 공백? 지난 노통 영결식 기간 동안 실감 못했는가? 사실상 대한민국이 그 일주일동안 올스톱! 했다. 심지어 북핵조차 쌩깠다. 그래도 별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갑갑하도록 둔해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관료주의란 거, 하루 이틀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혁명쯤 일어난다고 바로 휘청대지 않는다.

타겟-MB, 이 십새!-이 명확하니 공무원은 맡은 바 일상에만 충실하면 된다. 넉넉잡아 일주일이면 끝난다.

 

지금 모든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교수들이 줄줄이 시국선언을 한다. 이 인간들 정작 필요할 땐 뭐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당장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인간들 뿐이다. 이 인간들마저 나서면 정부는 끝장난 거다. 4.19 때도 그랬고 6.10 때도 그랬다. 이들은 각 시민단체와 국회 대표단과 함께 비상대책 국민회의를 결성해 국회 권한을 대행할 능력이 있다. 이들은 정식으로 제7공화국의 국회, 즉 진정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할 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고, 제7공화국 헌법을 준비할 대통령 선거를 주관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시민이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는 것 뿐이다.

구체적인 행동은 청와대에 들어가 MB를 체포해 인천공항으로 압송해 강제 출국시키는 거다.

이 가운데 어중간한 '타협'의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2009년 5월 30일 토요일

적대적 대북 정책이 북핵 문제를 악화시키는 이유

적대적 대북 정책이 북핵 문제를 악화시키는 이유

http://beholder.textcube.com/97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알려지고 난 바로 다음날, 북한은 2차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여기서, 북이 핵무기 개발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실험, 즉 무력시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핵무기의 개발 및 실험준비는 최소 수주에서 수개월 전에 이미 완료되어 있었고, 단지 타이밍을 기다리던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의 자결이 하나의 판단 근거가 되었으리라고 보는 편이 비교적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집권기간 동안 북측에 제공된 '인도적 지원' 가운데 일부, 혹은 상당 부분이, 저 극우꼴통들과 여러 알바 제위께서 게거품 물어가며 주장하시는 바와 같이, 핵개발에 전용(轉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도출된 '좌빨' 정권이 북핵 사태를 만들었다는 그들의 문제인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라고 하는 두 정부, 즉 10년에 걸친 민주정부가 북한에 지원을 하였든 하지 않았든 관계없이, 북이 언젠가는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으리란 예상은 그리 큰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핵무기 기술 자체는 1940년대에, 즉 오늘날에 비해 과학기술력이 턱없이 모자랐던 시절에 이미 개발될 수 있었던 바, 상대적으로 높은 과학기술력을 요구하지 않는 낡은 기술입니다. 다만, NPT의 제제를 회피해가면서 진행해야 하는 연구와 실험 등 기술외적인 난관들이 몇 있었을 뿐입니다. 2차대전 시기 독일의 V2로켓 개발에 사용된 과학기술이 현대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기술보다 첨단 기술이었다고 믿는 이가 있다면 그를 제정신이라 볼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그들의 핵무장은 조금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시간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애당초 자금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특히 북한 인민뿐만 아니라 전체 지구 인류의 악몽과 같았던 조지 W. 부시의 그 8년간은, 북한의 기득권층으로 하여금 당분간 핵개발보다 더 나은 생존전략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해주었을 겁니다. 여기서 더 나은이라 함은 비용 대비 효과가 높다는 뜻으로, 이러한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전략 역시 효율성을 강조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 선택과 집중 전략을 더하면 북한의 핵개발이 어째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인지 납득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뿐, 핵은 사실 남한과는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북한 경제 시스템 붕괴의 원인을 짚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북한 인민의 지나친 민족주의입니다.

