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30일 토요일

친구 1

내겐 정치를 시키고 싶은 벗이 하나 있다.

어떤 의미에선 내게 단 하나뿐인 이 친구가 최초 사학과를 지원했던 것은 어쩌면 청소년기 나와의 교류에서 조금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도무지 학자 타입이 아닌 녀석이 사학과를 지원했다 했을 때는 역시 납득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녀석은 정치외교학과로 학적을 옮겼고,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졸업을 했다. 정외과라면 납득할 수 있다. 정확히 뭘 배우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에겐 리더십이 있었다. 항상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무리를 이끌었다. 대체로 선생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그들의 적과도 원만히 지낼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항상 유지했다. 녀석이 학생회장이니 반장 부반장 따위를 별로 하지 않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녀석에게는 의로운 구석이 있었다. 바로 내가 녀석에게 반한 부분이다. 물론 오늘날의 왕따현상이나 '이지메'의 원류라 할 따돌림이 우리 시절에도 있었지만, 녀석은 그런 아이들에게 다소 짖궃게 굴기는 할지언정, 누구도 무리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다.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녀석의 무리 안에 끼어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에겐 용기가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나는 스스로를 비겁한 쪽으로 분류하는 편인데, 그것은 내가 나서야 할 때 침묵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녀석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되면 저가 알아서 나섰고, 누군가가 떠맡기면 피하지 않고 맞섰다.

 

 

녀석에게 생은, 날것 그대로의 것이었을 것이다. 낡은 책 속의 늙은 문자가 아닌, 펄떡이는 삶 속에서 녀석은 녀석의 길을 찾았다. 녀석은 지금 빛나는 사람들을 빛날 수 있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녀석은 내게 전화를 걸어 푸념같은 말들을 한아름 쏟아놓고선 내 구름 잡는 소리에 잔뜩 고개를 주억거리고 돌아가곤 하는데, 여전히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녀석은 자신이 그리던 길 위에서 얼마간 비껴나 있는 듯하다. 충분히 치열하게 살지 못한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시련과 권태가 그에게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요즘 녀석과 전화를 맺을 때는, 어떻게든 휴가를 내 적어도 일주일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충고하곤 한다. 왠지 녀석은 굵어져가는 허리와 반대로 점점 메말라 가는 느낌이다. (점점 바싹 말라가는 내가 이런 얘길 했다는 걸 알면 녀석은 피식 웃을 테지만) 지난 십 수년간 쉴새없이 퍼올린 네 안의 우물이, 드디어 이제 바닥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는 재능이나 그릇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청춘이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확신하건대 최근 몇년간 자네는 단 몇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아바타 옹호하기도 지친다 정말

"내가 이르케 날아와써. 이게 너야. 내가 이르케 틀어써. 바람 느껴져써. 나 되게 세게 틀어따구."
"응응. 나도 급하게 날개를 굽혔어(bank)."
 
 
내가 만약
전략핵무기를 포함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에 명령을 내릴 어느 한 사람을 선발할 권리를 가졌음에도
가장 높은 문맹률을 자랑하는 어느 백인 집단을
문명인답게 계몽할 목적으로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티끌 만큼의 더함도 뺌도 없이 딱 아바타처럼 만들 거다.

 

그리고 또한 제임스 카메론과 똑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하나 더 있어

혹시라도 뭔가 인류에 기여하고 싶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별로 없을 거라고도 나는 확신한다.

 

지구라는 요람에 60억의 인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지구는 언제나 제몸에 엉겨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될만큼의 먹을 것을 내줘왔다. 잘못은 항상 나눠먹는 방식에 있었지 지구에 있지 않았다.

 

컨셉아트 중 하나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일기는 일기장에

오래 전 별생각없이 스크랩해두었던 동영상을 보고 잠시 또 운다.
병신짓이지만 부끄럽지 않다. 언젠가 나는 또 이 글을 보고 다시 오늘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또 얼마간 잊었다.
별 일 없이도 기억은 조금씩 좀먹는다.
나만은 잊지 않기로 했었다.
이렇게 잊어갈 지도 모른다고, 조금 더 울기도 했다.

무심코 클릭한 동영상이 다행스럽다. 나는 아직 울 수 있다.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2010년 1월 26일 화요일

디씨 압갤 정모 후기

생판 모르는 고딩이들이랑 정모를 했다. 정확히 말해보자면 현역 고딩 하나, 막 수능 친 고딩 하나, 3년 전에 수능 친 고딩 하나. 본인들은 각기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를 10여년 전에 지나친 나로서는 다 거기서 거기다. 나를 돌아봐도 그렇고.

나이 먹으면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다.

 

근 보름 전부터 영화 <아바타>에 푹 빠져 있었다. 영상미도 영상미지만, 제임스 카메론이 4억 달러나 들여서 이런 착한 영화를 만들어준 것이 고마워서라도 다시 볼 때마다 먹먹했다. 첨단 중에서도 최첨단 문명의 힘을 빌려 만든 반문명 영화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건 기분 좋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통 열광하는 이가 없기에, 꾸역꾸역 대한민국 '잉여'의 총본산 '디씨'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까 벌써부터 '아바타 갤러리'가 만들어져 있다. 게시물 '리젠 속도(인터넷 게시판에서 글 따위가 여러 사용자에 의해 등록되는 양)'도 만만치 않은 것이 꽤나 활성화된 것 같았다. 이들의 화제는 온통 <아바타>였다.

