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중요한 건 누구의 유전자가 남겨지느냐. 이다.

가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변경될 수 없는 사실 또는 사건에 대해 '이랬으면 저랬으면'하는 미련을 갖는 행위를 찌질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분명 이건 찌질한 게 맞다.

 


세태(世態)는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해선 잊어버리는 것을 '쿨함'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한때 나 또한 동조했다.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내 모든 행위의 가치를 판단해줄 존재는 결국 나뿐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상이 내 눈꺼풀과 함께 닫힌다는 상상은-분명 절망의 한 근거였으되 한편- 어린 나를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쿨함'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루키'(적인 것)를 쿨함의 적당한 표본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몇몇 어설픈 흉내쟁이들은 그가
68세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하다.
68은 곧 우리의 386이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 쳐부숴야 할 적(敵)이 명확했던 시대.
물론 이 나약한 용기로 저 터무니없이 비장한 '구국의 강철 대오'에 서지는 못했을 테고,
또는 (십대 때부터 이문열의 세례를 받은 자로서) 딴에는 '시대와의 불화'를 고민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최소한 바위에 던져져 깨어지는 달걀 같은 삶을, 자긍할 수는 있었을 것 같다는 얘기.

나는 노무현의 구두닦이가 되고 싶었다.

 

 

 

이젠 요절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스무 살에 죽는다면 박종철처럼,
서른 살에 죽는다면 예수처럼, 아니면 하다못해 기형도처럼이라도 죽어야 했다.
내 나이 마흔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쉰 예순 일흔은, 어휴.

 

 

 

...

 

 

 

서른 두 해 남짓 살아오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있는 집'은 형제가 많더라. 친인척 두루두루.
3남매 정도를 기본으로, 6, 7남매도 적지 않다. 당연히, 먹고살 만하니까 가능한 선택이다.

최근의 저출산 경향은 우리의 유전자 풀로부터 빈자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배제해나갈 것이다.

 

 

형제는 50%, 사촌은 25%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기대값)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기 1:28)"는, '실존(實存)'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낳고 길러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욕망은, 설령 본인이 부정한다 할지라도, 가장 강렬한 충동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욕망을 초월할 만한 그릇이, 나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세상에 남겨질 내 유일한 피붙이가 될 조카의 성장을 마냥 행복해 할 수가 없다.
나는 시샘하고 있다.

나는 찌질하다.

 

 

 

 

찌질한 소리는 여기까지.

 

 

 

 


인격은 환경의 산물인 동시에 선택의 결과다.
'자아(自我)'를 '분자 단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경우, 주체성이란 실재할 수 없지만,
개체로서의 인간은, 주체적 선택이 가능하다고 해두는 편이 이해가 편하다.

 

밈(meme)이란 개념이 있다.
이해가 편하다는 말은 밈 복제가 용이하다는 뜻이다.

 

 

 

내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gene 아닌 meme이다.

 

다행스럽게도, '쿨게이'의 유행은 곧 지나갈 듯하다.

'곧'이 1~2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예정된 사실'이 누구에게나 다행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다.

 

누가 먼저 GG칠 것인가. 당신인가 나인가.

 

 

 

 

                     (사진=이석주)

 


많은 사람들이 흘러갔다.


...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최승자,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

 

 

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노무현 종교화 프로젝트

 

 

별로 오래지 않은 과거에, '교주(敎主)'라는 직업이 앞으로 전망이 있겠다 싶어 그것이 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성공하는 교주의 7가지 습관>이란 게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주제를 정해놓고 꽤 진지하게 탐구했더랬다. 별 성과도 없었고 결국 7가지를 채우지도 못했지만, 과거의 몇몇 성공한 교조(敎祖)들의 사례들을 돌아보며 나는 몇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첫째는 "교조는 생전에 영화를 누리지 못한다"였다. 예수는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혔고, 붓다는 왕좌를 버리고 광야를 떠돌았다. 공자는 한 번도 뜻을 펴지 못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다. 젊어 죽건 늙어 죽건 제대로 된 교조라면 육신의 삶이 고난으로 가득차야 한다.

 

둘째는 "교조는 저작을 남기지 않는다"였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플라톤이 썼고, '복음'은 열 두 제자들이 남겼으며, '논어' 역시 안회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조는 다만 입으로 떠들 뿐, 받아 적어 후세에 남기는 일은 제자들의 몫인 것이다. 심지어 '라엘리안'들조차 끌로드 보리용이 외계인의 메시지를 받아 적은(적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밖에 "교조에겐 말씀을 기록할 제자(들)이 있다"라든가, "제자들 중엔 꼭 말씀을 왜곡하는 얼간이가 섞여 있다"와 같은 자질구레한 공통점들이 떠오르긴 했으나, 점차 '갖다붙이기'란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말았다.