민족국가주의적 한계, 즉 전체주의는 인민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인민 내부의 다양성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다양성의 감소는 혁신과 진보를 위한 필수 동력인 창의성의 감소로 이어집니다. 이를 과학에서는 생물군의 종적 다양성 증가가 바로 그 생물군의 진화를 뜻한다고 설명하는, 진화론의 원리와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유전적 다양성이 생물개체로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외부 변수에 대한 내성을 보장함으로써, 장기적으로 해당 생물군의 생존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즉 다양성은 국가의 보험입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은 지극히 민족주의적 사고에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극우적입니다. 종북주의라 비판받곤 하는 민주노동당이 끝내 진보신당의 좌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극우와 극좌가 어찌 이념 정당 하나 안에서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민족을 항상 개인의 자유에 우선한 북한의(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는 세계 정세의 급격한 변화라는 외부 환경에 적응할 수 없게 함으로써 세계라 불리는 생태계에서 북한을 도태의 위험 속에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북한 정치 시스템인 공산당 독재입니다.

심지어 최고권력이 세습되기까지 한 북한 고유의 전근대적 봉건성은 북한 인민의 자율과 창의를 억압해왔습니다. 인민 가운데서 똑똑한 놈을 뽑아 공산당에 입당케 하고 그 공산당이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공산당 독재 시스템은 역시 진화의 원리인 다양성 증가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양반 계급 가운데서도 사림이 권력을 독점했던 조선이, 당시 문명국 전부가 빠져든 산업혁명, 즉 부르쥬아 혁명에서 홀로 비켜서 있다가 졸지에 망국에 이르게 된 데에는 봉건주의 독재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외부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 이른바 '운동권' 지도부의 봉건적 작태는 많은 내분의 불씨가 되었고 이는 아직까지도 일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봉건주의는 권력을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시스템을 만듭니다. 그리고 집중된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며, 부패는 또다시 권력의 독점을 공고히 합니다. 이러한 부패한 권력의 악순환은 개별 인민의 자기개발 욕구를 현저히 떨어뜨림으로써 창의성의 발현 가능성을 낮춥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창의성이 감소한 조직과 다양성이 줄어든 생물군은 (장기적으로) 반드시 멸망하고 멸종합니다. 그나마 북한이 여태 허덕이면서라도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기 중국과 소련의 공산동맹 논리에 따른 대대적인 원조와,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자질의 지도층이 있어 부패를 상당부분 통제할 수 있었던 데 기인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세계적으로 냉전논리와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남한의 군사독재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안습하게나마 같은 방식으로 부패의 확산을 막아왔습니다.  소비에트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이 이어지자 곧바로 북한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변했습니다. 극우꼴통님하들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체주의와 봉건주의,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맞물리면서 북한의 경제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누적시켜 왔습니다.

봉건주의와 전체주의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인 전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 과정을 생략한 채, 선택과 집중' 전략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리고 무제한 경쟁시대로 돌입한 현대의 세계 질서 안에서 봉건주의와 전체주의는 각각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인 시스템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함께 어우러지는 정치 시스템이 바로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헌법에 적시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누적된 비효율성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거의 끊어진 상태에서 국제자본의 대북 경제봉쇄를 맞이하자 북한의 내수시장마저 철저히 붕괴시키기에 이릅니다. 북한에서 대량 아사사태 난 게 언제쯤인지 기억하시겠지요.

석유나 금과 같은 환금성 천연자원이 거의 또는 전혀 산출되지 않는 북한이 주체사상, 즉 폐쇄적 지역경제 시스템을 선택한 데서부터 성공할 여지가 전혀 없었던 셈입니다.

 

여기까지는 자칭 보수인 극우꼴통님하들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로 “'좌빨' 정권이 북핵 사태를 만들었다 주장의 오류를 설명하겠습니다.

   

1. 남과 북 사이엔 소통이 부족했다.

2. 소통이 부족하면 오해가 쌓인다.

3. 오해가 쌓이면 불신이 커진다.

4. 불신이 커지면 갈등 해소의 비용이 증가한다.

5. MB정권은 남북간 소통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높이고 있다.

 

 

1. 남과 북 사이엔 소통이 부족했다.  