 

반가운 마음에 진작 써둔 리뷰를 퍼올리고, 과연 얘들은 어떻게 노는 걸까 궁금해 같이 댓글놀이를 하며 지켜보는데, 마침 정모를 하잔다. 나야 먹고 죽을래도 주말에 약속이 없는 사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나타난다 해도 나 역시 장년의 남성, 피해야 할 이유도 없고.

 

정모 하면 뭐할까, 하는데 나오는 얘기들 역시 대략 10년 전에 즐기던 것들이다. 허허, 그래 나도 그 나이 땐 노래방 열심히 다녔니라. (피시방은 없었지만) <아바타>는 3D 뿐만 아니라 4D로도 한다는데, 그거 첫경험이나 좀 하자. 대충 리딩하는 녀석이 눈에 띄길래, 슬쩍 교통정리를 좀 했다. 시간-장소-회비, 사실 이것만 정하면 어떤 사람들끼리라도 만남은 가능하다. 보통 이런 만남이 계획단계에서 파토가 나는 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이럴 땐 잽싸게 '대장'을 뽑아놓고 딱 저 세 가지만 정한 후 나머진 몽땅 위임하는 게 좋다. 민주주의는 그게 더 효율적일 때나 가치 있는 거다.

 

대장을 뽑아놓고 나니 일사천리로 약속이 잡혔다. 영등포역 9시. 으잉? 9시라니. 최근 몇년간 9시에 취침한 게 9시에 기상한 경우보다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토요일에 일을 나갔다. 원래는 안 나가는 날이다. 날짜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알바를 보고서야 토요일이란 걸 알았다. (너무 비웃지 않았으면 한다. 뉴턴도 이런 버릇이 있었댄다.) 헛헛한 마음에 근처에 있는 국참당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마침 이 사람들도 죄다 MT를 갔다. 한 명도 남김없이. 허허 이런 젠장.

암튼 이런 심리상태에서 밤을 샜다. 뭔가 딴짓에 열중하다 정신차리고 보니 새벽 2신가 3시쯤 됐더라. 9시까지 영등포로 나가려면 집에서 8시엔 나가야 한다. 씻고 어쩌고 하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난 잠이 쉽게 드는 타입이 아니라 한두 시간씩 뒤척이곤 한다. 잘해야 2~3시간 자고 나가게 생겼다. 그나마 일어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결국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던 하루쯤 밤새는 일이 점점 더 고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역사적인' 만남, 하루쯤 밤새줄 수 있다.

 

결과적으론, 처음으로 <아바타>를 보다 졸았다. 3D나 4D였으면 안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다섯 번이나 봐서 웃음도 한 템포 일찍, 눈물도 한 템포 일찍 나오는데 어쩌랴. 추격씬에선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더라. 가끔씩 옆자리의 또랑한 눈망울을 훔쳐보며, 아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는구나 싶었다.

 

이런 '짓' 안 했으면, 내가 언제 내 나이 절반 되는 친구들과 말 섞어볼 수 있었을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녀석들을.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걸으면서도 화제가 바닥나지 않는 조잘거림을.

 

이봐 친구들. 횽은 니들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술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술도 한잔 하자꾸나. 우리 이대로, 뭔가에 미치는 것을 겁내지 말자. 세상은, 미친 놈들이 만들어 가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I see you."

2010년 1월 25일 월요일

거지에게 돈을 주십니까?

길을 가다 거지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동전 한두 푼 던져주는 일이 본질적으로는 그이의 문제를 조금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쥐어주는 이들과, 조금은 어색한 기분으로 묵묵히 지나치는 이들이 있다. 코를 싸쥐며 유난스런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들을 나는 사람으로 치지 않는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호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뭔가 변명같은 이유를 생각하며 그 앞을 서둘러 지나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어떤 소문에 따르면 개중엔 나보다 훨씬 풍족한 이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앞을 그냥 지나친 내가 당당해지는 건 아니다.

 

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서른셋의 자화상

유시민은 자신의 서른 살을 맞아 다음과 같은 자서(自敍)를 남겼다. 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멘토 중 하나다.


서른 살의 자화상_유시민


다시 읽어봐도 정말 그릇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제 정신이라면 도저히 이곳에 링크를 걸어두기는 민망할 노릇이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덮어두고, 나도 나의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한다. 나도 이젠 서른 하고도 셋이다.

 


01.
나는 뭐든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질 못한다. 인정하긴 무척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떤 선천적 기질 같은 것이었을까. 내겐 첫 '타인의 시선'이었던 초등1학년 담임선생의 생활 평가는 "두뇌 명석하나 주의가 산만함"이었다. 이 열 두 글자는 이걸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학생들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생활기록부를 꽤나 어릴 적에 보게 된 모양이다. 초등학교를 두 번 전학했는데, 아마도 그 와중이었던 것 같다.


