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서른셋의 자화상

유시민은 자신의 서른 살을 맞아 다음과 같은 자서(自敍)를 남겼다. 그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멘토 중 하나다.


서른 살의 자화상_유시민


다시 읽어봐도 정말 그릇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제 정신이라면 도저히 이곳에 링크를 걸어두기는 민망할 노릇이지만, 부끄러움은 잠시 덮어두고, 나도 나의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한다. 나도 이젠 서른 하고도 셋이다.

 


01.
나는 뭐든 한 가지에 오래 집중하질 못한다. 인정하긴 무척 싫지만, 사실이 그렇다.


어떤 선천적 기질 같은 것이었을까. 내겐 첫 '타인의 시선'이었던 초등1학년 담임선생의 생활 평가는 "두뇌 명석하나 주의가 산만함"이었다. 이 열 두 글자는 이걸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학생들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던 생활기록부를 꽤나 어릴 적에 보게 된 모양이다. 초등학교를 두 번 전학했는데, 아마도 그 와중이었던 것 같다.


(그땐 "주의 산만함"의 뜻을 몰랐다. 그저 '주의가 山 만하다'는 소린가 흘려 넘기고 '두뇌 명석'에 만족했다. 곧바로 국어사전을 뒤져볼 정도의 부지런함만 내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02.
그래서인지 내 앎이란 것은 넓고 또 얕다. 자랑삼아 말해보자면, 나는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평균 이상'의 상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분야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가장 대중적인 대화소재랄 수 있는 연예, 스포츠, 자동차 이 세 분야에 대해선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 이슈들의 공통점이라면 어떤 분야에서든 좀 식자연하는 사람들이 주로 기피하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그들 중 하나라고 느낀다.


문제는 내 앎이 얄팍하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한때 '박학다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한 적이 있다. 무슨 '자뻑'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엷을 薄자에 먹을 食자를 써서 '薄學多食'이었다. 당시 나는 사자성어에 좀 빠져 있었고, 더는 스스로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을 때 이 이름도 버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學이 薄하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내 얕은 앎은 내 인간관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다.

 

 

03.
사람은 동류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해본다면, 자신과 종(種)이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동류를 좋아한다. 여기서 동류라 함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공통의 관심사는 평화를 주고, 고독을 가져간다. 평화가 지루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자신이 항상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든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 사람을 하나 찔러 볼 일이다. 그리고 감방에서 난동을 좀 피워주면, 몇대쯤 얻어맞을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즐기는 것을 국립 원룸에서 마음껏 누릴 수 다.)

 

동류는 곧 동족이다. 명빠나 노빠나 결국은 다 정치 '오타쿠'들인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제각기 머리 속에 품고 있는 세계가 있고, 저마다 다른 종족과 어울려 살아간다. 내 세계엔 이건희가 있지만, 이건희의 세계엔 확실히 내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아마 점(pixel) 하나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터, 이 사실은 내게 별로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부터 벗어나 유쾌한 기분으로 나아가기 위해, 즉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동족을 찾아나선다.

 


04.
대개 동족은 무리지어 산다. 그런데 나의 동족들은 대체로 돈 버는 재주가 없다. 어느날 갑자기 우화(羽化)한 후 나비처럼 날아가더라는 소식이 간간이 전해오긴 하는데, 그보단 지리멸렬한 인생이 더 많다. 가끔 골방에 모여 앉아 우화의 비법을 수근대기도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외롭게 지낸다. 가끔은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을 깜빡하기도 하면서.

 


05.
이방인이 어느 동족집단에 끼어들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통과의례는 동족인 척하려는 자를 효과적으로 걸러낸다. 척하려는 자는 대개 신용할 수 없으므로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앞에서 밝힌 이유로 해서, 다양한 통과의례를 비교적 쉽게 통과하는 편이다.

 


06.
무리의 중심에 들어가면 무리의 구루(guru)를 만날 수 있다. 그 형태가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아니면 아예 아나키즘이든, 무리 중에는 무리를 이끄는 자가 있다. 그들은 때로는 공공연하게 때로는 은근슬쩍 드물게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무리를 조종한다. 그들이 내놓는 말의 무게는 다른 동족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리의 중심 혹은 변두리 어느곳에서 내가 운좋게 그 구루들과 마주치게 되면, 그들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곤 한다. 구루들은 모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 그들이 내놓는 시험은 여느 통과의례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 박학은 당연히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이대로 남아 무리의 규칙을 배울 것이냐, 아니면 무리를 떠날 것이냐.

 


07.
나는 대체로 떠남을 선택했다. 저 바깥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 어딘가에는 진짜인 나를 알아봐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라는 기대는, 만남과 떠남이 반복되면서 점차 엷어졌다.

 

운좋게도 일찍부터 여러 구루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좋은 구루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세상에 그리 많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주 까다로운 안목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란 상실을 겪어보기 전엔 매우 어려운 일이다.

