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일 월요일

루저를 위한 변명 - 나에게 삼 비범의 의미

나에게 삼 비범은 어떤 의미인가

삼은,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내게 특별히 절실한 이유는 당장이라도 비범죄화 된다면 나와 내 벗의 자살을 편하게 저지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또 어딘가 있을 누군가를 살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가서 죽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만히, 그이가 왜 죽고 싶은지 이유를 묻는다. 굳이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면, 이유는 대개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졌어요." 가서 돈 벌어라. 돈 벌어서 남들이 말하는 성공하면 세상 여자가 다 네 것이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가서 돈 벌어라. 당신이 돈을 벌어 성공하면 누구나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들이 당신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는 논외로 하자.

"부모님은 늙어가는데 애인도 없고 아프고 힘들어서 죽고싶어요."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든, 가서 돈벌어라. 못 벌겠거든 로또라도 사놓고 당첨되길 빌어라. 99.999...% 확률로 꽝이겠지만, 별 수 없잖나. 그게 당신 팔자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면, "가서 돈 벌어라"는 할 말을 잊는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데요?"라고 물어올 테니까. 죽으면 모든 고통이 끝날 텐데 굳이 그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삼이 개입할 수 있다면면 얘기는 달라진다.

"죽고 싶어." "삼을 해봐라. 살고 싶어진다."

너무나 당연히, 삼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잠시 위로해줄 뿐이다. 삼은 단지 어떤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재미를 잠시 일깨워줄 뿐이다.

누구나 이 사실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진 않지만, 세상엔 그렇게 절망 속을 뒹구는 가엾은 영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줬으면 한다. 이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상처받기 쉬운 여린 영혼을 가졌다는 것 뿐, 이들은 약한 탓에 악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악하다면 그들이 수시로 처하는 곤경에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에 그토록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약한 동시에 악한 이들의 수가 많았다면 서울의 밤거리는 이렇게 안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하지만 악하지 않은, 이들은 죄를 범하느니 자신을 파괴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들에게 흔히 던져지는 "강해져라."라든가, "맘먹기에 달렸다."라는 식의 충고는 비록 그것이 선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더라도, 그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언어 폭력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팔다리 없이 태어난 모든 이가 오토다케 히로타다(<오체불만족> 저자)처럼 노력하며 살아가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강해졌다. 이들도 언제나의 누구나처럼 현대문명사회의 주문에 따라 더 강해지려고 노력해왔다. 강해지면서 악해지지 않으려니 삶이 더 고단할 뿐이다. 때로는 선천적, 때론 후천적인 이유로 이들은 영혼의 불구자가 되었다. 사회는 이렇게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들, 혹은 더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 적은 이들을 아울러 '루저(loser, 낙오자)'라고 칭한다.


그러니 이 루저들에게 삼을 허하라. 삼은 천사와 악마를 모두 게으르게 한다. 선(善)은 비록 좋은 것이지만 강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게으른 악은 위험하지 않다. 선한 게으름과 악한 게으름 사이에서라면 누구라도 선한 게으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삼에게 죄가 있다면 값이 너무 싸다는 것, 문명사 밖으로 꺼져줘야 할 퍽킹 루저들이 조금만 노력하고도 충분히 행복해져 버릴 수 있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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