(그땐 "주의 산만함"의 뜻을 몰랐다. 그저 '주의가 山 만하다'는 소린가 흘려 넘기고 '두뇌 명석'에 만족했다. 곧바로 국어사전을 뒤져볼 정도의 부지런함만 내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02.
그래서인지 내 앎이란 것은 넓고 또 얕다. 자랑삼아 말해보자면, 나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평균 이상'의 상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분야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가장 대중적인 대화소재랄 수 있는 연예, 스포츠, 자동차 이 세 분야에 대해선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이슈들의 공통점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든 좀 식자연하는 사람들이 주로 기피하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그들 중 하나라고 느낀다.


문제는 내 앎이 얄팍하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한때 '박학다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무슨 '자뻑'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엷을 薄자에 먹을 食자를 써서 '薄學多食'이었다. 당시 나는 사자성어에 좀 빠져 있었고, 더는 스스로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을 때 이 이름도 버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學이 薄하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내 얕은 앎은 내 인간관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다.

 

 

03.
사람은 동류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해본다면, 자신과 종(種)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동류를 좋아한다. 여기서 동류라 함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공통의 관심사는 평화를 주고, 고독을 가져간다. 평화가 지루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자신이 항상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든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 사람을 하나 찔러 볼 일이다. 그리고 감방에서 난동을 좀 피워주면, 몇대쯤 얻어맞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즐기는 것을 국립 원룸에서 마음껏 누릴 수 다.)

 

동류는 곧 동족이다. 명빠나 노빠나 결국은 다 정치 '오타쿠'들인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제각기 머리 속에 품고 있는 세계가 있고, 저마다 다른 종족과 어울려 살아간다. 내 세계엔 이건희가 있지만, 이건희의 세계엔 확실히 내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아마 점(pixel) 하나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터, 이 사실은 내게 별로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유쾌한 기분으로 나아가기 위해, 즉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동족을 찾아나선다.

 


04.
대개 동족은 무리지어 산다. 그런데 나의 동족들은 대체로 돈 버는 재주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우화(羽化)한 후 나비처럼 날아가더라는 소식이 간간이 전해오긴 하는데, 그보단 지리멸렬한 인생이 더 많다. 가끔 골방에 모여 앉아 우화의 비법을 수근대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외롭게 지낸다. 가끔은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깜빡하기도 하면서.

 


05.
이방인이 어느 동족집단에 끼어들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통과의례는 동족인 척하려는 자를 효과적으로 걸러낸다. 척하려는 자는 대개 신용할 수 없으므로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앞에서 밝힌 이유로 해서, 다양한 통과의례를 비교적 쉽게 통과하는 편이다.

 


06.
무리의 중심에 들어가면 무리의 구루(guru)를 만날 수 있다. 그 형태가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아니면 아예 아나키즘이든, 무리 중에는 무리를 이끄는 자가 있다. 그들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근슬쩍 드물게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무리를 조종한다. 그들이 내놓는 말의 무게는 다른 동족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리의 중심 혹은 변두리 어느곳에서 내가 운좋게 그 구루들과 마주치게 되면, 그들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곤 한다. 구루들은 모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 그들이 내놓는 시험은 여느 통과의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 박학은 당연히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이대로 남아 무리의 규칙을 배울 것이냐, 아니면 무리를 떠날 것이냐.

 


07.
나는 대체로 떠남을 선택했다. 저 바깥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 어딘가에는 진짜인 나를 알아봐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라는 기대는, 만남과 떠남이 반복되면서 점차 엷어졌다.

 

운좋게도 일찍부터 여러 구루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좋은 구루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세상에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주 까다로운 안목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란 상실을 겪어보기 전엔 매우 어려운 일이다.

 


08.
결국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지금보단 정신력이 강했던, 혹은 둔감했던 시절에는 그것도 대충 견딜 만했다. 요즘엔 좀 한심한 말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이방인(etranger)',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그리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사용되진 않았던 덕분에, 더러 작은 무리의 구루 행세를 할 기회도 있었고 외로움도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나는 흑맥주 스타우트의 초기 CF를 좋아했는데-"덤벼라 세상아!"- 그것이 저 호시절의 기분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09.
그리고 어느덧 서른셋이 되었다. 이럴 땐 정말 한국식 나이세기가 싫다. 하지만 만으로도 32세. 공자님 말씀대로라면 이립(而立)을 진작 지났다. 이립은 똑바로 선다는 뜻이다. 지학(志學)의 시기에 내 나이 서른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대략 "남자 나이 서른이면 대충 인생의 결론이 보이는 나이"라고 썼다. (당시 지금의 내 나이 무렵이던 선생께서는 그 프린트 뭉치를 받아 들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이제 서른 셋이다. 요즘 나는 내 삶에 대해 묘사할 때, "휘청댄다"라고 쓴다.

 


10.
나는 내 휘청임이 부끄럽다. 아직 내 곁에 남아준 벗들에게 부끄럽고, 아직도 내게 기댈 수 없는 부모에게 부끄럽고, 내 몫의 짐까지 짊어진 아우에게 부끄럽다. 나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운 건 바로 열다섯의 나 자신 앞에서이다. 나는 그 녀석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아니, 살지 않았다.