DJ는 평생에 걸친 혼신의 노력으로 남북 대화의 물꼬를 텄습니다. 노벨평화상은 이 노력에 대한 범 세계적인 인증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나라당은 노벨상 로비를 운운하며 소위 대북송금 특검을 제기하였고, 이 때문에 남과 북의 소통은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이는 정권 초반부터 거부권 행사라는 초강수를 둘 수 없었던 노무현의 외로운 결단이었다고 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다소 아쉽기는 해도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할 만한 치명적 가치 포기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결단은 실책이라고 할 수도,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애당초 적극적인 지지층 없이 집권한 천출의 "노무현 때문"이라고도 하겠지만, 저는 오히려 그의 지지층이 되려 하지 않은 그 '누군가들을 문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분께서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지만요

 

어쨌거나 노무현은 과연 노무현이어서, 10.4공동선언을 통해 마침내 이 소통의 끈을 복구했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지만, 6.29선언을 다소나마 보완도 해냈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북의 도발에 전쟁 위협을 느끼지 않는 세상, 즉 상당한 수준의 평화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봄날은 가고, 극우꼴통들이 덜컥 정권을 잡았습니다. 곧 소통의 끈은 아작나기 시작했습니다.

  

 

2. 소통이 부족하면 오해가 쌓인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의 대부분과, ㅈ갑제-ㅈ중동(5월 23일 이후 이 두 하등한 것들에게는 경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극우꼴통들, 즉 '안티-DJ', '안티-노무현주의자'들은 북한과의 소통을 절대로 거부합니다. 한국형 파시즘 논리의 도그마입니다. 그들은 "빨갱이"와는 절대 소통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은 상식과 대화가 통할 수 없는 미치광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가능한 이른 시기에 김정일과 그를 따르는 악의 무리를 한반도에서 축출해내고 아울러 어쩌면 그곳의 굶주리는 인민들을 구출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까지 불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통일이란 오로지 "주석궁에 땡크를 몰고 들어가야"만 그것을 통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며, 평화통일이란 공산당 합작의 궤변일 뿐, 북진통일론 외의 대안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통의 부족에서 비롯한 '오해'일 뿐입니다.

 

그들이 제 마누라보다 더 사랑하는 저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은, 이러한 소통을 그것의 크기와 형태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금지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법, 즉 악법(惡法)의 대명사입니다. 그럼에도 이 악법의 완화 또는 철폐에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유는 이러한 오해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 즉 냉전적 사고방식의 원인을 짐작해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합니다. 그들이 즐겨 들먹이는 '죽창'과 '인민재판'은 바로 그들의 "빨갱이"에 대한 집단공포증(massive-phobia)의 상징입니다. 이 공포증은 턱없이 과장됨으로써 대다수 선량한 보수에게조차 피해망상증과 과대망상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포는 항상 증오와 혐오를 낳습니다. 인간은 그 공포의 대상이 만만하다면 증오를,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면 혐오를 드러냅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위 극좌와 극우가 서로를 증오하는 것과, 국민의 대다수가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것에는 이러한 오해의 확대재생산 시스템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오해들에 대한 책임의 대부분은 반란군-군사독재 정권의 잔당들과 그들에 결탁한 좆중동에게 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공포증이 악화되는 방향으로만 대중을 몰고 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 내부에서조차 그 갈등의 폭이 너무나 넓어져버렸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선 한국전쟁 세대가 모두 죽든가 사라져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매우 끔찍하고도,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미래전망의 가장 큰 근거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조선 인민의 미제국주의에 대한 격렬한 증오 역시 김일성 정권에 의해 상당 부분 조작되었으리라는 혐의가 큽니다. 이는 남한 국민의 김일성 부자와 공산주의, 즉 빨갱이에 대한 증오가 박-전으로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조작된 것과 다르지 않은 시스템입니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맑스주의라는 이념의 상호적대적 역사에서도 드러나 있습니다. 맑스주의의 유물론과 기독교의 절대신 개념은 그것을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결코 상생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더는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서로 양보하거나, 무시할 뿐이지요. 이념이 곧 종교이고 종교가 곧 이념인 까닭입니다. 맑스주의 운동과 초기 기독교의 방법론 사이에 그토록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까지를 고려하면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해가 쌓이면 불신이 커진다. 

