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9일 토요일

MBC 새 예능 <노다지> 인상비평(?)

 

※ 작위성이 튄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을 PD가 했다면 변태-가학물이란 비판을 못 면할 테고, <천하무적 야구단>처럼 MC 중 누군가가 들고 나왔다면 시쳇말로 "가식이 쩐다"고 할 만한 꼴이다.

특히 "나, 일밤 안 해!"라는 김제동의 귀에 거슬리는 절규(?)는 프로그램 중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프로그램의 제작방침을 사전에 통보받고도 녹화에 참여했다면 입 싸물고 협조할 일이고, 통보받지 못했다면 제작진에 충분한 항의를 했어야 할 상황이다.(폭우 속 진창 속 녹화, 뜬금없이 강압적인 마라톤과 선착순... 등)  한창 날리는 <1박 2일>이 요즘 부쩍 강조하는 '버라이어티 정신'은 그렇게 막장 상황을 묵묵히 견디는 게 아니었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양분한 버라이어티 쇼프로에 김제동 또한 신선한 한 축을 맡아주길 열렬히 기대했으나, 이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 캐스팅 미스?

- 조혜련은 원샷 한 번 더 받아서 인지도 높여야 할 짬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욕심이 지나치다. 예컨대 1회에서 정육점 청년(?)으로부터 호감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면 젊고 귀여운 '보람'이나 섹시한 황보가 앞에 나서게끔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는 직접 나서(거기다 후속타는 김나영...) 저질 댄스를 작렬시킨다. 이수근의 '오동잎 댄스'나 김종민의 '피곤 댄스'는 단순한 동작으로 짧은 웃음 한 번에 끝낼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조혜련의 저질 댄스는 좀 자제했으면 한다.

그녀의 캐릭터는 말하자면 '여자 박명수'다. 이른바 '비호감' 캐릭터 중 하나다.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잘 구별하지 못하면 아주 쉽게 채널이 돌아간다.

 

- 최민용... 이건 왠 난데없는 조합인가. 제작진으로부터 "<1박2일>이나 <무한도전>처럼 개고생하는 프로입니다"라는 식의 통보를 미리 받지 못했다면 얼른 제작진을 고발하길 권하고 싶다. 하지만 만약 '각오 단단히 하고 나오라'는 귀뜸이라도 받은 바 있다면 좀 성실하게 녹화에 임해야 되겠다. <노다지>에서 최민용은 <1박2일>의 이승기에 해당하는 캐릭터다. 멀끔한 녀석이 가끔 어리버리하면 웃겨주는 캐릭터란 얘기다. 그러나 이승기와 달리 최민용은 나이가 많다. <1박2일>이라는 '야생' 버라이어티에 이승기가 끼어들게 된 것에는 "어린 승기가 얼결에 납치된 것"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있다. 사지멀쩡 '평균이상'의 캐릭터인 최민용이 굳이 이런 막장 버라이어티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그의 입지는 좁디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천하무적야구단>의 오지호나 김준에게는 '그저 야구가 좋아서'라는 환상적인 핑곗거리가 있다.)

 

 

※ <1박2일>이 "잘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를 찾아 소개한다(+연예인들의 개고생)"이라는 컨셉이 가능한 것은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가 제법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일수록 촬영에 용이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노다지>는 연예인들을 말 그대로 길바닥에 굴리고 있다. (화면에 언뜻 드러난 병목현상 같은 건 깊이 파지 않기로 하자) '민폐'와 '민간의 자발적 협조'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노다지>는 과연 잘 타고 넘을 수 있을까.

 

 

※ 카메라 댓수가 모자라나?

- 편집이라는 후보정 작업으로 웃음의 포인트를 만발하게 하기 위해선 출연자 개개인의 순발력을 100% 활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촬영시간 내내 따라다니는 VJ의 중요성은 <1박2일>을 보면 알 수 있다.

 

 

※ 남자 vs 여자 과연 먹힐까?

