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일 금요일

DJ 오래오래 사시라.

1.

혹시 민주당은 DJ의 서거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민주당이 소위 '범진보진영'의 지지를 '한 큐'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이슈는 이것 말곤 없어 보인다.

한국의 비좁은 정치 공간 안에서는 이미 더 커질 공간이 없는 거인이자 '살아있는 전설'인 DJ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발언을 어떻게 한들 어떠한 정치적 임팩트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바다에 한 컵의 물을 더한들 묽어질 리 없고, 한 사발의 소금을 더한들 더 짜질 리 없는 까닭이다.

 

 

2.

노짱이 즐겨봤다는 미드 <The West Wing>.

 

미드 <웨스트윙>을 보면, 치매'끼'와 노환에 시달려 오늘내일 하면서도 절대 사임은 하지 않는 어느 대법관의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의 대법관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한번 임명되고 나면, 죽거나 탄핵되거나 혹은 스스로 사임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교체되지 않는다. 그 임명의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으나, 반드시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미드 <웨스트윙>의 정치 지형은 녹록지 않다.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이지만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대통령은 새로운 대법관을 확실한 진보성향의 판사로 임명하고 싶다. 게다가 대통령의 지지율은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결국 대통령은 늙어 죽어가는 대법관에게 사임을 종용하게 된다. 자신의 임기 중에 대법관을 임명해야 진보 성향의 판사로 그 자리를 메꿀 수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런데 대법관은 20여년 전 카터 시절 임명된 진보적인 판사이다. 그는 자신의 죽을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임하지 않고 끝내 버팀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미스테리는 에피소드 말미에 가서야 해소되는데, 자신이 사임해봤자 대통령이 결국 이도저도 아닌 인물을 그 자리에 채워넣을 수밖에 없음을, 즉 공화당이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허술한 인물을 새로운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음을, 이 현명한 늙은이는 이미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회를 장악하지 못한 힘없는 대통령은 저 혼자서 아무리 좋은 인물을 세우고 싶어도, 그런 인물은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결코 인준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늙은 대법관은 다시 무너져가는 몸을 이끌고 법원으로 돌아간다.

 

3. 

나는 DJ로부터 이 늙고 지쳤지만 꼬장꼬장한 대법관의 고독을 본다. 그의 집권 중 한때는 "그의 주변에 '인(人)의 장막'이 둘러쳐 있다"는 소문이 떠돌곤 했다. 조중동의 쑤석임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의심하면서도, 어쨌거나 그의 추종자를 자칭하던 이들조차 그에게 등을 보였다. 집권 말기 아들 비리가 터지자 등돌려버린 이들이, 지금은 그의 후계자를 참칭하며 현재 민주당의 주류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호남 민심은 아직도 DJ의 발언에 민감한데, 정작 DJ가 그토록 애착하던 민주당에 속한 의원 나리들은 진작 DJ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노짱의 영결실에서 오열하는 김대중

 

나는 이러한 점, 즉 'DJ의 노환'이 어쩌면 세칭 '친노그룹'으로 하여금 신당 창당의 노선을 망설이게 하는 몇몇 이유 가운데 큼직한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나라의 자랑인 어르신의 서거를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아프고 또 망측한 소리지만, 그럼에도 예측은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나이 83세, 그의 건강은 신문 헤드라인에 언제 부고가 떠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 아닌가...

 

가장 바람직한 건 그가 앞으로도 10여년은 더 정정하게 생존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호남의 민심과 '친노그룹' 사이의 유대를 더 확실하게 복원해주고 떠나기를, 나는 희망한다.

MB의 임기 중 그가 세상을 떠나버리면 엉뚱하게도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시대정신은 방향성을 상실할 것이며, 나아가 엉뚱하게도 친노그룹이 정치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친노의 궤멸은 영남을 그대로 딴나라에 헌납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며, 어떻게든 영남을 포섭하지 못한 채 차기 대선을 치르게 되면 필패할 것이란 예측에 그리 대단한 통찰은 필요치 않다.

 

 

※ 이 포스팅을 올린 바로 다음날(7.3) DJ는 "노무현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말라"(오마이뉴스)라는 기사를 통해 지난 영결식 때 하지 못한 추도문을 공개했다. 이는 딴지의 김어준이 평한 것처럼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과 상처를 일거에 치유하고 다시 하나로 정서적 통합시킨, 절대 순간"의 연장선 위에 있다. (관련기사)

 

※ 2009. 7.6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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