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4일 월요일

폭설

밤사이 온 천지가 하얗게 덮이었습니다

눈은 낡은 옥탑의 남루도 가려주었고

어쩌면 눈부셔 내 눈도 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서정주의 싯구처럼 눈은 그저 괜찬타, 괜찬타- 하는군요

그 아래 묻힌 것들이 무엇이건

 

달콤한 거짓보단 쓴 진실을 원합니다

봄이 채 오기도 전에 눈은 녹아 사라질 테지요

 

고마워요 숨기지 않아줘서

그래도 눈발이 나리는 날에는 춥지 않아 다행이에요

참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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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서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선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 <진눈깨비>,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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