 


08.
결국 나는 떠돌이가 되었다. 지금보단 정신력이 강했던, 혹은 둔감했던 시절에는 그것도 대충 견딜 만했다. 요즘엔 좀 한심한 말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 시절엔 '이방인(etranger)', '아웃사이더'라는 말이 그리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사용되진 않았던 덕분에, 더러 작은 무리의 구루 행세를 할 기회도 있었고 외로움도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나는 흑맥주 스타우트의 초기 CF를 좋아했는데-"덤벼라 세상아!"- 그것이 저 호시절의 기분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09.
그리고 어느덧 서른셋이 되었다. 이럴 땐 정말 한국식 나이세기가 싫다. 하지만 만으로도 32세. 공자님 말씀대로라면 이립(而立)을 진작 지났다. 이립은 똑바로 선다는 뜻이다. 지학(志學)의 시기에 내 나이 서른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대략 "남자 나이 서른이면 대충 인생의 결론이 보이는 나이"라고 썼다. (당시 지금의 내 나이 무렵이던 선생께서는 그 프린트 뭉치를 받아 들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이제 서른 셋이다. 요즘 나는 내 삶에 대해 묘사할 때, "휘청댄다"라고 쓴다.

 


10.
나는 내 휘청임이 부끄럽다. 아직 내 곁에 남아준 벗들에게 부끄럽고, 아직도 내게 기댈 수 없는 부모에게 부끄럽고, 내 몫의 짐까지 짊어진 아우에게 부끄럽다. 나는 아버지의 묘 앞에서 울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부끄러운 건 바로 열다섯의 나 자신 앞에서이다. 나는 그 녀석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아니, 살지 않았다.

 


11.
나는 핑계가 많다. 운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고, 그중엔 '나는 치열하지 않았다'는 식의 내'탓'도 섞여 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더 큰 죄악이라던데, 그게 바로 내가 잘하는 그것이다.

 


12.
이제 결론을 내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 즉 성공은 운과 환경, 그리고 개인의 노력에 좌우된다.


운은 좋았다.

그중 최고는 정직하고 현명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한 아버지이다. 무학에 평생을 가난했지만 인격적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아들들이 쉽게 비뚤어진 것을 나는 많이 보았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끼도 밥을 굶은 적이 없다. 굶주림이 얼마나 사람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도 보았다.
어머니도 좋았다. 그리 현명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건강을 잃기 전에나 후에나, 친자식을 정말로 잊어버릴 만큼이나 나와 내 아우를 공정하게 보살피셨다. 백일휴가 복귀 날, 깜빡 두고 간 휴가증을 찾으러 돌아갔을 때 발견한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까지고 잊지 않을 것이다.


환경은 좀 별로였다.

적절한 시기에 "8학군" 진입을 선택한 아버지는 현명했지만, 충분히 악착같지는 못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서초동 꽃마을에선 마을 이름에만 꽃이 피었다. 거기서 보낸 유년은 내게 깊은 열등감과 비뚤어진 호승심, 그리고 분수를 모르는 욕심을 남겼다. 이는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도 몇몇 아주 똘똘한 벗을 함께 주었기에, 그냥 만족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노력은, 모든 것이 핑계일 수밖에 없을 만큼 명백히 어리석었다. 시야는 좁았고 선택은 항상 일렀으며 또 무모했다. 용기와 무모함을 가르는 기준은 리스크를 알고 있느냐이다. 나는 용기라고 믿었지만 실은 무모함이었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운과 환경은 누구도 어찌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노력 만큼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머리가 내 선택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마음만을 따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충동의 결과가 나의 오늘이다. 나는 이 사실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만족스럽지 않다면 바꿔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13.
여전한 문제는 내가 아직도 나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동족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순 없다. 선택이 필요한 종류의 일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 시간이 온다. 나는 이미 얼마간 늦은 듯하다.


따라서 다음 계단까지의 남은 삶을 걸고 나는 다시 선택한다. 이번 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길 기대하면서.


첫째, 나는 내 배움을 기록한다. 찌질한 일기든 어설픈 선동이든 소소한 감상의 기록이든, 내겐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쓰며 사는 삶을 꿈꿨으면서도 항상 다른 것에 취해 있었다. 취함은 쾌락은 줬지만 기능을 닦아주진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열심히, 끈질기게 하지 않는 것을 잘하게 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좋아하는 것은 자주 하기 때문에 잘하게 된다. 많이 쓰다보면 조금은 더 잘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건다.

 

둘째, 나는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지 않는다. 가능하면 연애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최소한으로 한다. 덜 쓸 수 있으면 덜 벌어도 된다. 덜 벌어도 되면 이 소중한 자원을 더 많이, 쓰는 것에 투자할 수 있다. 더 많은 투자는 더 나은 결과의 확률을 높일 것이다.

시간은 돈이라는 말이 있다. 즉 돈은 시간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시간을 팔아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산다. 마침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인생은 무척 안락해질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흔치 않다. 팔 수 있는 시간의 값이 너무 싸다면, 하고 싶은 일의 양이라도 줄여야 한다.

삶은 공정하다. 무엇이든 버린 딱 그 만큼만 얻는다. 3천원 짜리 타꼬야키를 포기하면 1천원 짜리 붕어빵을 사먹고도 2천원을 남길 수 있다. 다행히 내겐 미식의 취미가 없다.


 

14.
이 남루한 자서를 쓰며 그나마 스스로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헤매던 시절도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제는 아니다. 긴 방황이 내게 남겨준 유일한 자산이다.

나는 내 욕망을 그 어느 때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내 욕망은 내 분수를 벗어날 만큼이나 크고 단단하다. 그리고 이 탐스러운 욕망을 난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는 누가 뭐래도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서른셋이 다소 불만족스러울지언정 또다시 절망해야 할 만큼 낙오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_발정이 절정에 달한 어느 늦은 새벽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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