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목요일

[쪼가리뷰] 'The man from earth' 주인공은 왜 아들을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을까?_2008.07.30

 

먼저 이 글은 최악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정말 놓치기 아까운, 재밌는 영화이기 때문에 스포일링 당하고 나면 참기 어려운 분노가 치밀 수 있습니다.

 

이건 골치 아픈 딜레마입니다. 어떤 창작물에 대한 추천(리뷰)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 핵심을 잘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리뷰를 통해 이 핵심이 잘 전달되고 나면,

정작 원본의 재미는 떨어져버리는 작품들이 있다는 거죠. "절름발이가 법인이다!"

이는 영화나 소설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텍스트에도 공히 해당됩니다.

다만 영화나 소설과 같은 스토리 텔링에 의존하는 작품들이 특히 이에 취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로써 흥한 자 말로 망한다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리뷰는 'Daum 영화'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역시 무시무시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저의 리뷰는 위에서 다루지 않은 몇몇 쪼가리를 건드려볼 것입니다.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절대 영화를 팔아줄 것 같지 않은  포스터.

 

 

 

주인공 존은 왜 아들을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주인공 존은 홀로 1만 4천년을 살아온 인간입니다.

우리의 동방삭이 무려 3천갑자(1만8천년)의 시간을 그저 '살기만 한' 것과 달리,

존은 붓다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이를 서구에 전해 결국 성경의 예수로 기록됩니다.

 

말하자면 존은 생사고락의 이치를 '깨달은 자'인 것이지요.

따라서 자식의 죽음을, 다른 죽음들보다 특별히 더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그는 실려나가는 아들의 시신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장례식 때는 돌아올 것입니다." 한 마디 할 뿐.

 

흔히 붓다의 가르침을 '인과율에 따른 윤회'로 오해하곤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불교?)의 궁극은 '해탈'.

해탈은 모든 인연의 순환을 끊고 무(無)로 돌아가는 것, 즉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나는 또 한 번 기형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기형도가 죽은 새벽의 심야극장, 그 비인간화된 캄캄한 도시 공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장소는 나를 늘 진저리치게 만든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의 검은 눈섭과 노래 잘하던 아름다운 목청이 흙 속에서 이제 썩고 ...(중략)... 아랑곳하지 않고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空이  되거라. ...(후략)" -김훈의 弔詞 중에서

 

사실 윤회란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육신의 죽음은 개체로서의 자아(小我)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며,

따라서 자아에 얼켜드는 온갖 인연 또한 부질없는 것이지요.

 

이 깨달음의 연장선 상에서만 존의 다른 행동(선택)들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샌디가 존을 따라간 이유, 혹은 존이 샌디를 데려간 이유.

 

이는 유한한 우리 보통 인간들의 마음을 엉망으로 휘저어 놓곤 하는,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초반 샌디는 이사 준비를 하는 존에게 불쑥 고백합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존." / "알아." 가엾은 샌디, 이렇게 불쌍한 대사를 치다니.

 

"알아."라니?! 무려 10년(?!)을 망설이다가(여자들이 좀 그렇죠) 떠날 때 돼서야 간신히 꺼내놓은 고백인데

대답이 고작 "I know."랍니다.

실망한 샌디는 눈물을 참으며 "날 사랑해줄 수는 있나요?(Could you love me?)"라고 묻습니다.

그래도 돌아오는 대답은 "수없이 겪은 일이야.", 실망한 표정의 샌디를 존이 위로랍시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당신을 좋아하고... 끌리는 편이긴 하지."

(영어가 짧아 정확한 영어대사는 모르겠습니다. 들리지도 않고, 영문 대본을 못 구해서 확인해볼 수도 없고... -_-;)

그래도 샌디는 급방긋 모드로 전환합니다. "난 그거면 되요.(I can walk with that.)" (work?)

 

그래서 존은 엔딩씬에서 샌디에게 차에 타는 것(자신의 유한한 삶을 존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깨달음을 현재로선 가장 객관적인 방법-과학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존이 자신이 1만4천년을 살아왔음을 밝히자... 벙찐 친구들.

 

 

 

 

누가 자신은 1만여년을 살아왔다고 주장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은 증명이 가능한가?

 

영화 초반 10여분의 지루함이, 단 한 방에 날아가는 순간!입니다. (영화 사상 최악의 스포일러일 듯.)

 

존 본인이 이미 대학 교수(역사학)이고 그 앞의 청자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당대의 석학까지는 아니더라도)들입니다.

인류학자 댄, 고고학자 아트, 생물학 교수인 해리,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는 윌은 정신분석학 교수이구요,

이 영화의 평가를 극단적으로 엇갈리게 만든 이디스는 미술 관련으로 추정되는데, 사실 크리스챤을 대표하지요.

(아니면 그냥 미술 쪽에 취미가 있는 신학자일 수도. 이들이 재직 중인 학교가 미션스쿨이라면 충분히 가능...)

그리고 샌디는 (그녀가 가르치는 과목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존을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또 아트의 조교인 린다는 젊은이 특유의 톡톡 튀는 질문들을 존에게 던집니다.

이 쟁쟁한 이들이 존에게 철학적, 과학적, 신학적 다구리를 놓습니다.

결코 존이 떠드는 '황당한 이야기'를 고분고분 듣고 앉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지적게임은 매우 흥미롭게 돌아갑니다.

 

이디스: "1,292년엔 어디 있었어?" / 존: "일년 전 오늘, 어디 있었어요?"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면 어떨까... 혼자의 힘으로 로마에 거역해? 로마가 이겼지."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좁아터진 문화적 다양성과 기독교 근본주의 덕분이겠지요.

 

엑스트라까지 다 합쳐도 출연진이 10명이 채 안되고

결코 오두막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만 펼쳐지는 이야기...

감독이 연출에 조금만 소홀했어도 견딜 수 없이 지루해졌을 이 영화는

적절한 카메라워크와 신중하게 고안된 배우들의 동선, 그리고 완벽한 시나리오로

러닝타임 87분내내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게 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영화의 네티즌 평가는 10점 만점에서 9~10점이 아니면 '1점'을 받아 8~9점 정도에 랭크되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꼭 한 번 봤으면 싶지만, 결코 보지 않으려 할 영화.

이 영화를 발견할 수 있도록 권해준 G군에게 크나큰 감사를 전하며 강추하는 바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신실한 이디스는 결코 존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댓글 3개:

  1. 저도 이 영화 진짜 좋았어요 * 빛나는 영화에요...

    그나저나 이런 포스팅을 하시는 Beholder 님이 참 부러워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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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흰돌고래 - 2010/01/21 00:10
    제겐 어느 센스 좋은 친구놈이 없었다면 흘려버렸을 가능성이 높은 명작이었습니다. ㅎㅎ 녀석 덕분에 좋은 영화들을 많이 골라볼 수 있었지요.



    그나저나, "꺄아"는, 제 블로그에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신선한 감탄사로군요. 킁킁.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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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기독교인이지만 정말 감탄하면서 봤거든요.

    기독교인들이 보지도 않을 거란 선입견은

    당최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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