한국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민족이 서로에 대한 학살을 그토록 빈번하게 자행한 전쟁은 인류사에 전례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외부적인 이유로 해서 소통과 타협이 불가능했던 민족주의와 친일파,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맑스주의와 조선말의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서로 말이 통할 수 있었음에도 말을 통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국인이 이놈들은 말로 해선 안돼라며 쉽사리 소통을 포기하고 몽둥이를 꺼내 들게 만드는 역사적 트라우마입니다.

 

그렇게 오해가 쌓이면 갈등은 더 자주, 더 쉽사리 발생하고, 더 빨리, 더 커집니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또 다른 불신의 씨앗이 되어 또 다른 오해의 열매를 맺습니다. 불신, 즉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어떠한 오해도 풀리지 않고, 따라서 어떠한 갈등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뢰 없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들 간에 발생한 갈등을 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일컬어 '전쟁'이라고 합니다. 극우꼴통들이 수시로 전쟁불사론을 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 불신이 커지면 갈등 해소의 비용이 증가한다. 

그러나 전쟁은 소득에 비해 비용이 너무나 큰 갈등 해결 방식입니다. 전쟁은 정작 갈등은 대개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두고, 그 소득은 오로지 살아남은 자들, 즉 비용을 치르지 않은 자들에게만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구전은 왕서방이 먹는 격이니, 참으로 좆같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북 관계 악화일로"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은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한 소통이 끊어지고 신뢰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소한 오해가 빚은 작은 갈등조차 삽시간에 대형 무력 충돌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도록 키워버리는, 몹쓸 놈들의 몹쓸 짓들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국지전이 됐든 전면전이 됐든 무력 충돌이 실제로 발생하게 되면, 그 핏값은 결코 저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이 경우, 외국계 자본은 잽싸게 KOSPI에서 대거 이탈할 것이고 따라서 주가는 폭락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을 대비하려는 각개 가정의 생필품 사재기에 따라 물가가 폭등합니다. 한반도 유사시 주가폭락과 물가폭등,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극빈층은 곧바로 지옥 언저리를 떠돌게 되고, 서민층은 극빈층으로, 중산층은 서민층으로 삽시간에 몰락할 것입니다.

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기회 잘 잡아 한 몫 챙기고 싶어하는 악당들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한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적이라고 DJ와 노무현이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입니다. 대화와 타협. 상식과 원칙. 평화와 번영.

 

 

5. MB정권은 남북간 소통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높이고 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하면서, 일각에서는 배신이라는 둥, 남북간 대화의 끈을 놓아버린다는 둥, 우려하는 소리도 높았습니다. 왜곡과 곡해가 일부 있었을망정 크게 보아 올바른 시각에서 비롯한 접근이었습니다만, 올바른 정치적 선택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헌법적 권한을 보유하고 있던 노무현을 적지 한가운데 덜렁 고립시켜 놓는 결과를 초래했고, 마침내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소통의 부족이 낳은 오해와 불신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MB정부가 들어서자 이 소통의 끈은 놓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아니 끊어내 버렸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정책과 정치적 선언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북핵은 본디 대포동과 같은 장거리 미사일 기술 개발과 함께 미국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핵탄두야 아무 데나 탑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장거리 미사일 계획에 북한이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공식적인 핵보유국가가 될 북한은, 미국을 향해 우리를 건들면 니들도 도시 한 개는 날아갈 걸 하는 식의 공갈을 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조선 인민의 정서는 영화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그럴듯하게 묘사된 바 있습니다. "국방군은 비키라, 이 말이야! 미제놈들이랑 제대로 한 판 뜨게!"

 

북한의 미사일 기술은 더 이상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지 않아도 한반도의 모든 곳을 타격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남한으로선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면 모를까 이미 보유하게 된 마당에 더 이상 그들의 막장 드라마를 찍어야 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이번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직후, 북은 2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계급장 떼고 원터치 함 뜰까?라며 대들고 있습니다.

