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7일 토요일

만 년짜린 없어

0.

사랑이, 대략 2년에 걸쳐 벌어지는 생리현상의 일종임은 분명하다. 이는, 어떻게 초극될 수 있을까.

 

 

1.

여체는, 극히 섬세한 장난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나 섬세한지, 30억의 시리얼 넘버가 있다면 30억 종의 작동 방식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점이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역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절대로 도중 '왓더헬암두잉히야?'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언제나 절대로 항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니다. 때로 난폭함을 동원한 생략은 '수컷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상의 '암컷성'을 극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다음, 법적 윤리적 책임이겠지만...) SM플레이와 같은 것들은 이러한 요소를 드라마틱하게 활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요소가 이상적인 무드(조명의 밝기와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교환된 감정의 선율과 같은 것들까지) 아래에서 이상적으로 배열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예지란 언제나 한계가 있으며, 또한 환경 역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차 있는 게 보통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이다. 말하자면, 이제 막 사랑에 빠져 서로를 열어보려 하는 두 사람의 욕망의 강도는, 앞으로 습득해나갈 서로에 대한 정보량과 정확히 반비례하게 된다. 누구라도, 줄줄이 암송할 수 있는 책을 다시 읽고 싶진 않은 것이다.

 

 

1.

'나'라는 존재가 나의 육체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다음에야, '나를 안다는 것'에는 일정 비율 이상, '나의 몸을 안다는 의미'가 포함되며, 마찬가지로 '나의 몸을 아는 남'은 분명히 연애 또는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적인 비밀은, 많은 연인들이 가장 흔하게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1.

물리력이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있다. 망치를 집어들어 정수리 쯤을 힘껏 내리치면 된다. 혹, 누군가의 영혼을 쓰다듬어주고 싶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영혼을 쓰다듬어주었으면 하고 느낀다면, 일단 누군가에게 머리를 내어맡길 일이다.

 

대체로 부모들이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부모를 닮은 대상'에게서 안식을 구하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처럼 자기 표현에 쓸데없이 엄격한 '때곳'에서는, 대상의 부모에게서 좋은 관계란 것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서로를 더 많이 더 자주 쓰다듬어주고, 서로에 대해 더 깊이 넓게 이해할수록 사람은 더 오래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둘 중 하나가 죽어 사라질 때까지, 혹은 둘 다 죽을 때까지만이라도 유지될 수 있다면, 이를 영원한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안고 싶고, 당신이 다른 남성에게 당신을 허락하는 모습을 (보통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함으로써 행복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기를 또한 바람과 동시에, 그 곁에 내가 항상 함께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당신은 내가 최근 느끼는 많은 행복감의 원인이며, 당신 역시 나로 인해 잦은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러한 감정상태를 일컫는 말로 사랑 말고 다른 것을 떠올리지 못하겠다.

 

욕망? 욕망은 사랑의 상위 개념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비롯한, 때로 숭고하게 여겨지는 많은 사랑들 또한 서로 대상과 형식을 달리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집착? 사전은 집착을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으로 정의한다. 이 경우 사랑으로 추정되고 있는 나의 감정상태는 '다소 집착하는 사랑'으로 묘사될 수 있다. 즉 집착은 사랑을 수식하는 말이지, 사랑 아닌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나아가 어쩌면, 경중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모든 사랑은 일종의 집착이다-라고도 말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고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꽤나 열렬히 욕망하며 제법 집착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이나.

 

 

허나 사랑의 약속은 물 위에 쓴다고 했다. 언제가 될까. 당신과 나의 눈앞에 드리워진 콩깍지의 커튼을 들어 내는 날은. 키스하며 입냄새를 느끼게 되고, 서로에 대한 신비감에서 비롯했던 존경심이 여지없이 벌거벗게 되는 그날. 우리는 이미 여러번 서로의 알몸을 보았고 앞으로도 수없이 보아나갈 테지만, 진정으로 발가벗은 영혼을 우리는 서로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약속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약속을 걸고자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준 것만으로도 앞으로 당신이 보여주게 될, 당신은 스스로 추하게 여길지도 모를 당신의 모습을, 무조건적인 선의와 함께 해석해나갈 것이다. 설사 우리의 관계가 보편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닥칠지라도 이 약속은 유효할 것이며, 이는 모든 상황을 야기할 책임이 당신보다는 내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포르노 단상

 

포르노물은 그 자체로도 꽤 즐기는 편이지만, 그럴듯한 핑계도 따로 있다.