버라이어티 쇼에서 게임은 점차 출연자의 '진지한' 자세를 요구하는 추세인데, 당연히 진지해지다보면 '망가지는' 상황이 끝없이 연출될 수밖에 없다. 그깟 한 끼 굶어도 그만일 <1박2일> 출연진이 왜 어묵 한 개에 눈이 뒤집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남대여 구도는 이래저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쇼 중에 게임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여자 출연자들이 '험한 꼴' 당하지 않게 배려하다 보면 정작 게임이 시시해진다. 또 남자가 여자를 괴롭히거나, 속여먹거나, 심지어 등쳐먹는 상황 등은 시청자를 불편하게 한다. 리모컨 집어들기 쉽상이다.

비록 조혜련, 황보, 김나영, 전보람이라는 라인업은 '망가뜨리기에' 별로 부담스러운 조합은 아니나, 여자 연예인의 망가짐과 시청자의 호응도에는 묘한 함수가 존재한다는 게 문제다. "예쁘고 귀한 연예인이 망가질수록 시청자의 호응도는 높아"지지만, 이 망가짐에 대한 '내성'이 해당 연예인의 미모에 거의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시청자 입장에서 '멀쩡한' 여자 연예인의 망가짐이 용납될 수 있는 한계치는 아마 <골드미스가 간다>의 최정윤이나 예전 <하이파이브>의 김민선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진재영이나 예지원은 '멀쩡함'을 포기함으로써 망가짐을 소화해낼 수 있었지만.) 스타는 하늘 저 높이 떠 있어야 스타다. 그런 연예인이 시청자의 '연민'을 사게 되면 끝장난다. 예능 프로그램'만' 할 것이라면 모르되, 앞길 구만리인 젊고 예쁜 여인들이 선택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길이다.

그래서 <노다지>의 남여 대결구도가 과연 실속이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2009년 8월 23일 일요일

30년만의 국장이라는데

- 명칭은 '국장'인데 지난 '국민장'과의 차이를 못 느끼겠다.

 

- 슬픔이 통 전염되질 않는다...

 

- 영결식이 끝나고 굳이 동교동을 거친 것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가신'들에게 일종의 정통성을 인증하는 세러모니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

 

- 전 과정에서 먼저 떠난 노무현을 철저하게 배제한 듯한 느낌이다. 이를 동교동계가 민주세력 내의 정통성을 주장하여 나아가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한 수작으로 해석하면 너무 짙은 색안경을 낀 것일까.

사실이든 아니든, 엄숙함만 강조되고 일반의 '참여'가 제한된 느낌이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그의 후계자들의 한계인지도. 이를 호부견자라 해야 할까.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베라를 위한 변명 - 쓴 소리 못 참는 한국인

 

- 그러고보니 '베라'라면, 핑크플로이드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녀 아닌가? ㅋ

 

 

[관련 글]


 

 

1. 불면증과 스트레스

밤늦게까지 일한 후 2차, 3차로 이어지는 (원치 않는) 술자리 때문에 서울의 수많은 밤거리에서는 '훌리건 난동'에 비유할 만한 상황들이 펼쳐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이런 것들이 '순수한 절망'에 비롯한다는 관찰 역시 날카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행동들이 그들 자신의 '절망'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터이다. 그저 자신은 가끔 '술자리'를 즐길 뿐이며, 이러한 '자리'들이 자의보단 타의에 의한 것임을 굳이 부연함으로써, 행여나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알콜 의존을 의미하는-조차 애써 부인할 것이다.

 

 

2. 아름답지 않은 서울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래된 건물은 서투르게 복원되었거나 이상하게 페인트칠 되어 있다." 이는 한국의 문화재를 찾을 때마다 드는 감상과 일치한다. 한국의 건축이 극단적인 실용주의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됐나. 그나마 지자체들의 활동이라도 없었다면 아직도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를 덮어쓴 채 방치되고 있었을까.

베라의 지적처럼 한국에서 '영원성'이란, 그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된 일부 성소(聖所)들을 제외하면, 더 이상 어떤 식으로든 고려되지 않는 낡은 가치가 된 것으로 보이곤 한다. 특히 건축이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더더욱.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가 붕괴 직전의 아파트보다 -'재건축'이라는 명분 덕에- 오히려 값싸게 거래되기도 하는 나라라니.