 


11.
나는 핑계가 많다. 운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그중엔 '나는 치열하지 않았다'는 식의 내'탓'도 섞여 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더 큰 죄악이라던데, 그게 바로 내가 잘하는 그것이다.

 


12.
이제 결론을 내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 즉 성공은 운과 환경, 그리고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


운은 좋았다.

그중 최고는 정직하고 현명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아버지이다. 무학에 평생을 가난했지만 인격적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아들들이 쉽게 비뚤어진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끼도 밥을 굶은 적이 없다. 굶주림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도 보았다.
어머니도 좋았다. 그리 현명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건강을 잃기 전에나 후에나, 친자식을 정말로 잊어버릴 만큼이나 나와 내 아우를 공정하게 보살피셨다. 백일휴가 복귀 날, 깜빡 두고 간 휴가증을 찾으러 돌아갔을 때 발견한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것이다.


환경은 좀 별로였다.

적절한 시기에 "8학군" 진입을 선택한 아버지는 현명했지만, 충분히 악착같지는 못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서초동 꽃마을에선 마을 이름에만 꽃이 피었다. 거기서 보낸 유년은 내게 깊은 열등감과 비뚤어진 호승심, 그리고 분수를 모르는 욕심을 남겼다. 이는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도 몇몇 아주 똘똘한 벗을 함께 주었기에, 그냥 만족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모든 것이 핑계일 수밖에 없을 만큼 명백히 어리석었다. 시야는 좁았고 선택은 항상 일렀으며 또 무모했다. 용기와 무모함을 가르는 기준은 리스크를 알고 있느냐이다. 나는 용기라고 믿었지만 실은 무모함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운과 환경은 누구도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노력 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머리가 내 선택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마음만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충동의 결과가 나의 오늘이다. 나는 이 사실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바꿔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13.
여전한 문제는 내가 아직도 나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동족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순 없다. 선택이 필요한 종류의 일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 시간이 온다. 나는 이미 얼마간 늦은 듯하다.


따라서 다음 계단까지의 남은 삶을 걸고 나는 다시 선택한다. 이번 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길 기대하면서.


첫째, 나는 내 배움을 기록한다. 찌질한 일기든 어설픈 선동이든 소소한 감상의 기록이든, 내겐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쓰며 사는 삶을 꿈꿨으면서도 항상 다른 것에 취해 있었다. 취함은 쾌락은 줬지만 기능을 닦아주진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열심히, 끈질기게 하지 않는 것을 잘하게 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좋아하는 것은 자주 하기 때문에 잘하게 된다. 많이 쓰다보면 조금은 더 잘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건다.

 

둘째, 나는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지 않는다. 가능하면 연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한으로 한다. 덜 쓸 수 있으면 덜 벌어도 된다. 덜 벌어도 되면 이 소중한 자원을 더 많이, 쓰는 것에 투자할 수 있다. 더 많은 투자는 더 나은 결과의 확률을 높일 것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다. 즉 돈은 시간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간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산다. 마침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인생은 무척 안락해질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흔치 않다. 팔 수 있는 시간의 값이 너무 싸다면, 하고 싶은 일의 양이라도 줄여야 한다.

삶은 공정하다. 무엇이든 버린 딱 그 만큼만 얻는다. 3천원 짜리 타꼬야키를 포기하면 1천원 짜리 붕어빵을 사먹고도 2천원을 남길 수 있다. 다행히 내겐 미식의 취미가 없다.


 

14.
이 남루한 자서를 쓰며 그나마 스스로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헤매던 시절도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아니다. 긴 방황이 내게 남겨준 유일한 자산이다.

나는 내 욕망을 그 어느 때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내 욕망은 내 분수를 벗어날 만큼이나 크고 단단하다. 그리고 이 탐스러운 욕망을 난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는 누가 뭐래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서른셋이 다소 불만족스러울지언정 또다시 절망해야 할 만큼 낙오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_발정이 절정에 달한 어느 늦은 새벽에 쓰다.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The Road>


1.
사람이란, 오래 굶다 보면 서서히 몸이 약해지고, 곧 병들어 죽는다.
만약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한 경우엔 어떨까.

 


2.
이 영화는 삭막하다. 시종일관 어둡고, 희망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없다. 딱정벌레 한 마리에 걸어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 영화를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많이 아프다.

 

길 위에선, 함께 절망을 견뎌줄 수 있는 동행이 필요하다. 그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성장한 자식이나, 친구, 혹은 동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온전히 홀로 그 절망을 견뎌야 한다면. 그 절망의 끝에는 어떤 희망도 약속되어 있지 않으며, 아니, 희망이란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

 

때때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무채색의 바람이 불어대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굳이 종말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관객을 이끌고가는 힘은 오로지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강렬한 부성, 아니, 그것을 넘어선 이유와 흔적에 대한 집요함이다.

 


3.
현실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때때로, 대개 잠 못드는 밤이다.

 

여럿이 함께 이 영화를 본다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엔, 몇몇은 쫓기듯 서두르며 절망을 털어내려 할 것이다. 더러는 감독을 원망하며 눈물을 좀 떨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여 개중 나와 닮은 이들이 있다면,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피하며 극장을 빠져나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게 될 것 같다.

