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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토요일

구글의 블로그 사업 진출과 네트워크의 힘, 그리고 노무현

구글이 textcube라는 이름으로 블로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 포탈계의 쌍벽-네이버와 다음은 진작부터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고, 싸이월드도 여전히 반응은 시원치 않을지언정, '싸이미니홈피'의 표현력에 한계를 느끼고 이탈하는 유저들을 붙잡기 위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한지 꽤 되었다. 삼마을 주인장이 사고를 당한 이후 나는 티스토리를 대체할 파워블로그를 기다려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유튜브 실명 인증 거부 사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위한 익명성 보장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는 구글이 한국 블로그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나는 구글의 심플함을 사랑한다. 광고도 뉴스도 없는 단순한 화면. 전 세계 어느곳, 아무리 인터넷이 느린 곳, 즉 IT인프라가 열악한 곳에서도 구글의 홈페이지는 가장 빨리 로딩될 수 있을 것이다.

광고와 뉴스가 없다는 사실은 또한 정보에 대한 선택권이 전적으로 유저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세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네트워크로 이해하려는 세력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오늘날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하다. 위대한 영도자나 위대한 수령 동지가 없어도 우리는 네트워크의 시너지 작용을 통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노무현이 말했듯 강은 굽어 흘러도 결국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더욱 가엾은 386 선배들.

세계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해가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 가정하면, 저항세력은 결코 기득권을 이겨낼 수 없으리란 사실이 자명하지 않은가... 여러 다른 정의도 가능하겠지만 우리가 특정 세력을 일컬어 '기득권'이라 칭할 때는 그들이 '강자'의 위치에 있음을 이미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론적인 세계에서 강자는 항상 약자에 대해 승리한다. 이는 지구와 태양의 인력 관계에 있어 태양이 거의 일방적으로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와 같은 구조주의에서 파생한 사회혁명론은 약자인 프롤레타리아가 '조직화'함으로써 강자인 부르쥬아 계급을 타파할 수 있다고 묘사한다. 그래서 한국의 속칭 386들은, 똑같은 구조주의자들인 기득권과 정면으로 맞붙었고 그 결과는 산산히 깨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모자라는 이해에서 비롯한 모자라는 결론이다.

 

그들은 사실상 승리했다. 기득권의 세뇌와도 같은 저주에 걸려들어 스스로도 패했다고 믿어버리게 되긴 했어도, 그들이 일으킨 '진동'은 한국 사회라는 비균질한 계에 아직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바마의 당선은 결코 우연이나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방법론의 실패들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윤리적 인간'에 대한 니즈를 증가시켰고, 그렇게 축적된 니즈가 변화(Change!)와 희망(Hope!)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오바마를 트리거 삼아 폭발한 것이다. 이 폭발에는 미국 사회의 진보한 온라인 네트워크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오바마가 지역사회운동조직가(Community Organizer) 출신이라는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다. 비교적 젊은 천출의 비주류, 비주류에서조차 비주류, 하버드와 사시패스로 공증된 능력, 삶의 과정에 있어서의 진정성 등 이토록 다양한 공통점이 일반에 회자되지 않음도 역시 우연으로 볼 것인가?

 

물론 노무현의 당선은 보수의 분열이라든가 부산-경남권의 호의라든가 하는 여러 호재가 함께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개별 사건들이 강력한 시너지를 일으킨 것은 386이 백본이 된 온라인 네트워크였다. 89년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 논쟁 이후 2002년 대선처럼 살벌했던 가족내 정치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의 학비를 끊고, 자식이 늙은 아비의 용돈을 끊는 혈전이었다.

 

이후 기득권은 곧바로 반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십분 활용함과 동시에, 한층 업그레이드된 집요함으로 네트워크를 장악했고, 결국 다시 시장지배적인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노무현을 당선시킨 것만으로 제 할 일 다한 것처럼 퍼져버린 386들의 책임이 작다할 수 없다. 애당초 고졸의 천출을 그들이 마음 깊이 신뢰하긴 어려웠던 듯하다.

미국 공화당 역시 싸지른 똥이 많아 한동안 숨죽이겠지만, 클린턴을 탄핵소추하고 끝내 지퍼게이트에 몰아넣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바마의 빈틈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성향은 묘하게 우리와 닮아 있다. 두 사회의 네트워크 인프라가 턱 없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음에도, 해방 이후의 일방 종속적인 역사 탓인지 미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파동은 한반도의 남단에 곧바로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데 이후 양국의 네트워크 인프라 발전 속도에 차이가 나면서부터는 그 파동이 한때 역전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노무현의 당선이라는 것이다.

