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화요일

디씨 압갤 정모 후기

생판 모르는 고딩이들이랑 정모를 했다. 정확히 말해보자면 현역 고딩 하나, 막 수능 친 고딩 하나, 3년 전에 수능 친 고딩 하나. 본인들은 각기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나이를 10여년 전에 지나친 나로서는 다 거기서 거기다. 나를 돌아봐도 그렇고.

나이 먹으면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다.

 

근 보름 전부터 영화 <아바타>에 푹 빠져 있었다. 영상미도 영상미지만, 제임스 카메론이 4억 달러나 들여서 이런 착한 영화를 만들어준 것이 고마워서라도 다시 볼 때마다 먹먹했다. 첨단 중에서도 최첨단 문명의 힘을 빌려 만든 반문명 영화라니. 아이러니도 이런 건 기분 좋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통 열광하는 이가 없기에, 꾸역꾸역 대한민국 '잉여'의 총본산 '디씨'를 찾았다. 아니나다를까 벌써부터 '아바타 갤러리'가 만들어져 있다. 게시물 '리젠 속도(인터넷 게시판에서 글 따위가 여러 사용자에 의해 등록되는 양)'도 만만치 않은 것이 꽤나 활성화된 것 같았다. 이들의 화제는 온통 <아바타>였다.

 

반가운 마음에 진작 써둔 리뷰를 퍼올리고, 과연 얘들은 어떻게 노는 걸까 궁금해 같이 댓글놀이를 하며 지켜보는데, 마침 정모를 하잔다. 나야 먹고 죽을래도 주말에 약속이 없는 사람,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나타난다 해도 나 역시 장년의 남성, 피해야 할 이유도 없고.

 

정모 하면 뭐할까, 하는데 나오는 얘기들 역시 대략 10년 전에 즐기던 것들이다. 허허, 그래 나도 그 나이 땐 노래방 열심히 다녔니라. (피시방은 없었지만) <아바타>는 3D 뿐만 아니라 4D로도 한다는데, 그거 첫경험이나 좀 하자. 대충 리딩하는 녀석이 눈에 띄길래, 슬쩍 교통정리를 좀 했다. 시간-장소-회비, 사실 이것만 정하면 어떤 사람들끼리라도 만남은 가능하다. 보통 이런 만남이 계획단계에서 파토가 나는 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이럴 땐 잽싸게 '대장'을 뽑아놓고 딱 저 세 가지만 정한 후 나머진 몽땅 위임하는 게 좋다. 민주주의는 그게 더 효율적일 때나 가치 있는 거다.

 

대장을 뽑아놓고 나니 일사천리로 약속이 잡혔다. 영등포역 9시. 으잉? 9시라니. 최근 몇년간 9시에 취침한 게 9시에 기상한 경우보다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토요일에 일을 나갔다. 원래는 안 나가는 날이다. 날짜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내 자리에 앉아 있는 알바를 보고서야 토요일이란 걸 알았다. (너무 비웃지 않았으면 한다. 뉴턴도 이런 버릇이 있었댄다.) 헛헛한 마음에 근처에 있는 국참당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마침 이 사람들도 죄다 MT를 갔다. 한 명도 남김없이. 허허 이런 젠장.

암튼 이런 심리상태에서 밤을 샜다. 뭔가 딴짓에 열중하다 정신차리고 보니 새벽 2신가 3시쯤 됐더라. 9시까지 영등포로 나가려면 집에서 8시엔 나가야 한다. 씻고 어쩌고 하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난 잠이 쉽게 드는 타입이 아니라 한두 시간씩 뒤척이곤 한다. 잘해야 2~3시간 자고 나가게 생겼다. 그나마 일어날 수 있으면 다행이다.

결국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던 하루쯤 밤새는 일이 점점 더 고되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역사적인' 만남, 하루쯤 밤새줄 수 있다.

 

결과적으론, 처음으로 <아바타>를 보다 졸았다. 3D나 4D였으면 안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다섯 번이나 봐서 웃음도 한 템포 일찍, 눈물도 한 템포 일찍 나오는데 어쩌랴. 추격씬에선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더라. 가끔씩 옆자리의 또랑한 눈망울을 훔쳐보며, 아 이렇게 속절없이 늙어가는구나 싶었다.

 

이런 '짓' 안 했으면, 내가 언제 내 나이 절반 되는 친구들과 말 섞어볼 수 있었을까.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녀석들을.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걸으면서도 화제가 바닥나지 않는 조잘거림을.

 

이봐 친구들. 횽은 니들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술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술도 한잔 하자꾸나. 우리 이대로, 뭔가에 미치는 것을 겁내지 말자. 세상은, 미친 놈들이 만들어 가는 거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I see you."

댓글 5개:

  1. 오와아앙. 이런 모임 재밌겠다. 게다가 아바타라니T.T

    제 주위에도 아바타에 흥분하는 사람이 먼 선배 하나 뿐이에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는 -.-



    '아이씨유' 라는 말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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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흰돌고래 - 2010/01/28 18:43
    저는 나중에야 깨달은 건데- 극중에서 I see you는 결국 I love you라는 뜻이더군요.

    그러고나서 다시 보니 좀, 손발이 오글거리더라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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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eholder - 2010/01/28 21:08
    히히 저는 단박에 알아 들었어요 *-_-*

    '사랑해요'란 말보다 더 좋은 말 같아요~

    너에 대한 어떤 오해가 하나도 없이, 정말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본다는 말이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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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흰돌고래 - 2010/01/28 18:43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어찌 한 점 오해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 오해조차 선의로 해석해주겠다-라는 의미로 느껴져서, 왜 극 초반에 네이티리가 제이크에게 "하늘 사람들은 볼 줄 몰라"라고 했는지 좀 더 이해가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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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eholder - 2010/01/29 02:08
    ^^ 저도 그 대사 기억해요! 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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