 

 

 

"If I were God, I would have made the world just so and no different."

 

 

2010년 1월 21일 목요일

아바타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관련글.

http://blog.naver.com/hajin817?Redirect=Log&logNo=60097100997
http://www.cyworld.com/inbj220/3456761

 

 

냉소적인 태도를 훈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사실은, 냉소의 대상이 자신보다 강자인 경우 냉소는 찌질한 투정에 불과할 것이며, 약자인 경우는 인간실격
의 한 증거가 될 수 있으리란 점이다. 따라서 적절한 냉소란 사실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찌해볼 수 있는 대상에겐 분노를,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대상에겐 짜증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불쾌감을 드러낸다고 봤을 때, 현대인은 분노는 점점 잃어가고 짜증만 늘고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우리가 발견해버린 이 거대한 세계 앞에서 점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우리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대략 비슷하다.

 

나는 이러한 '짜증의 과잉'이 하나의 시대적 유행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작은 노력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편에 설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가장 크게 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DJ는 이를 두고 "담벼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 했다.

 

물론 이런 정말로 사소하기 짝이 없는 분노는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편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힘을 상상할 수 있는 이라면, 북경에서 퍼덕인 나비의 날개가 뉴욕의 증시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영화 <아바타>는 관객 모두에게 어떤 영웅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또다른 아바타 조종사 노엄처럼 군바리놈들에게 죽빵 한방 날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헬기조종사 트루디처럼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할 수도 있을 터다. 그것도 아니라면 홈트리 붕괴 때 눈물이 그렁해진 이름 없는 오퍼레이터 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이입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런 보통사람들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반쯤 돌아버린 소위 '예술영화'의 또라이들이 아니라.

 

아바타의 줄거리가 바보 같다고?
그래, 난 바보를 좋아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사랑할 어떤 이의 별명도 '바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바보가 어느 너절한 평론가보다 지능이 낮았을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If you are one of us... Help us"

얘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단 마음이 들면 '바보'인 거야?

 

 

 


하악하악

 

디씨의 고딩들과 말을 섞다 보니, 이외수가 느꼈을 설렘이 이해가 좀 된다. 나중에야 결국 버럭! 했겠지만.

 

아, 부러운 청춘들이다. 나 때만 해도 뭔가 오덕질을 하고 싶은 건수가 생겨도 재료를 구할 곳이 없었다. 인터넷이 깔려서 온갖 정보가 저렴하게 공유됐던 것도 아니고.

 

정보가 사유화하지 않고 공유된다는 건 정말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요샌 선진국 흉내도 좀 낼 수 있게 된 힘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넋두린 블로그보단 트위터가 적당할 텐데- 아직 못 배웠다 트위터.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아바타 관련 읽을거리들

횽아들! 언냐들!

오빠 달려~♥!!!

 

 

 

 

무언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을 때 참조하기 좋은 곳들이 있다. 단편적 지식이나 상식으로 충분할 때는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in이 쓸만하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좀 마니악하다면, 디씨(dcinside.com)는 더할 나위 없는 정보의 창고가 된다. 장담하건대 디씨, 웃대(humoruniv.com), 루리웹(ruliweb.com), 요 세 곳만 잘 훑어도, 적어도 향후 반년간 대한민국 트렌드의 첨단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곳이 어디냐. 얼리어댑터들의 고향, 오타쿠의 성지, 대한민국 잉여의 총본산이다.

 

이런 곳들에서 발견한 아바타 관련 읽을거리들을 링크해둔다.

짧은 글토막은 출처를 밝힌 후 copy&paste.

 

 

 

아바타가 오마주를 바친 6개의 영화 _PSB

http://blog.ohmynews.com/hypersurface/162772

어디 이뿐이랴만.

 

 

판도라 백과사전(영문)

http://www.pandorapedia.com/doku.php

공식(official) 홈페이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등장인물 별 사망 이유 _mithril(dcinside)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871

그레이스 : 엔딩 장면에 대한 사전 설명용.
족장 : 엔딩후 생길 수 있는 이것저것 귀찮은 일 방지.
쯔테이 : 족장과 이유 동일.
트루디 : 괜히 살아있다가 원군 아크란들이 오해해서 공격받으면 개민망.
노엄 아바타 : 마지막 대결, 네이티리와 제이크 만남씬 방해되서 노엄이 밖으로 나갈 명분 제공.
쿼리치 : 얘가 숨쉬는 한 싸움이 끝이 안남.

ㅋㅋㅋ

 

 

아바타 평점이 낮은 이유 _ㅇ_ㅇ(dcinside)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942

ㅋㅋㅋㅋㅋㅋㅋ

 

 

영화를 보고도 이해가지 않는 장면이 있다면

http://gall.dcinside.com/list.php?id=avatar&no=3875

옥의 티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 댓글을 보자

 

 

 

(계속 추가... 할 지도)

 

 

잘하면 4반세기만에 아부지 손 잡고 극장 갈 기세.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아바타> 극장 관람 후기

 

"I see you"

 

1.