 

온라인 네트워크의 개념이 보다 단순했을 무렵, 세계는 근대의 구조주의적인 모델에 따라 꿈틀대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거대 담론들이 부딪혀 거대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자잘한 담론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변수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에서 나비효과의 예와 같이 자잘한 변수라 해서 결과에 미치는 영향 또한 자잘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 체제경쟁은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개방노선을 걸으며 마치 자본주의가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막을 내렸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비해 '네트워크의 힘'을 살릴 수 있는, 반중앙집권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체제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었을 뿐이다.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은 수정-자본주의라는 형태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공산주의적 장점을 체제 내에 이식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고, 당시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적 방법론의 우월성을 도입하려는 시도, 즉 개량주의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던 것과 비교된다.

이 시기가 미국 대통령으로 보면 루스벨트로부터 케네디로 이어지는 민주당의 황금기였다.

 

 

기억하자. 현대로 불리는 시대가 시작된 이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린 한국 전쟁을 제외하면, 전쟁은 모두 미국 공화당 집권기에 일어났다. 전쟁영웅 출신의 공화당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집권하자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결국 사임한 닉슨 시절엔 매카시 광풍이 불고 대마초가 불법화 되었다.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을 일으키고 아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서 한국전쟁의 역사적 예외성을 보충하고 싶어지는데, 당시 미국 민주당으로서는 한국 내전을 방치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 이전 히틀러와 맞서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학습한 서구인들로서는 당시 소비에트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자유보다도 더 위험해 보였을 것이기 떄문이다. 결국 이는 외교적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드러났고, 매카시 광풍으로 반복되었다. 여기에 분명 자본가들이 개입하였고 이를 조장했으리라는 점에는 이의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의 전체주의가 자본가들의 탐욕보다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었을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지난 10여년 간, 즉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견제를 잃은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가 폭주하는 동안, 변증이라는 구조주의적 법칙, 작용-반작용의 물리법칙, 그리고 카오스라는 우주의 법칙을 따라 네트워크 또한 크게 성장했다. 말하자면 대중은 점점 더 조작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첨단의 매스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에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일까?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조작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메커니즘은 네트워크적인 계가 어떤식으로 진화해 나가는 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생애동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앎의 전부였던 시절로부터,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잡것'들이 사방팔방에서 끗발 날리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 시절로 진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는 데에 필요한 비용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비용이 점점 더.

 

 

이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실체다. 일개 블로거들로부터 정치인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소통과 타협, 상식에 근거한 원칙을 신봉하는 이들이 네트워크의 사회를 앞당기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한국인이 '전 세계'를 말할 때는 주로 영어권 국가들을 뜻한다-으로는 구글의 약진, 오바마의 당선, 영국 노동당의 재집권, 유로의 탄생, 등등의 사건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과 그를 도운 386들)이 물꼬를 텄고, 노무현(과 그를 당선시킨 386들)이 대세를 굳혔으며, 386이 지레 좌절함으로써 다시 근대화론자들에게 명분을 넘겨준 상태이다.

 

여전히 '적'들은 건재하고, 더 많은 자유가 우리를 더 많은 진리와 복리에게로 인도할 것이란 믿음도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조주의자가 아닌 포스트-구조주의자로서 나는 이 전쟁의 끝이 승리일 수도 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만, 예측될 수는 없다.

이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 ps. 주저리주저리 잔뜩 쓰긴 했는데 곳곳에서 귀차니즘과 부딪히고 만다.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도 좀 필요할 듯싶고, '네트워크적'이라 표현한 의미에 보다 적절한 전문용어가 있을 듯도 한데, 아아 역시 귀차니즘...

2009년 5월 18일 월요일

로하스의 시대가 온다.

로하스족(LOHAS)

 

건강, 환경, 사회정의, 자기발전과 지속가능한 삶에 가치를 두는 소비집단  

로하스(LOHAS)는? :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칭. 

특징 : 재활용품, 유기농 농산물, 환경친화적 여행상품 등을 소비하며 생활함

관련정보 : 로하스족으로 사는 10가지 방법, 웰빙족 

2000년에 미국의 ‘내츄럴 마케팅 연구소’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건강과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생활방식 또는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을 말한다.

개인의 정신적∙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환경까지 생각하는 친환경적인 소비 형태를 보이며, 자신의 건강 외에도 후대에게 물려줄 미래의 소비기반의 지속가능성까지 고려한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장바구니 사용, 천으로 만든 기저귀나 생리대 사용, 일회용품 사용 줄이기, 프린터의 카트리지 재활용 등이 있다.

로하스의 개념은 환경과 미래에도 지속이 가능한 발전을 고려하는 '사회적 웰빙'이라는 점에서 개인을 중심으로 잘 먹고 잘 살기를 추구하는 웰빙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의 건강을 위하여 집 안의 벽지를 친환경 소재로 바꾸는 것은 웰빙이다. 