 

 

3. 잡지 부록

어떤 문화에 있어서 '불필요한, 무계획적인 소비'는 충분히 역겨워할 만한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못생긴 얼굴'이나 '뚱뚱한 몸매'에 쉽게 드러내곤 하는 혐오감보다는 훨씬 건전한 것이다.

쇠락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근검절약'의 정신과, '럭셔리'란 말로 포장된 과시적 소비행태가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2009년 대한민국에,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개념은 아직도 부끄러울 만큼이나 낯설다. 배보다 배꼽이 큰 '부록'이라는 기묘한 마케팅 기법은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이에겐 어처구니 없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갈수록 심각해지는 멀쩡한 성인 여성들의 소녀 취향 역시-

때론 일종의 성장지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처럼 한국의 성인여성들이 자신의 '원숙미'보다 '백치미'나 '동안'에 집착하는 현상에는 남성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하기는 그래봐야 실리콘을 코에 넣느냐 가슴에 넣느냐 정도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4. 애국심

우리의 애국심은 유난스럽다. 그 유난스러움을 아예 자각하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애정어린 지적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할 만큼이나.

어쩌면 이런 것 또한 좁은 곳에 오글오글 모여 가슴 가득 분노를 채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 거다.

 

 

베라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면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결혼이 '지옥' 또는 '사랑의 무덤'이 되는 까닭

다음은 결혼을 둘러싼 2009년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양상에서 큰 줄기만을 추린 겁니다. 당연히 침소봉대하고 성급한 일반화도 있습니다.

 

1. 성비불균형 문제

 

현재 소위 '결혼적령기'란 건 갈수록 늦춰지는 추세로, 남성의 경우 대략 30~35세, 여성은 27~32세 정도이지요. 그런데 딱 이 세대가 대한민국에서 '성비불균형'이 극심해지기 시작한 세대란 것이 문젭니다.

 

세계적으로는 여권신장과 함께 '혼전순결' 이데올로기가 힘을 잃은 덕분에 남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섹스를 만족시키기가 용이해졌습니다. 여성분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하지만 알 만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남성의 경우 섹스가 해결된다면 굳이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널리 씨(?)를 퍼뜨리려는 본능적 차원의 문제지요. 상대적으로 여성은 임신, 출산과 함께 경제적으로 무력해지기 쉬운 탓에 '성실한 남성'을 배우자로 두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런 괴리를 없애기 위해 여러 선진국들은 '싱글맘'을 위한 갖가지 복지정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지요. 헐리웃 로맨스 영화에서([이프 온리] 정도?) 동거 또는 그에 준하는 관계를 이미 갖고 있는 여성이 남성으로부터의 '프로포즈'를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고전적인 결혼과 연애관이 살아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에 대해 보수적인 전통적 가치관이 그 힘을 잃지 않은 까닭도 없진 않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결국 '성비불균형'입니다. (덧붙여, '혼전순결'로 상징되는 고전적 가치관 역시, 그것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으며 또 더 무너질 겁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시대의 흐름인 것입니다.)

 

자연상태에서 출산 당시 성비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아주 근소한 차이로 많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활동적인 수컷들이 영유아기에 사고로 죽어나가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것을 배려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데- 어쨌거나 결혼적령기, 즉 생식적령기 쯤이 되면 거의 정확히 1:1로 맞춰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 성비가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현재 결혼적령기 남녀의 출생 즈음입니다. 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여자짝궁' 없는 남학생 많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신문과 방송에 실리기 시작했지요. 심지어 학급 편성 시 아예 '남자반'을 만들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이 자라나 결혼이란 걸 해야 할 시점이 오니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비혼(非婚) 또는 동거' 추세를 역행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더러워서 결혼 못 해먹겠네. 내가 무슨 머슴노릇 하려고 결혼하는 거냐."라는 식의 자조를 늘어놓게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한국남자들 결혼하기 어렵습니다. 여성으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거쳐 간택을 받아야 간신히 결혼을 할 수 있는데, 요즘 여성분들 좀 까다롭나요.