 

핑계인즉슨, 어떻게 하면 변화무쌍한 인간의 성욕을, 단 하나의 이성하고만 평생토록 섹스하도록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인데, 어쩌면 포르노 제작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일본의... ... 또 어쩌면 이 질문은 주로 남성들에게 주어진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제9계명을 한 번도 어겨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여기서 제외된다.

 

욕망은 해소되어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되곤 한다. 이는 건전하지 않다.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 있게 하는 힘이다. 문명은 우리의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발전해왔다. 문명은 더욱 세련되어질 수 있으며, 이는 모든 욕망의 건전한 발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 건전함에 대한 합의야말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헌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 된다. 법은 과연 "최소한의 도덕"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망할 법이 헌법을 거슬러가며 포르노를 금지하고 있으니... 이런 뭣같은 경우가 다 있나. 아동 포르노나, 미성년자 매매춘과 같은 문제는 경제정책의 과제지 윤리로 따져들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란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 생명이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허용된다.

 

2010년 2월 16일 화요일

What a freak?

번뇌가 욕망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욕망이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욕망을 죄의식과 연결시킴으로써 욕망의 생성과 발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죄없는 욕망 앞에서라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욕망, 혹은 통제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한 것으로 예측되는 어떤 욕망들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팔을 베고 잠들었다 문득 깨어났는데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던가 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대체로, 무심코 저지른 사소한 행동-팔을 베고 잠들었는데-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실-'팔 병신'이 됐다-을 일으키곤 한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사람이란 아무래도, 저항할 근거를 찾게 된다. 공포가 절실할수록 그 근거는 처절한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인간의 행동을 촉발하는 두 가지 동기로 욕망과 공포를 들기도 했다. 욕망이 능동, 공포가 피동이다.)

나는 사랑을, 문명화된 양식의 소유욕과 성욕으로 정의하고 있다. 소유욕은 사랑의 인간적인 면, 성욕은 동물적인 면이다. 이 둘은 때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한 것 같다. 부끄럽게도.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친구2

친구라는 말로부터 내가 두 번째로 떠올리는 인물은 L군이다. 이 친구가 두 번째가 된 까닭은 늦게 만난 탓도 있지만, 이 자의 성향이 어떤 면에 대해선 나와 완전한 대극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론 그 까닭을 같은 기질이 다른 환경 속에 자라난 탓 아니겠는가- 추측한다.) 이 친구와 교류를 시작할 무렵, 나는 그를 "적(敵)"이라 부르곤 했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나라에는 양호라는 장수가,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꽤나 끗발 날리는 장수들이었다곤 하는데 그래봤자, 말하자면 대하 드라마 삼국지 제작 후기 쯤에나 잠깐 등장하는 식이니 별 비중은 없는 이름들이다. 아무튼 이 양반들이 어떤 점에서 특별한가 하니, 이런 고사가 '호항지교'라는 말로 전한다.

 