그러나 벽지의 원료가 재생이 가능한 것인지, 폐기할 때 환경 파괴 성분이 나오지 않는지 등을 따지는 것은 로하스이다.

또한 로하스는 개인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사회참여운동의 일환인 친환경주의와도 차이가 있다.

 



이들이 바로 차세대 마케팅 전략이 겨냥해야할 새로운 소비자 집단이다. 아니, '새롭다'는 것은 부정확하다. 이미 대세이다. 이 포스트를 읽는 당신도 내 글에 공감하거나 말거나 이미 로하스족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의 상업적 폭발력은 한국에선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중에는 불어닥칠 것이므로, 지금이야말로 '1년 내 시판이 가능한 로하스 관련 상품'들을 기획하기엔 가장 적기, 혹은 마지막 찬스일 것이다. 아마도 규모가 있는 기업들은 이미 개발이 진행 중일 것이라고 본다.

이제 한국에서도 점차 정착되어가는 장바구니 사용과 같은 소비 행태는 환경보호와 관련한 법률들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강요의 합리성이 대중에 설득되면서 일반 윤리로 정착하였다. 다시 말해 대중에 의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중은 젊은날의 꿈을 잃었다. 안정된 미래에 대한 낙관도 가질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지쳐버린 것이다. '야망'이라든지, '꿈', '장래희망'을 작게(현실적으로) 설정하고, 적당한 성취를 이루면 그 자리에 안주해버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도 이만큼 사는 게 어디야?'라는 심리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도덕적 열망에 의해 그들의 '적당한' 안주(安住)는 또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걸로 끝인 걸까?'라는 반성이 자기 안에서 끊임 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인간을 따라다닌 실존적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로하스'족의 개념은 대중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내가 크게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작은 노력만으로,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를 일부러 부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싶은 인간의 바람직한 본성에도 부합한다. 희생이라 하기도 거시기한 작은 노력과 실천만으로도 큰 도덕적 만족감을 주는 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이를 확대해석해보면, '로하스족' 개념의 유행은 '홍익인간'의 재림에도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386세대. 이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은 피 흘려 이 만큼의 민주화를 이뤄주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얻은 자유는 누릴 줄 몰랐던, 가엾은 세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이 세대론적으로는 현재 대중 가운데 가장 구매력, 즉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이다.

이들 정통 홍익인간의 후예들이 품었던 '왕년'의 꿈은 정말 아름다웠다. '민족 통일'이라든지 '노동자 해방'과 같은 것들이다. 어느쪽을 선행해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서로 다투느라 결국 적전분열해버리고 말았지만, 어느쪽이든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는 가치라는 점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386세대는 자신들이 이뤄낸 것들의 가치를 그 윗 세대, 즉 '기성세대'에 의해 폄훼되고 부정당하다가 결국 그 부정과 폄훼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말았고, 이러한 타협에 대한 죄책감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로하스족'이 되는 것은 이런 좌절감과 죄의식을 다소나마 효과적으로 치유해줄 수 있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이 '작은 실천과 참여'라는 웹2.0적 방법론과 386세대의 도덕적 갈증이 일으킬 수 있는 폭발력은 한국의 자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소위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시장권력'이 그런 이유로 해서 '그린 뉴딜'과 '사회투자국가론'과 같은 '위험한' 개념들이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혹은 피상적으로 이해되는 데 그치도록 하는 여러 정치적 활동들을 현재 진행 중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국의 시장권력에게 있어 '그린'은 아직 충분히 독점하지 못한 시장인데 '그린 열풍'이 난데없이 그들의 준비보다 먼저 불기 시작하면, 그들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결과, 즉 과거 노무현의 당선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를 부르고 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난 5년간 각고의 견제 끝에 '참여 정부'가 '국민의 정부' 수준의 개혁에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있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의 세월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그들이 요즘 그토록 노무현 죽이기에 열중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노무현'은 노무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정작 386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상관 없이 '386적인 가치'의 정치적 아이콘이다. 노무현을 죽이면, 386도 죽는다.
 

누가 뭐래든 현재 대한민국의 시장권력은 국민의 헌법적 주권 위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 방법론에 의해 소비자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에게 적당히 분산되어 있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으나, 실은 소비자의 대의 기구를 참칭한 기업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이다. 이 빼앗긴 주권을 국민, 아니 '시민'이 되찾으려 하는 패러다임시프트의 전조(前兆) 가 바로 '로하스족' 열풍이 될 것으로 나는 예측한다. 
 

 
※ 써놓고 보니 완전히 점쟁이 같은 소리다. ㅡ,.ㅡ 1~2년 뒤 두고 보면 알겠지 뭐. 그때 가서 잘 맞췄다면 복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겠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