 

 

2. 경제위기 담론

 

그런데 여성분들이라고 해서 마냥 편한 것만도 아닙니다. 이유는 경제위기 담론, 즉 높아진 눈높이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가처분 소득 때문입니다. (눈높이가 높아진 것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확대된 탓이 크며, '경제위기'란 말에 굳이 '담론'을 덧붙인 것은 이 위기감이 어느 정도는 허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보는 까닭입니다.)

 

시쳇말로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하지요. 모두 우성형질의 배우자를 바라는 암수의 본능을 반영한 것입니다. 남성이 결코 대신해줄 수 없는 문제-'임신과 출산' 때문에라도 여성은 상대적으로 안정지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정도로 보시면 적당하겠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의 능력이란 곧 경제력을 뜻하는데, 이 경제력이란 것이 쉽게 갖춰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 바로 문제의 근원입니다. 현대 한국 경제의 무한경쟁 시스템은 남성들을 '모든 걸 다 가진'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열패자(?)들로 갈라놓는 구조지요. 다시 말해 여성들이 취할 만한 '쓸 만한 남성'의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여성분들의 '쓸 만한 남성'관은 대략 이렇습니다. "난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냐. 집에 재산은 없어도 좋으니, 그냥 연봉 3000 쯤 되는 '조금' 안정적인 직장에, 남 보여주기 쪽팔리지 않는 정도의 외모였으면 좋겠어." 성실하고 자상한 성격도 갖췄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데- 과연 대한민국 남성의 몇 %가 이 '쓸 만한 남성'의 커트라인 안에 들 수 있을까요?

 

그러니 이 소수의 '쓸 만한 남성'을 쟁탈하기 위한 여성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집니다. 살인적인 다이어트 스케쥴을 견뎌내고, 알뜰하게 모은 저축을 깨 눈과 코, 피부 등을 '살짝' 업그레이드 합니다. 또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유행에 너무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싼티 나지 않고 세련되면서도 발랄한" 패션 센스를 발휘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겠지요. 이토록 어렵게 자신의 가치를 높였는데 아무 남자한테나 자신을 내줄 수 있나요. 정신줄 놓을 만큼 열렬한 사랑이 아닐 바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조건'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연애를 한두 번 해보고 나면, 아뿔사, 어느새 '내일모레 서른'입니다.

 

 

3. 트로피 와이프

 

비극(?)은 여기서 또 다시 시작됩니다.

미국 속어 중에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란 게 있습니다. "(부자가 얻은) 젊은 미녀 아내"를 뜻하지요. 우리에겐 어쩌면 '띠동갑 마누라'의 경우가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공에는 노력과 재능, 행운 등 여러가지가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공한 미혼 남성'이 되기 위해선 당연히 '연애질'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테니까요. 연공서열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남성이 '이만하면 그럴듯한 결혼식을 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겠다' 싶을 만큼 성공하고 나면,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을 넘어서 있기 쉽습니다. 어쩌면 그 성공의 과정에는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다'며 떠나간 가슴 아픈 인연도 하나둘쯤 있었을 수 있겠지요. '섹스'를 만족시키는 데 특별히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는 이들이 문득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입니다. 바로 '2세'와 바로 '트로피 와이프'.

'2세'야 상식 차원에서 해석하기 어렵지 않은 문제이므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트로피 와이프'란?

 

흔히 남성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에 소홀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자신에 국한된 얘기라면 사실은 사실입니다만, "옆에 어떤 여자를 끼고 다니느냐?"의 문제라면 얘기가 좀 다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고 했지요? 예, 아름다운 여친, 애인, 와이프는 성공한 남성의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즉 '트로피(trophy)'지요. 이들에게 성공이란 아름다운 배우자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한 증거물로써 아름다운 배우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일례로 '띠동갑 마누라'에 대한 남성 친구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런 도둑놈!" 그리고 바로 다음에 바로 따라 나오는 말은, "오~ 자식, '능력' 있네."