272년, ... 하루는 양호와 육항이 같은 시간대에 사냥을 나갔는데 양호는 오나라 군대의 구역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냥을 하였고 자신의 구역 안에서 오나라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짐승은 모두 오나라에 돌려주었다. 이에 약간 오기가 생긴 육항은 사냥감을 돌려주러 온 병사에게 양호가 술을 좋아하는지 물었으며 병사가 "술은 잘 마시지 못하시지만 좋은 술이면 아주 잘 드십니다"라고 말하였고 육항은 웃으며 "좋은 술이 있으니 사냥감의 답례로 장군에게 바치거라"하며 술을 한 병 내주었고 병사가 그 술을 양호에게 바치자 양호는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술을 한 병 모두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수들은 "적군의 장수가 보내온 술에 뭐가 들어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함부로 드셔도 됩니까?"라며 걱정했으나 양호는 "육항은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대답하였고 하루는 육항이 병으로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접한 양호는 병사에게 시켜서 육항에게 좋은 약을 지어 보내도록 하였다. 육항은 양호가 보낸 약을 보고 "이 자가 내가 보낸 술값을 보내왔구나"라며 약을 먹었는데 오나라 장수들도 양호의 장수들처럼 약을 먹는 것을 말렸으나 육항은 개의치 않고 약을 먹고 쾌차하였다.
...
274년, 다시 병으로 누운 육항은 죽기 전 서릉의 중요성을 손호(오나라 왕)에게 알려 서릉의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고 긴 상소문을 올렸으나 손호는 이를 무시하였고 육항은 4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육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양호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나라를 멸할 수 없다며 ... 오나라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 사마염(위나라 왕)은 양호가 죽은 뒤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 오나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 이로써 약 100년간 이어진 삼국지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내용출처)

 

적이란 내게 이런 의미이다. 어쩌면 이 친구 덕분에 나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맹렬한 적개심을 품기 이전에, 한 번 정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쩐 일인지 요즘엔 좀 낙심한 듯하다. 안빈낙도할 타입이 아닌데 그러고 있으니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이봐, 아직은 우리 한 번 더 실패해도 괜찮아. 불혹이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고독이라는 것이, 이제와 새삼 더 두려워해야 할 무엇은 아니지 않아?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후회에 대하여

왠지 근래에 알게 되는 이들은 "난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후회 같은 걸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 모르겠으나, '난 절대로 후회한 적 없어'로 보이는 경우엔 좀 난감하다. 후회가 무슨 큰 죄악인양 할 때도 있고, 외려 너무 큰 후회할 거리가 있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후회는 바람직한 것이다. 후회란 장차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다짐이다. 같은 상황이란 게 좀처럼 오지 않는 것이라 문제지, 선택의 기회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다른 선택이 가능한 상황인데도 같은 선택을 할 만하다면 애당초 후회할 일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내게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는 '행복한 사람' 또는 '행복을 가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이 정도면 "나랑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아?"라든가,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와 같은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까.

 

효도관광 후기

 

사반세기(四半世期)만의 쾌거를 이뤘다.

SF도 싫고, 우주선도 싫고, 외계인도 싫고, 일단 춥고 멀리 가기 귀찮아 싫으시다던 근엄한 울 아버지,

객석으로 날아 든 CS-40 최루탄 깡통에 움찔! 하셨다.

(다른 모든 어르신들과 함께. 우연찮게도 유난히 많더라.)

 

움찔!은 몰입의 증거다.

몰입하실 수 있었으면 됐다. 몰입할 수 있으면 된다. 해서, 감상은 따로 여쭙지 않았다.

 

다음 대선엔 유시민에 투표하실 확률이 1%쯤 상승했다.

 

2010년 2월 9일 화요일

결국 정치

돈이 아니라 권력이다. 메뉴판을 들고 내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권력. 사랑하지 않는 고객님에게 사랑을 고백케 하는 권력. 돈은 매우 합리적으로 고안된 권력의 계량 단위이다. 즉 돈은 권력의 교환가치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다.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게 아니라 권력에 의존적이 되었다는 뜻이다. 권력은 추구해볼 만한 가치이다.

마키아벨리가 선의의 권력자를 위해 대중을 조작하는 법을 고안했다면, 이제는 대중에서 시민으로 각성한 하나하나 스스로가 주변의 소수를 조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조작'은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작이 나쁜 게 아니라 오도된 선의가 나쁜 것이다. 설득할 수 없다면 조작과 선동이라도 해야 한다.

응?

