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6일 월요일

판도라의 상자

1.

'판도라의 상자'라는 옛날 이야기가 있다.

 

옛날 하고도 아주 먼 옛날 판도라라는 처자가 있었는데, 신이 그녀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 줬단다. 절대로, 절대로 열지 말라는 엄명과 함께. 상자를 주면서 열지 말라니 무슨 심보였는지 짐작은 되지 않지만, 하지 말란 짓은 원래 더 하고 싶은 법. 그녀는 결국 이 상자를 열어젖혔고, 상자 안에서는 질병과 고통, 증오, 분노와 같은 온갖 못된 것들이 잔뜩 튀어나와 인간 세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에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상자를 다시 닫았지만 너무 늦었던 모양이다. 신의 명령을 어긴데다 대형사고까지 쳐버렸으니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에게 상자 속으로부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단다. 기왕 배린 몸, 판도라가 상자를 다시 열어보니 그때 나온 게 바로 '희망'이었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악의 근원에 대한 신화로, 흔히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말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그 저주받은 상자에 과연 좋은 게 하나라도 들어 있었을까. '희망 고문'이라는 신조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은 오히려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저주로써 작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2.

인간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의견이 판이한 것 만큼이나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 또한 그러하다. 나는 오랜 생각 끝에 노무현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인간형에 닿아 있다고 판단했는데, 말인즉 내가 그를 '군자(君子)'의 한 전범으로 삼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자리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끝없이 회의하던 사람으로, 회의를 통해 학습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했으며, 그의 두드러진 용기는 폭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인간애에서 비롯한 것이었기에 절제가 있었다.

 

운나쁜 타인을 가엾이 여기는 측은지심, 틀린 것에 성낼 줄 아는 수오지심, 자신의 행운에 교만해지지 않는 사양지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남을 옳게 구분할 줄 아는 시비지심, 옛 성현들이 군자의 조건으로 세운 네 덕(인,의,예,지)을 그는 모두 갖추었다. 군자란, 임금된 자다.

 

 

3.

공화주의란,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누군가보다 유별나게 뛰어날 순 없다는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에 선악을 묻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 이익의 평균값이 떠도는 어딘가에서 최선 아닌 차선이나마 건져 보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나는 순혈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라기 보단, 본질적으로 왕당파에 가깝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래도 그나마 그것이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박지만이나 전재국, 전재용이 통치하는 '대한왕국'을 상상해보라.

 

그러나 덕분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행운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하였다. 자본이 곧 권력인 이 시대를 고대 로마 시대에 비유하자면 저 자본가와 현대판 귀족들은 집정관과 원로원이며, 평민에 의해 선출되는 권력은 호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시기에 마침 좋은 호민관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흔치 않다.

언제나 그래왔듯 호민관은 집정관에 비해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떠났다. 왠일인지 어떤 평민들은 도무지, 자신이 평민임을 자각하질 못하는 까닭이다.

 

 

4.

그래서 어쩌면, 노무현의 가장 큰 죄악은 평민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는 어쩌면 확률 범위 안의 작은 파동이었을 뿐인데 어떤 전조로 오독된 것이었다면.

 

하여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나는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그의 이름 아래 희망을 건다. 조선 반도에 역사란 것이 시작된 반 만년 이래 처음 스스로 곡기를 끊은 임금이 이곳을 떠난지 단 1년 만에 벌써 그날의 황망함을 다 잊었다고 한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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