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별일 없이 못 산다.

'잉여'의 삶을 산다.

 

한때 '애자' '병진' 등 어감은 기발하지만 올바르지 못한 신조어들을 생산해내곤 했던 인터넷에서 요즘엔 '잉여'라는 표현들을 쓰는 모양이다. 초딩을 비롯한 키보드 워리어들이 사용하기엔 다소 고급 어휘라는 느낌도 있는데, 어쨌거나 고용없는 성장 시대의 핵심문제를 잘 짚은 듯하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닿고 닿지 않고를 떠나, 스스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이다. 다만 그 어떤 쓸모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커서 아직 우리 사회는 적당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

개인사적으론 처음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실감하는' 과학기술의 발명자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후세의 사가들은 우리의 시대를, 흡사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한 시대를 우리가 '근대', 혹은 '산업혁명의 시대'라 부르듯이, 또 하나의 혁명의 시대로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 현대를 일컬어 "영웅이 사라진 시대"라 했다. 허 모가 조조를 일러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 했다는데, 본디 치세엔 영웅이 날 수 없는 법이다. 산업혁명이 낳은 자본주의의 구조가 얼핏 한계를 보인 지금이 바로 난세다. 난세가 영웅을 필요로 해서 나타난다기 보단, 난세는 영웅이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으로서 작용한다. 빛과 물, 그리고 흙이 없다면 대부분의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것가 마찬가지로 영웅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 영웅의 출현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말인즉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것처럼, 재림한 그(the one)를 십자가에 다시 매달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금 우리 세계 어딘가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가정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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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엔가 어디엔가 소용에 닿을 재능을 갖고 있다. 이는 공명정대한 신이 저 하늘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질량불변과 같은 자연 법칙에 의거한다.

 

(선생질로 먹고사는 한 친구가, 장래를 걱정해주지 않을 수 없는 소위 '불량학생'인 몇몇 제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에, "장차 지구의 종말에 준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 아이들의 재능이 인류를 보전하는데 더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쓸모'란 항상 상황과 연동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 것인지에 대해선 100%의 확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0% 또한 존재할 수 없기에, 따라서 그런 아이들의 존재 가치는 유효하다. 그 개체수가 '지나치게' 증가하지만 않는다면.

물론 그 친구는 그다지 납득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영웅의 그 대안이 궁금하다. 그는,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직 수긍하지 못한 누군가의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