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될 수 없는 사실 또는 사건에 대해 '이랬으면 저랬으면'하는 미련을 갖는 행위를 찌질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분명 이건 찌질한 게 맞다.
세태(世態)는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선 잊어버리는 것을 '쿨함'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한때 나 또한 동조했다.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모든 행위의 가치를 판단해줄 존재는 결국 나뿐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상이 내 눈꺼풀과 함께 닫힌다는 상상은-분명 절망의 한 근거였으되 한편- 어린 나를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쿨함'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루키'(적인 것)를 쿨함의 적당한 표본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몇몇 어설픈 흉내쟁이들은 그가 68세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68은 곧 우리의 386이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 쳐부숴야 할 적(敵)이 명확했던 시대.
물론 이 나약한 용기로 저 터무니없이 비장한 '구국의 강철 대오'에 서지는 못했을 테고,
또는 (십대 때부터 이문열의 세례를 받은 자로서) 딴에는 '시대와의 불화'를 고민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바위에 던져져 깨어지는 달걀 같은 삶을, 자긍할 수는 있었을 것 같다는 얘기.
나는 노무현의 구두닦이가 되고 싶었다.
이젠 요절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스무 살에 죽는다면 박종철처럼,
서른 살에 죽는다면 예수처럼, 아니면 하다못해 기형도처럼이라도 죽어야 했다.
내 나이 마흔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쉰 예순 일흔은, 어휴.
...
서른 두 해 남짓 살아오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있는 집'은 형제가 많더라. 친인척 두루두루.
3남매 정도를 기본으로, 6, 7남매도 적지 않다. 당연히, 먹고살 만하니까 가능한 선택이다.
최근의 저출산 경향은 우리의 유전자 풀로부터 빈자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배제해나갈 것이다.
형제는 50%, 사촌은 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기대값)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1:28)"는, '실존(實存)'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낳고 길러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설령 본인이 부정한다 할지라도, 가장 강렬한 충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욕망을 초월할 만한 그릇이, 나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세상에 남겨질 내 유일한 피붙이가 될 조카의 성장을 마냥 행복해 할 수가 없다.
나는 시샘하고 있다.
나는 찌질하다.
찌질한 소리는 여기까지.
인격은 환경의 산물인 동시에 선택의 결과다.
'자아(自我)'를 '분자 단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경우, 주체성이란 실재할 수 없지만,
개체로서의 인간은,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해두는 편이 이해가 편하다.
밈(meme)이란 개념이 있다.
이해가 편하다는 말은 밈 복제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내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gene 아닌 meme이다.
다행스럽게도, '쿨게이'의 유행은 곧 지나갈 듯하다.
'곧'이 1~2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예정된 사실'이 누구에게나 다행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다.
누가 먼저 GG칠 것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사진=이석주)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최승자,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