 

어쩄거나 최근 내가 주목한 것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삶이 위의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을만치 드라마틱했으며, 그토록 염원했던 회고록조차 제 손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는 녹음된 목소리만으로도 눈물을 질질 짜게 된 수많은 제자들을 만들었고, 개중엔 그의 본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이들도 틀림없이 섞여 있을 것이다. 앞으로 50년쯤의 세월이 흐른 후 그의 이름을 내건 사상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앙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을 제외한 어떠한 것의 신성성(神聖性)도 부정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 위에 인간을 벗어난 초월성를 덧씌우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그 이름은 이런 하찮은 노력 없이도 역사에 길이 빛날 테지만.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

이병헌 단상

나는 이병헌을 좋아했다. <공동경비구역JSA>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에서 특히 멋있었다. 당시의 그는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외모의 배우였다. 어딘가 살짝 쑥스러워하는 듯한 그의 미소는 젠틀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조각처럼 단련된 복근을 자랑스레 내보이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론 권상우 등이 몸짱 열풍을 일으키고도 한참 후였던 것 같다. 그때를 즈음하여, 그의 특유의 미소에선 다정함이 사라지고 어딘가 모르게 지나친 자신감이 드러났다. 이 자신감은 지극히 남성적인, 그중에서도 최민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짐(헬스장)에서 은근슬쩍 끼워 팔곤 하는 근육강화제(중 특히 스테로이드 약물)의 심각한 부작용을 알게 된 이후, 갑작스레 근육이 불어난 사람들(요즘 특히 늘어났다. 몸짱이니 뭐니 여기저기.)을 보면 괜한 의심이라도 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이번 '사건'의 행간에서 드러나는 이병헌의 '비정'한 면모와, 어느날 문득 세상에 드러낸 그의 초콜릿 복근 사이에 혹시나 어떤 상관이 있을까 궁금한 거다.

 

 

 

 

 

뉴스를 보다가 문득

 

대략 전선이 두 개로 압축된 듯하다. 하나는 한명숙, 다른 하나는 세종시.
적들은 세종시 전선을 이참에 마무리하고, '한.명.숙' 석 자를 더럽히는데 일로매진하고 있다. 성동격서라고나 할까.
 
 
- 민주당은 어느쪽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특히 세종시를 타협하면 민주당은 공중분해 될 것이다. 토픽에서 세종시가 사라지고, 유야무야되는 순간, 충청은 완전히 넘어 가고 호남은 산산조각나며 영남은 확고부동해진다.
필요하다면 서울을 적으로 돌려도 좋다. 서울 유권자 대부분이 지방에 친인척 하나쯤은 다 갖고 있다. '서울 대 지방' 구도로 몰아가면, 서울 가족은 지방 친인척들의 전화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는 것을 육체적 피로보다 더 괴롭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 한명숙 해법?
저들은 대놓고 힘으로 눌러버리겠다는 전략이다. 정치에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체로 부정적이던, 좋은 시절은 지났다. 도덕이 가출한 시대니 만큼, 사람들은 강한 것에 더 쉽게 굴종한다. 저들은 굴종하는 백성을 원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좋은 전략이다.
강제연행도 불사할 것이 확실하다. 양 어깨 치들려 끌려나오는 모습이 TV로 나가면 한 전 총리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다. 그걸 막으려면 물리적인 '수성전' 한 판이 크게, 오래 벌어질 것인데, 그 그림이 클수록 아군의 피해가 막심해질 것이며, 결국 한명숙 카드도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강제 연행을 막는 시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체포 경찰이 서를 뜨기전에 물리적으로라도 제압해야 한다. '민주당이 주도적으로' '공세적인' 실력행사를 하면 현재 민주당의 가장 부정적인 이미지인 "무기력함"을 씻어내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법리 논쟁은 대중에 오래가지 않는다.
 
- 한명숙은 대선 직전까지 결코 버릴 수 없는 박근혜의 대항마다. 박근혜는 (좀 이상하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는 상당수) 여성들의 강력한 롤모델이며, 그녀가 박근혜이기 때문에라도 적의 가장 강한 카드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의 저 철옹성 같은 지지율을 크게 한 번 흔들지 못하면 아군에 희망은 없다. 한명숙은 박근혜를 링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이다. 노통은 이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차기 대통령으로 한 전 총리를 지목하셨던 것이다.
 
 
 
내친 김에 보태기.
 
- '4대강사업'을 핵심 쟁점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한 번도 저지되지 않은 MB의 '폭주'는, 그의 '불도저같은 추진력'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저들은 "4대강사업=경부고속도로"라는 등식을 내세워 '건설족'에 떡밥을 뿌리는 동시에, '영남'에 아첨하고, '지방'을 기만하는 등,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 프레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와서 "4대강 사업"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지 못할 바엔 차라리 손 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손 터는 과정'은 극적이어야 한다. "개발"은 어차피 첫 삽 뜨고도 한참이다. 단기 이익의 환상을 허락하되,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분명히 하면, 틀림없이 어디선가 탈이 난다. 그 '탈'들은 하나하나 MB의 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최선은 사업 자체를 막는 것이다. 한 번 막힌 불도저는 더이상 믿음직한 불도저가 아닐 것이므로. 그러나 너무 늦은 듯하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면 "내 돈(세금)으로 뻘짓한다"쯤에 있을까... 자기돈에는 민감들 하니까.
 