 

MB정부는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압박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북측이 보기에 이는 MB정부가 김정일 및 그들의 수뇌부를 결코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파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려면 무려 핵실험이 남한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기 위한 김정일의 조포(弔砲)였겠습니까?

노무현조차 살려두지 않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김정일이 어떠한 기대인들 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이제 한반도는 그야말로 휴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준전시 체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 뒤따를 모든 비극적 결과에 대한 책임이, 대북 관계에 긴장을 높이는 방향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있음을 분명히 해둡니다. 또한 이들을 지지해 정권을 잡게 해준 극우꼴통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알바놈들 역시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알바 제위와 정치적 무관심을 자랑으로 아는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말씀 세 가지를 덧붙입니다.

 

1.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기회를, (아 ㅅ발. 왜 나의 영웅의 죽음이 어떤 이들에겐 기회가 되는 건지, 이런 ㅈ같은 현실이 ㅈ나게 혐오스럽지만) 말하자면 전쟁놀음 좋아하는 극우꼴통들을 한꺼번에 궤멸시킬 절호의 찬스를 그냥 흘려 보낼 생각이라면, 그 참에 쌀 한 포대, 통조림 깡통 하나라도 사다가 다락에 쌓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DJ와 노무현이 97년과 02년 대선에서 이회창과 맞붙으면서, "이회창이 당선되면 전쟁난다"라고 선동한 것은 순전히 구라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총재가 나름대로 존경받을 만한 원칙이 있는, 최고급 법률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를 둘러싼 극우꼴통들이다. 그가 정치에 입문할 때 하필이면 그런 꼴통들과 손잡은 것은 그의 인생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사정과 사연도 없진 않겠지만, 덕분에 그는 결코 대권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이회창이란 이름의 대통령이 취임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극우꼴통들과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는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고, 스스로 놓을 리도 없거니와. 손을 놓는다 해도 그 순간 그의 정치생명은 쫑난다.' 그는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에는 참 잘 어울리는 법조인이었고, 따라서 누구에게나 상당한 존경을 받는 행복한 말년을 맞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제법 안타까운 일이다.

  

2.

아무튼 막상 전쟁이 나면, 극우꼴통들 또한 마냥 안전하진 않다. 개중 쩐 없는 놈들, 이를테면 알바들은 얄짤없이 나와 함께 총알받이로 투입될 것이다. 아, 난 빠질 수도. 동원 끝난 지 오래. 부른다고 갈 일도 없겠지만.

더욱이 나의 군복무 경험에 따르면 "전쟁이 나면 소대장과 행보관부터 쏴 죽이겠다"는 전우들이 적지 않았다. 제 아들 군번, 손자 군번, 증손자 군번 증증증증손자 군번의 장정들이라고 해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유사시 국방군 전력의 핵심을 담당할 예비역 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전시 동원령이 떨어지면, 이들 예비역 가운데 대부분은 역시 습관대로 소집령에 순순히 응할 테지만, 그 와중에 예비군 동대장이라든가 하는 몇몇 쯤은 뒷통수에 환기구 열어놓게 되는 걸 각오해야 할 것이다.

  

3.

한편, 북핵에 대해 남한도 얼른 미국의 핵우산 아래로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극우꼴통들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진다. 미국의 핵확산 방지 구상을 결코 벗어날 수 없으므로 남한의 자체 핵무장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설사 가능한들, 김정일이란 '빨갱이'가 도저히 말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전쟁 미치광이'라는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남한의 핵무장은 그야말로 영양가 없는 뻘짓이다. 상식적으로, 굳이 칼춤 추고 있는 미친놈 옆으로 바짝 붙어 칼춤을 추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미친놈이라고 불러야 적절하지 아니한가? 미친놈 같아 보이거든 혼자 놀게 내버려 둘 일이지 왜 자꾸 옆구리를 쑤석대는 건지...

이 상황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로 기어들어 가겠다는 주장은 기껏해야 미국의 총알받이, 그것도 핵무기의 총알받이 노릇을 자청하겠다는 논리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4.

알바놈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에서 모처럼 길게 썼다. 생각 좀 하고 살자. 니들은 왕서방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