오히려 3D는 기대만 못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단 관람 매너 따위 알 리 없는 꼬꼬마들과, 4시 방향에서 끊임없이 종이 봉지를 구겨댄 이유가 궁금한 '스크자응' 한 분, 그리고 영화는 중반까지 왔는데 "어머, 쟤가 제이크야?"라고 묻던 7시 방향 아가씨까지,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빨리 돈 벌어서 극장이나 하나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동족들에 대한 투정은 이 정도로만 하자. 적어도 덕분에 30대 독신남 홀로 극장에 앉아 질질 짤 만큼 몰입하진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런 걸 감사히 여긴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기를.

 

각기 다른 표정에 주목

 

2.

이미 천 만 가까운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한다. 두 번, 세 번 본 이도 있을 테니 실제 관객수는 조금 모자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다. '이런' 대박 블록버스터들이 흔히 그러하듯 작품의 감상과 평가도 "최고다!"에서부터 "쓰레기다"까지 양 극단을 아우르는 듯하다. 다소 감성적인 다수파와, 냉소적인 소수파.

평소 최후의 소수파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아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주저없이 다수파 곁에 서기로 했다. 그들이 옳다. 내 편이 제대로 봤다.

 

내게도 세상에 대한 냉소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건전한 재능을 쌓아올려야 할 시기에 내 정신은,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익기도 전에 병들었다." 멀리 혹은 넓게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들, 불합리들, 부도덕들을 노둣돌 삼아,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고 결론지었다. 악화는 언제까지나 양화를 구축할 것이고,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것이다. 이런 곳에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고 별달리 용기있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오늘 또 하루 간신히 숨쉬며 휘청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2002년 겨울,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나 답게 좀 느릿한 걸음으로.

<아바타>는 이런 우리들에게 바쳐진 영화다.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가장 울컥했던 장면. 사랑해요 트루디!

 

3.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21세기에 속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권위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봉건의 잔재들도, 철모르는 아나키즘과 대책없는 낙관주의 같은 것들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 머물러 있다.

한때 나의 영웅이던 이문열 같은 이들은, 역사를 권위주의와 아나키즘의 무한루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 <칼레파타칼라>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 <호모 엑세쿠탄스> 이후의 그의 책은 하나도 읽질 않았으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없다면 여전히 희망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 <아바타>는, 가상의 별 '판도라'를 통해 20세기를 매조지하려 한다. 그 방식은 새 시대의 첫차라기 보단 구 시대의 막차다. 영화가 '피에타'서부터 <원령공주>, <공각기동대> 등 일본 애니메이션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놀랍게도, 아직도 '오마쥬'라는 말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휘라고 한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일에 표절이니 패러디니 매번 난리굿.)

마침(?) 판도라는 고통과 희망이 함께 담긴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과학기술 즉 문명이, 신성(神聖)의 영역을 침범할 때 간혹 인용되곤 한다.

 

"Network of energy"

 

4.

생떽쥐베리는 "완벽이란 무언가를 더 할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했다던데, 나는 이 어르신 말씀을 신용하는 편이다. <어린왕자> 쯤 되는 작품을 쓰고, 날아 다니다 죽었으면 그런 양반이 한 얘긴 복음처럼 들어줘야 한다.

 

<아바타>에는 단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더라. 하기는 러닝타임 162분에 제작비 3천억 원, 페르미식 막계산 때려보면 프레임 하나 당 무려 100만원꼴이다. 단돈 13000원에 이런 위대한 성취를 목격할 기회를 얻었다면, 조용히 찬가나 부르는 게 나 같은 필부의 역할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쪼가리뷰] Avatar, 어머니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Avatar, 어머니 가이아를 살해한 인류, 이번엔 에이와다

 


검색해보니 CGV 홈페이지에 링크된 리뷰만 600편이 넘는다. 나올 얘긴 벌써 거진 다 나왔을 것 같다. 한 편의 리뷰로 엮을 의미는 더 이상 없을 듯해서, 늘 하던대로, 쪼가리뷰로 정리한다.

 


1. 가이아 가설


영화 <아바타>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먼저 '가이아 가설(지구유기체설)'에 대한 이해를 조금
쯤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 15년 전 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이것을 접했을 때는 항상 '가설(hypothesis)'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언젠가부터인지 무려 '이론(theory)'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하기는 '이론'을 '검증된 가설'이라고 정의한다면, 이것도 이론은 이론이겠다. 반박될 수 없고 따라서 검증될 수도 없으니까. 말하자면 일종의 유신론이다.

 

판도라(열어서는 안될, 또 마지막 희망이 든 상자-라는 의미의) 행성은, 인류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 비해 고도로 진화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어머니 대지' 가이아에 비해 더 정교하지는 않을지언정, 그 신경망이 빤히 눈에 보이는 덕분에 관객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판도라의 '식물'들은 지구의 식물과는 겉보기만 같지 우리로 치면 오히려 동물에 가깝다. 광합성 하는 원생생물, 클로렐라의 파이널 버젼이랄까.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건 누가봐도 '피에타'다. '성모'와 상처입은 그녀의 아들.