- TV를 완전히 빼앗겨버리면 승리 비용은 곱의 곱이 된다. 이미 너무 많이 밀렸다. 인터넷의 영향력은 2002년에 비해 오히려 축소했다. 반비례로 TV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SBS는 애당초 기대할 것이 없었고, YTN도, KBS도 하나둘 넘어가더니 드디어 MBC마저 저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판이다. 이에 손석희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다. (당내 행사 또는 '범진보진영' 행사에 초청 연사로 정치적 발언을 유도, 보도되도록 하는 방법 정도가 떠오르긴 하는데- 글쎄...) 엄기영은 노출이 많지 않아 성향을 잘 모르겠다.


※ 이상, 어젯밤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홈페이지에 올린 글.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Call to arms

간만에 의욕나서 답방 투어를 좀 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나와 어딘가 통할 것 같은 사람들'이 산다.

call to arm.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다.

공성 전차는 모여서 한꺼번에 들어가야 한다.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밀덕 : 밀리터리 마니아

 

 

밀덕

'밀리터리 오타쿠(마니아)'를 낮잡아 이르는 말.

 

 

남성성이 이를 수 있는 극한의 영역 가운데 하나.

오로지 실용성 만으로 다듬어진, 한 점의 애교가 없는 디자인. 반할 만하다.

 

 

 

정치 망상

아고라에 이상하다 싶을 만치 남녀 갈등을 조장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180 루저' 발언을 트리거 삼아 새삼 폭발한 것 같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담론 자체는 그보다 적어도 1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된장녀" 운운하는, 낮은 계급에 속한 젊은 남성이 현혹될 만큼은 그럴듯한 사례들이 많다.

 

권력은 항상 이들 '낮은 계급에 속한 젊은 남성 집단'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쥐었다. 이들이 실제로 전쟁을 수행하는 계층이다. 이런 걸 떠올리면 아고라의 우경화 조짐은 막연하지만 분명한 불안요인이 된다.

 

...

 

이런 움직임의 배후에 '박근혜-최초의 여성 대통령' 만들기를 기도하는 세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건 역시 지나친 망상일 뿐인 걸까.

 

 

남녀갈등이 커지면 어쨌거나 국면은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예컨대, 이들 '젊은 우파 남성' 그룹의 표가 필요하다면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 (일부) 부과하겠다"는 떡밥을 던지면 되고, 그들의 안티 그룹(급진적인 페미니스트로부터 온건한 남녀평등주의자들까지)의 표가 필요하다면 남녀 평등에 관한 슬로건을 내걸면 된다.

 

- 저들이 선거전(戰)에 지역 갈등'만'을 이용하리라 생각할 만한 근거가 내게 있는가?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댓글 읽는 대통령

노무현이 특별했던 점 또 한 가지는, 그가 인터넷 댓글을 읽는 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과 글 곳곳에서 그가 상시로 인터넷 댓글을 읽고, 드물게는 쓰기도 했던 것이 드러난다. 이 가운데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도 고민을 한 흔적이 있다. 익명성을 보장해줘야 더 많은 '생생한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은 분명한데, "악플러" 문제나 "언플" 문제의 발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사.사.세"와 "민주주의2.0" 등을 통해 모종의 실험을 진행 중이었으나,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떠났다. 관찰의 기록을 별로 남기지도 못했다.

 

그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20초 정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온다. 아직도.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조증이 온다

1.

세상사가 다시금 눈엘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질 아니한다. 연달아 피워무는 담배의 탓이 크겠지만 그것을 피워 물게끔 하는 울렁임이 있다. 하나의 중독으로부터 깨어나 다른 중독으로 옮겨가는 중인 듯하다. 두어 달 깊었던 울증이 가고 조증이 오는가 보다.

 

 

2.

한동안 외면하려 애썼던 세인들의 아우성이 다시 귀를 때린다. 엉뚱한 곳을 헤매며 답을 구하는 이들이 안타깝고, 답이란 없다고 믿게 되어버린 이들이 딱하다. "한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국제결혼 하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치들의 독단, "180 안 되는 남자는 루저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그녀들의 순수한 어리석음, "수능을 망쳤어요, 어찌 살아야 될지 막막"하다는 고교생의 공포 같은 것들,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크고도 깊다. 이를, 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어떤 여자아이는, 이런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그런 아이였다-, 항상 슬프고 아팠다. 너무 슬프고 아파서 아무 이야기도 보고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유약함을 나무라곤 했지만, 이제사 좀 알겠다. 많이 아프고 무서운 것이로구나. 느껴버리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