약속은 어쩌면 남자를 위한 것. 몇 시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내가 존재하리란 약속. 확정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전망. 계획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 그리고 공포. 낯선 잠자리 같은 것들. 지켜야 할 소중함. 가족, 연인, 사랑. 결국 사랑. 사랑의-

2010년 2월 6일 토요일

착한 척

 

나는 언젠가부터 대놓고 착한 척을 하게 되었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잘난 척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착한 척이라도 하게 된 모양이다. 잘나고 싶은 거야 인지상정이지만, 내 경우엔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얼마나 잘난 척을 좋아하는지, 무엇 하나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잘났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한 구멍만 파는 끈기가 부족했고, 결국 뭐 하나 잘난 구석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잘난 척은 사람들이 통 받아주질 않고, 아 젠장, 착한 척이라면 좀 더 쉽겠거니 생각한 게다. 좋아. 착한 척을 하자. 음... 근데 뭐가 착한 거지?

착한 게 뭔지를 알아야 무슨 척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과연 무엇이 착한 것인가 곰곰 생각해보게 된 거다.

 

이런저런 생각의 과정이 있었지만 귀찮으니 과감히 생략하고, 노무현이 바로 착한 사람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런저런 상황 아래서 노무현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기준 삼아 흉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모든 상황에서 그와 같은(같을 거라고 추정되는) 선택을 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쯤은 착한 척하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 진작 되어 있었겠지. 나는 고해할 수 없는 죄를 많이 지었고, 앞으로 죄가 될 지 모를 선택들을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착한 척일 뿐이다.

 

2010년 2월 4일 목요일

게임 이야기

 

드디어 리치킹이 쓰러진 모양이다. 관련기사

 

유출된 엔딩 동영상을 보니 컴백의 욕구가 용솟음친다. (아서라... ㄷㄷㄷ)

한국어 더빙 이전에 먼저 유출되었던 대사를 살펴 보니, 더빙이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진 않다.

 

다른 모든 생명을 대신해 영원한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려 한 무모한 영웅들의 이야기...

이는 십자가에 못박혀 원죄를 대속했다는 어느 신의 아들 전설과 같은 모티브가 아닌가.

그러고보면 디아블로II의 탈'라샤의 경우에도 그렇고, 블리자드 게임의 영웅 이야기는 뭔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맛이 있다.

 

탈'라샤, 적당한 팬아트가 없어 직접... -,.ㅡ;

 

 

독도는 우리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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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67.212.174.244


 

 

어여쁜 아키바 리에짜응이 독도 관련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일본인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넘도 참... 놈이다. 꽤나 새디스트임에 틀림이 없다. 이건 말하자면 개신교도한테, A.D.원년에 중동 어딘가에서 태어나 서른 해 남짓 살다 간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라는 자가 신이냐 인간이냐 묻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도 무슬림 한 가운데서.

 

대체 어찌들 '독도는 100.000...% 우리 땅'이라고 확신하고들 사는지 통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내 경우에는 노통의 확고한 권리선언①에 힘입어 '독도가 백만 년 전에 누구에게 속했거나 말거나, 당장은 우리 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정도로 정리해두었지만, 이는 사실의 판단이라기 보단 가치의 선택이다. 권리라는 것은 사실판단에 따라 도출되는 게 아니라 가치선택에 따라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관찰자의 기록 없이 성립하지 않고, 관찰자는 그 포지션에 따라 관찰 내용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② 따라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서로 다른 두 관찰자의 기록은 당연히 서로 다르게 쓰여지며,③ 따라서 아키바 리에 양의 믿음과 나의 믿음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나는 '적진 한 가운데'서 민감한 사안을 자극한 그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우리 한국인이란 별달리 애국자연하지 않는 이들조차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하는 게 사실이다. 국수주의는 결국 파시즘과 하나로 흐르는 것이므로 지양되는 편이 옳다.

 

물론 리에 양의 이번 발언에 3.1절에 방영된다는 TV극의 흥행을 노린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혐의를 씌워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한들 나의 지지를 흔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의 도리에서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마케팅의 방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번 사건(?)이 사람들로 하여금 저 노무현의 명연설을 한 번쯤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 참에 리에짜응도 한 번...

 

 

사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