 

 

제임스 카메론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아바타> 역시 강인한 모성을 희구한다. 네이티리는 제이크를 향해 "너(너희, 영어의 you가 단수와 복수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는 아기 같아. 소란을 피우고 해야할 바를 모르지."라면서도 결국 가르치고 보살피는 역할을 떠맡는다.

물론 "가득 찬 잔을 채우기란 어렵다." 하지만 우리에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지치지 않호기심이 있기도 하다. '용기'와 '호기심'은 <반지의 제왕>과 같은 환타지 세계관에서 흔히 인간종족의 미덕으로 꼽히는 것들이다.

 

 

 

2. 스머프 포르노?


어느 어줍잖은 블로거가 평하길, <아바타>는 "스머프 포르노"란다. 버섯 아래 사는 파란 녀석들의
섹스파티니까 나름 적절하긴 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포르노 작품을 보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불필요한 이유로 금지된 다른 많은 것들과 같이, 포르노 또한 예술의 극한영역 가운데 하나다.

 

나비족의 '사타구니'는 영화 극초반에 단 한번 노출되는데, 외성기가 없다. 팔랑거리는 천조각 하나로조차 가릴 필요는 사실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관객들은 더 큰 이질감을 느꼈을 테지만. 이질감은 곧바로 영화수익의 감소로 이어졌을 테고.

 

나비족의 외성기는 인디언식으로 땋은 머리털(사실은 음모)로 가린 채 뒤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구생물에게 익숙한 삽입식 성행위 대신, '플러그를 연결하듯이' 성합할 것이다. 바로 "샤헤일루(the bond)"다. 말과도 하고, 익룡과도 하고. 그러니 포르노가 맞긴 맞다.

 

 

 

3. <아바타>는 대마초 영화?


나비족의 외성기(?)와 대마의 암꽃

 

나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 외국 포럼을 뒤져보니, "Avatar was a pro-marihuana movie"라는 아티클도 있더라. 비약과 망상은 떨쟁이들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긴 하지만, 영화도 그걸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What the hell have you people been smoking out there?"
파커, 그레이스와 언쟁 중에.

 

해서, 제임스 카메론의 관련 발언을 조낸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가이아 가설'의 창시자 러브록도 마찬가지. 다만 관련 뉴스그룹에서 그의 이름이 엄청,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 정도만 확인되었다.

 

그 와중에 발견한 흥미로운 사이트 하나


 

 

4. 악역은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쿼리치 대령은, 사실 존경할 만한 불굴의 용사다. 그의 '울타리 밖의 적'이 설사
저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였다고 해도 그는 최후의 최후까지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는 통이 결여된 용기를 대표한다.

 

 

 

5. 판도라의 미래


<아바타>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 한다. 다음 편을 예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주요 테마는 틀림없이 '인간의 역습'이 될 것이다. 인류는 눈 앞의 이익을 결코 포기해본 적이 없다. 문명화(civilize)를 거부하는 나비족이 어떻게 하면 더 강력한-어쩌면 전술핵무기까지도 동원할- 우리의 역습에 맞설 수 있을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후속편이 나오면 <매트릭스> 때와 마찬가지로 전편 다시 보기가 유행할 거라는 점이다.

 

 

 

...

일단 여까지. 내일 드디어 3D 관람이다.

2010년 1월 5일 화요일

초성체가 싫다구?

1.

국문과 출신(잠시 뿐이었지만)에, 한때 문장을 문법에 맞춰 뜯어고치는 일을 업으로 삼던 전직 편집자(이 역시 잠깐...), +자칭 글쟁이로서 나는, 인터넷과 방송을 떠도는 형식 파괴의 신어(新語)들을 볼 때면, 묘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의한 오만과 편견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은 편이긴 해도, 지식·정보의 보급과 전파에 있어 '표준화(standardization)'란 불가피한 일로 납득하는 쪽이다.

이를테면 '출판용 문장'과 '블로그, 다이어리용 문장'을 구분한다는 식이다. 출판의 경우 아무래도 웹에 비해 비용이 더 크므로 보다 선별된 컨텐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비용'의 문제는 언제나 중요하다) 또, 웹의 텍스트가 공시언어학의 과제라고 봤을 때, 출판은 보다 통시적이다. 후세에 남기는 현재의 유적과 같은 것이다. 비교·참조할 텍스트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 의미는 사라진다. 즉 유행을 타선 곤란하다.

 

이와 관련해 [다음 웹툰]의 초신성 '랑또'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겼다.

 

"분명 1년만 지나도 촌스러울 거야- 흑흑. ㅠ.ㅠ" - <악당의 사연>, 후기 중에서

 

이에 비해 웹에서의 글쓰기는 한결 자유롭다. (역시 비용의 문제다.) 과연 몇 %의 독자들이 "드립"의 의미를 알고 함께 웃을 것인가. "꿀벅지"의 유행 또한, 2009년을 전후해 불어댄 '걸그룹'들의 쇠젓가락 같은 다리의 광풍이 지고 나면, 마니악한 취향의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who care?

 

 

2.