 

 

4. 결혼이 피곤해지는 이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요는 결혼에 임하는 남녀의 서로 다른 생각이 현대 한국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상황과 맞물려 '행복하지 않은 결혼'의 이유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a. 성공한 소수 남성

- 선택의 폭은 과거에 비해 더 넓어졌습니다. 온 세상 여성이 그들을 원합니다. 고르고 골라 어리고 예쁜 여자와 결혼합니다. '도둑놈'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까지만 해도 '하자'가 없었던 이들의 부인은 결혼 후 '얼떨결에 잃어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남편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남성 또한 어려웠던 날들을 함께하지 않은-즉 조강지처가 아닌- 부인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남성의 성공에 위기라도 닥치는 날이면, 곧바로 지옥문이 열립니다.

 

b. 평범한 다수 남성

- 결혼 자체가 어렵습니다. 야동 따위에 탐닉하다 어느날 애인이라도 생기면 처음엔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합니다. 하지만 곧 콩깍지가 벗겨지면서 항상 봉사와 희생을 요구받는다는 피해망상과, 어떻게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다 결혼 후 덜컥 형편이라도 나아지면 성공한 친구들의 트로피와이프가 부러워집니다. "애들 때문에"라도 마누랄 버릴 순 없으니 탱글탱글한 애인이나 하나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c. 어린 미모의 여성

- 세상은 이들을 위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운이 좋다면(?)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결혼생활을 일찍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박제가 된 자신의 신세를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친구들이 어느덧 하나둘 열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랑에 빠져듭니다. 덜컥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채 늙어가는 건 아닌가 싶어집니다. '더 젊고 예쁜' 여자들에 남편이 혹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세월을 이겨보려 안간힘을 써봅니다만 언젠간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충분히 좋지(?) 않다면 고르고 고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 d 항목의 여성들과 동지가 됩니다.

 

d. 적령기(라고 쓰고 '고령'이라 읽는다)의 평범한 여성

- 주말에 할 일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죄다 애엄마. 서른두엇 전까지만 해도 "결혼 언제 할 거니?" 묻던 가족, 친지들이 이젠 슬슬 눈치만 봅니다. 찝적대는 놈들은 더러 있었지만 하나 같이 영 밍숭맹숭 합니다. 스스로를 '속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건을 따지고 싶진 않지만 가슴 속에 '불'이 통 붙질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적당한' 남자와 '적당히' 사귀다 '적당히' 결혼합니다. 결혼-임신-출산까지 순식간에 세월이 지나갑니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낳은 자식은 하난데 기르는 건 둘입니다. 한때 '남편'으로 불렸던 '큰놈'은 단념하고 '작은녀석' 기르는 재미에 삽니다. 다행히 녀석은 아직 자신에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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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의 남성과 연하의 여성 커플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전통적 가치관에 의한 고정'관념' 탓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어떤 커플의 결혼 성사 가능성이 남성의 경제적 자립도에 의존하는 구조가 반영된 것입니다.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력이 곧 계급, 서열의 '정당한' 지표가 되며, 이는 가정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 원칙(?)에 따라 결혼한 대개의 가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종속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에게 구박 받는 경제력 잃은 남편은 이러한 관계의 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결혼은 여성의 성과 남성의 능력을 교환하는 거래였습니다. '너무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에게 흡족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각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것인지 잘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생의 한 순간도 치열함을 잃지 않았던 거인 한 분이 또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렇게 한 시대, 거인과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살아남은 난쟁이들의 시대는 앞으로 어떻게 풀려갈까...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고로 명복을 빌지 않고, 다만 한국사 가운데 가장 드높은  명예가 그분의 비석 아래 깃들 것임을 믿는다.

 

 

2009년 8월 15일 토요일

DC갤러들, <탐나는도다> 짤방 제작 시작.

 

- 위 포스터는 현재시간, 디씨갤러들이 만들기 시작한 짤방. 실시간으로 업뎃되며 갤러들의 의견을 수렵하고 있다. 온라인의 스캐빈저, 디씨갤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드라마의 흥행면으로 볼 때 일단 매니아층은 확보됐다는 얘기다. 입소문 타기도 좋은 조건이다. 디씨가 뭐냐. 키워의 헤드쿼터, 마이너리티의 본향 아닌가. 얘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현재 2화까지 방영되었고, 아직 한 번도 보진 않았지만 괜찮은 드라마가 간만에 또 하나 나온 모양이다. 꽤나 그럴듯한 순정만화 원작에, 사전제작 방식으로 상당부분 촬영이 이미 끝나 있단다. 이는 극의 구성이 그리 허술하지 않을 것이란 어떤 신뢰감의 근거가 된다.

