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목요일

샤워에 비롯한 단상_2008.07.21

'몰입' 상태에서는 샤워가 매우 즐겁다. 하긴 즐거운 것이 샤워 뿐이랴마는...
그래서 오래 하게 된다. 즐거운 것은 오래 누리고 싶은 것이므로.


온 몸의 세포가 살아난 듯한 감각은 샤워기의 물줄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물은 적당한 온수가 좋다. 사람은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적당한 온수를 즐긴다.

 

온 몸에 비누칠을 하는 것은 자기 애무이다.
자기와의 성교를 자위라고 한다면, 자기 애무란 것도 없으란 법 없다.
난 해본 적 없지만, 맛사지샵이나 아무튼 그런 데서 해준다는 오일 맛사지 같은 것도
결국은 성감을 자극하는 것이다. 모든 촉감은 성감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렇다면 모든 감각 역시 성감으로 환원된다. 물론 이 때의 '성감'은 조금 다른 의미겠지만.
애무-부드럽게 어루만짐-는 매우 성적이다.


이와 같은 '샤워의 즐거움'은 종종 혹은 자주 '귀찮음'과 전쟁을 벌인다.
만사가 귀찮은 상태- 몹시 피로한 경우 사람은 휴식을 필요로 한다.
휴식은 닫는 것이 가능한 모든 감각을 닫고 뇌가 그동안 수용된 정보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근육세포들은 손상된 세포질과 아세트알데히드(던가?)와 같은 피로물질들을 내보내며 근육을 정화하고,
신경세포들-특히 뇌-은 온갖 기록으로 얼기설기 얽힌 시냅스들을
디스크 정리, 조각 모음, 백업하듯이 가다듬는 것이다.


한때 인간 존재의 핵으로서의 뇌, 특히 대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에 빠진 적이 있었다.
'영혼이라든가 하는 비물질적인 것을 배제할 때, 내 뇌가 나로 인식하는 나 자신이라면,
내 뇌는 무엇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는가?'
흔히 알려진 신을 믿는 편한 녀석들이야 그게 바로 영혼이고 신이라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그건 아직 이 차원에서 거론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영혼을 뇌세포 간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사건으로 이해했을 때 비로소 내 의문은 답을 찾았다.
우리는 네트워크에 참여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나를 통제하지만 나의 행동을 모두 예측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필연적인 우연인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다.
당신은 유신론자인가? 아니면 무신론자인가?
'신 따위 알 게 뭐야? (경제도 어려운데ㅋㅋ)'라고 한다면 나는 되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그 절망을 견디고 있는가?"


당신이 유신론자, 그러니까 물적 인간 이외의 어떤 초월적인 의지가 존재하고 작용한다고 믿는다면
역시 나는 묻는다.
"당신의 기도는 응답받고 있는가?"


전자는 근대에 와서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된 것 같고,
후자는 수 천년을 살아남은 신앙으로 존재하고 있다.


일부 기도가 응답받고 있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왜, 그 또는 그녀 또는 그것은 모든 기도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절망을 견뎌낸 실존의 동료들에게는 박수를.
욕망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다. No pain, no gain.
욕망을 한정하면, 고통도 한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다.

 

아이는 정말, 폭발적인 축복이다.
당신의 유전자는 끊임없이 당신에게 충동질한다. 섹스를 하라. 그리고 아이를 낳아라.


결국 모든 문제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서 출발한다.
무한의 존재가 자기 복제의 필요성을 느낄리 없다.
더 많은 나를 닮은 다른 나를 낳아라, 모든 욕망은 여기서 시작한다. 영생.
이것은 유한한 존재가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이다.


자기 혐오에 빠진 범죄자 따위를 반례로 들진 말아주길.
어떤 이야기든 비교되기 위해선 같은 차원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사람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는 다른 네트워크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더 큰 규모의 사건을 일으키곤 하니까.


오히려 아이를 낳고나서 철든 이야기라던가
여성들에게선 비인간적인 중범죄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등의 이야기가 더 보편적일 것이다.
탄생의 신비를 직접 체험하고 그 가능성을 품은 여성들로선
그 파괴가 뜻하는 바를 남성들보단 훨씬 더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인류사에서 끊임없이 여성성의 숭배가 있어왔다는 것 또한 이를 간증한다.

 


남성의 섹스를 여성성의 숭배 행위로 관찰하면 더욱 흥미롭다.
오, 부디 '숭배'를 애무와 혼동하지 않기를.
인간은 제물의 목을 따며 숭배하기도 했고, 산 채로 불에 굽기도,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매달려 있다.
갖다붙이자면, 섹스를 주로 남성이 주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도 하겠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겐 아주 바람직하지 않을,
발기-삽입-사정의 3단 콤보는 내가 말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
어떤 여성이라도 이런 행위를 '섹스'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남성에게는 1회다.
아무리 화려한 환락의 시간을 보냈건, '푹찍, 끝!'이었건 1회는 1회다.
때로 나른한 연인이 어깻죽지를 파고들던, 훌쩍 일어나 속옷과 화대를 챙기던 간에
사정 후에 밀려오는 피로와 허무감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남성은 섹스에 임할 때 상대의 기쁨을 위해 최선을 다 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최선의 보답을 받는 건 아니지만. ㅋㅋ
대상의 기쁨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 숭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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