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9일 화요일

<아바타> 극장 관람 후기

 

"I see you"

 

1.

오히려 3D는 기대만 못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단 관람 매너 따위 알 리 없는 꼬꼬마들과, 4시 방향에서 끊임없이 종이 봉지를 구겨댄 이유가 궁금한 '스크자응' 한 분, 그리고 영화는 중반까지 왔는데 "어머, 쟤가 제이크야?"라고 묻던 7시 방향 아가씨까지, 말하자면 '총체적 난국'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빨리 돈 벌어서 극장이나 하나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동족들에 대한 투정은 이 정도로만 하자. 적어도 덕분에 30대 독신남 홀로 극장에 앉아 질질 짤 만큼 몰입하진 않아도 되었으니까. 이런 걸 감사히 여긴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기를.

 

각기 다른 표정에 주목

 

2.

이미 천 만 가까운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한다. 두 번, 세 번 본 이도 있을 테니 실제 관객수는 조금 모자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엄청난 숫자다. '이런' 대박 블록버스터들이 흔히 그러하듯 작품의 감상과 평가도 "최고다!"에서부터 "쓰레기다"까지 양 극단을 아우르는 듯하다. 다소 감성적인 다수파와, 냉소적인 소수파.

평소 최후의 소수파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아왔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주저없이 다수파 곁에 서기로 했다. 그들이 옳다. 내 편이 제대로 봤다.

 

내게도 세상에 대한 냉소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건전한 재능을 쌓아올려야 할 시기에 내 정신은, 이문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익기도 전에 병들었다." 멀리 혹은 넓게 살피지 않아도 충분히 눈에 들어오게 되는 세상의 부조리들, 불합리들, 부도덕들을 노둣돌 삼아,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고 결론지었다. 악화는 언제까지나 양화를 구축할 것이고, 우리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기 목을 조를 것이다. 이런 곳에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고 별달리 용기있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오늘 또 하루 간신히 숨쉬며 휘청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2002년 겨울,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가 승리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세상도 가능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나 답게 좀 느릿한 걸음으로.

<아바타>는 이런 우리들에게 바쳐진 영화다.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냐."

가장 울컥했던 장면. 사랑해요 트루디!

 

3.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21세기에 속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권위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봉건의 잔재들도, 철모르는 아나키즘과 대책없는 낙관주의 같은 것들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 머물러 있다.

한때 나의 영웅이던 이문열 같은 이들은, 역사를 권위주의와 아나키즘의 무한루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니 <칼레파타칼라>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 <호모 엑세쿠탄스> 이후의 그의 책은 하나도 읽질 않았으니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없다면 여전히 희망은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 <아바타>는, 가상의 별 '판도라'를 통해 20세기를 매조지하려 한다. 그 방식은 새 시대의 첫차라기 보단 구 시대의 막차다. 영화가 '피에타'서부터 <원령공주>, <공각기동대> 등 일본 애니메이션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오마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놀랍게도, 아직도 '오마쥬'라는 말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휘라고 한다. 그러니 별것도 아닌 일에 표절이니 패러디니 매번 난리굿.)

마침(?) 판도라는 고통과 희망이 함께 담긴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린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과학기술 즉 문명이, 신성(神聖)의 영역을 침범할 때 간혹 인용되곤 한다.

 

"Network of energy"

 

4.

생떽쥐베리는 "완벽이란 무언가를 더 할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수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라고 했다던데, 나는 이 어르신 말씀을 신용하는 편이다. <어린왕자> 쯤 되는 작품을 쓰고, 날아 다니다 죽었으면 그런 양반이 한 얘긴 복음처럼 들어줘야 한다.

 

<아바타>에는 단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더라. 하기는 러닝타임 162분에 제작비 3천억 원, 페르미식 막계산 때려보면 프레임 하나 당 무려 100만원꼴이다. 단돈 13000원에 이런 위대한 성취를 목격할 기회를 얻었다면, 조용히 찬가나 부르는 게 나 같은 필부의 역할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댓글 2개:

  1. 메멘토적 기억상실로 인하여 제가 쓰지 못한

    아쉬운 부분을 많이 적어 주셨습니다.

    오마쥬... 특히,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Beholder님의 생각은 많은 부분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느껴집니다.



    아~ 정말로 아바타 좋은 영화를 참 운 좋게 보았고,

    그 우연성의 귀착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지 모릅니다. ^^

    아무리 좋다 한들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저도 항상 혼자서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감상 시스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극장을 만드신다는 얘긴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시겠지요? ^^

    설마 진짜로 극장을 운영하시고자 하시는 건... ^^



    전 수리에 약하여 생각하지 못했는데...

    프레임당 100만원 꼴의 영화라...

    수치로 환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 들어 있을 제작진들의 땀으로 느껴져서...

    다시금 아바타가 좋은 영화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Beholder님의 좋은 아바타 리뷰 정말 공감하며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Beholder님..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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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별 - 2010/01/20 12:41
    저 역시 수리에 취약하며, 극장을 운영하려는 건 아닙니다. ㅎㅎ;; 이런 것도 말씀하신 공통분모 같은 게 되려나요. ㅋ



    오마쥬 관한 부분은, 맥락상 적어넣기가 애매해서 빼두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해 '라이트유저'들은 표절이라 하고, '파워유저'들은 클리셰라고도 할 것 같더군요.



    아직도 안 보신 분들이야 뭐, <아바타 II> 나올 때 되면 부랴부랴 찾아들 다니시겠지요. ㅎㅎ 그때도 3D로 관람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땐 더 진보한 영상을 볼 수도 있겠군요.



    그별님의 리뷰도 잘 봤습니다. 3편하고 5편이었나- 이제 마저 솜솜 뜯어보러 갑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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