 

 

- 블로그스피어를 둘러보건대, 이 드라마의 흥행이 어려우리란 전망의 근거로 '주말 방영'이 거론되고 있다. 글쎄 과연 그럴까?

 

- '주말 연속극'의 시간대는 가족 단위 시청자의 시간이다?

<커피프린스>나 <꽃보다 남자>류 드라마의 주요 타겟인 젊은 시청자층, 주말 저녁엔 데이트도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할 테니 리모컨을 부모세대에게 넘기는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요즘의 청춘들은 그리 한가하지가 않은 것 같다. 이 대대적인 성개방,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가엾게 시들어가는 청춘들 또한 만만찮게 늘어나버린 거다. 주말이라고 해봐야 TV, 인터넷, 온라인 게임이나 붙들고 있다가, 친구를 만날 때마다 '소개팅'을 부탁하는, '솔로부대'를 만든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 또한 이젠 '아줌마'도 젊다.

결혼 또는 출산을 '아가씨'가 '아줌마'로 변이하는 분기점으로 보았을 때, 이젠 '아줌마'들도 왕년의 아줌마들이 아니다. 나이로 보자면 30대부터 40대초반까지를 아우른다. 결혼과 출산 여부에 관계없이 '골드미스', '미시족' 등으로 불리는 이 세대의 여성 들 또한 이 드라마에 열광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젊었을 때' 한국 순정만화는 전성기를 보냈다. '이승기'나 '샤이니' 등의 '연하남 트렌드(쇼타콘?ㅡ,.ㅡ)'와 '초식남', '훈남' 등의 신조어 역시 이들을 위한 것이다.

 

- 더욱이 난 <솔약국집...>이 재미가 없다.

얼마 전부터 <1박2일>을 무척 사랑하게 된 까닭에 본방사수를 외치며 TV를 켜보곤 하는데(성공한 적은 별로 없다...;), 막상 <1박2일>이 끝나고 나면 채널을 돌릴 곳이 애매해지곤 했다. <솔약국...>을 본 적이 없어 대체 어떤 내용의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채널이 그것을 스쳐지날 때에도, 단 한번도, 어떤 신선함도 느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딴 게 '딱히 볼 게 없어 <솔약국...>을 본다'-는 시청자도 적지 않을 것이란 추측이다.

 

 

- 세대갈등과 계급갈등을 적당히 버무린, 그나마 피상적으로 다룬 시시껄렁한 드라마의 시대는 이제 그만 끝나줬으면 좋겠다. 국수주의, 강성대국주의를 민족주의로 포장한 과거미화 사극도 여간 남사스러운 게 아니다.

 

로맨틱코미디사극에 '문명충돌'이라... 재밌는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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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9일 일요일

"생각대로 T"와 "쇼를 하라, 쇼"

"쇼하면 된다"라는 카피가 눈에 띄었다. 실제로 변경된 건지는 모르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로써 '쇼'와 'T'라는 두 거물 사이에 "하라"는 사라지고 "된다"만 남았다.

("생각대로 된다"겠지 "생각대로 하라"는 아닐 것이므로.)

 

"하라"가 진취적-능동적-행동/과정 중심적이라면

"된다"는 수동적-피동적-자기/결과 중심적인 뉘앙스를 띤다.

"하라"를 자기 외의 대상에 대해, 나의 선택에 의해, 결과에 개의치 않고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된다"는 자기자신이 특정 상태에서 '보다 나은' 다른 상태로 변이하거나, 타자가 그 의지와 관계없이 '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워너비'라는 말이 있다. wanna be=want to be, 즉 '되고 싶다'란 뜻이다.

에리히 프롬은 근대 이후 언중들이 점차 'be' 대신 'have'를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남을 지적하면서 물질만능주의의 득세를 경계한  바 있다.

'want to do'가 아니라 'want to be'를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현대의 언중들에 대해 그라면 과연 어떤 분석을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