후(後)-근대는 9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이 땅에 상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서는 하루키가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인문학에선 푸코와 데리다가 유행했다. 정치경제에선 케인즈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 '가치의 해체, 더 많은 자유'로 요약되는 이러한 경향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세력을 확장해왔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것은 애당초 그러한 것으로 시작되었던 웹의 경우이다. 웹은 후-근대의 신생아다. 따라서 웹에서는 오히려 후-근대적인 것이 '주류'가 되었다. 주류라 함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의식하는 사람들이 적다는 뜻이다. 인지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해서 '포스트모던'은 이곳에서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악플러'나 '낚시글'과 같이, 이들의 전위를 통해 두드러지는 웹의 중요한 경향 가운데 하나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글쓰기다. 그들의 행동(action, 또는 reaction)은 원칙이나 논리보다는 충동과 감상을 동력으로 삼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엔 '목적'이 아예 없거나,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건 과정과 그것을 즐기는 글쓴이 자신이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 따위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혹시 이 포스트를 읽고 있는 독자가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을 갖고 있다면, 자신의 그것을 한 번쯤 돌아보는 것으로 직접 확인해볼 수도 있다. '설명문'이랄지 '논설문' 등으로 분류할 만한 포스트, 즉 '목적이 분명한' 글타래가 과연 몇이나 될까.

 

 

3.

나는 여기서 후-근대의 이후를 본다.

 

목적이 불분명한 글쓰기란 바꿔말해, '자기목적적인 글쓰기'라 할 수도 있다. 창조자 자신만을 위한 피조물.

이를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이라 해도 상관없다. 자위 잘하는 사람이 섹스도 잘할 확률이 높다. (뭐든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편이 낫다.) 단순한 배설이나, 모욕을 목적으로 하는 악플이라도 괜찮다. 모욕은 그 내용과 대상이 합당하지 않을 경우 결국 그 칼끝을 발화자에게 겨눌 것이다. 무엇보다 욕을 들어쳐먹어야 할 것들은 욕을 좀 먹어주는 게 서로에게 이롭다. 욕도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짓인 것이다. 무플은 악플보다 외롭다.

 

마찬가지로 형식 파괴의 신조어 또한 아낌없이 남용되어야 한다. 형식이란 목적을 위해서나 필요한 것이다. 목적이 없는 글, 혹은 자기목적적인 글이라면 형식에 얽매여야 할 이유가 더욱 없다. "ㅋㅋㅋ"도 좋고, "아 ㅅㅂ 꿈"도 좋다. 더 많은, 더 경박한 댓글을 마구 날리는 게 좋다. 중요한 건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더 많은 소통의 기회'이다.

 

인터넷 댓글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 그림과 같은 광경을 한 번쯤은 본 적도 있을 것이다.

 

다음 웹툰 <내츄럴 리로리드 : 시커먼 빛>(전상영作) 22화의 '베플'.

 

어떤 상황 아래서는 가장 조악한 표현이 가장 적확할 수 있다. 도대체 문자 텍스트로 어떻게 표현해야 "ㅋㅋㅋ"로 드러내는 정서, 즉 조금 방정맞고 꽤 실없이 웃으며 동시에 '당신이 왜그러는지 난 알지롱'하는 심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한국어에 외국어를 무심코 섞어 씀으로써 국어를 오염(!)시키는 것도, 국어교육을 너무 잘 받은 한국인이 외국어엔 통 젬병이 되는 것도 모두 이와 관련된 현상들이다.

 

 

4.

이쯤에서, 어떤 초월적 선(善) 의지의 추종자들이나, 신념의 투사들은 '격조(格調)'란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형식의 파괴 속에서 번뜩이는 실마리를 제때 잡아채지 못하면 우리는 또다시 낙오할 것이다. 이외수가 우연히 <하악하악>을 낸 게 아니다.

 

무엇보다 저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와의 생존게임에서 더 쉽게, 더 많이 살아남는 이유는 일단 많이 낳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는 똘추들은 그저 얼간이일 뿐이겠지만,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살면 결국 그 손해는 결국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인 것처럼, 발화(發話)되지 않은 생각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당신의 견해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당신의 생각보다 가치없지 않다.

 

 

 

 

 

지네 다리


 

 

2010년 1월 4일 월요일

폭설

밤사이 온 천지가 하얗게 덮이었습니다

눈은 낡은 옥탑의 남루도 가려주었고

어쩌면 눈부셔 내 눈도 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서정주의 싯구처럼 눈은 그저 괜찬타, 괜찬타- 하는군요

그 아래 묻힌 것들이 무엇이건

 

달콤한 거짓보단 쓴 진실을 원합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눈은 녹아 사라질 테지요

 

고마워요 숨기지 않아줘서

그래도 눈발이 나리는 날에는 춥지 않아 다행이에요

참 다행입니다

 

 

--------------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선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진눈깨비>, 기형도

2010년 1월 1일 금요일

2010년, 새해 '勇氣' 많이 받으세요.

 

 

다음 웹툰 <세브리깡>의 작가 강도하(대표작:<위대한 캣츠비>)가 2009년 마지막 연재분 말미에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남겼다.

 

 

 

 

버둥대는 (듯한) 고양이에 억지로 입을 맞추려 한 것은

특별히 '고양이'에게 부탁해야할 무엇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로,


 

 

2010년은, 용기가 많이 필요한 한 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